▲ 김 명 환 목사

예수님은 율법교사의 대담에, “네 대답이 옳다.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고 말했다. 여기에서 ‘행하라!’는 토론을 배제하고, 지식의 영역에서 실천에로 옮겨 놓는 것이다. 하나님 사랑의 계명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잘 알고 있어도, 아는 것만으로는 영원한 생명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사람은 앎과 행함 사이에 높은 벽이 있다, 인간의 말은 공허하다. 이것이 인간이 타락한 비극의 결과이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계를 창조하고, 말씀으로 인간을 구원했다. 앎과 행함 사이의 단절을 지니고 있는 인간은, 실제 행함으로써 생명에 이를 수 있다.

또 ‘행하라’는 이웃사랑의 문제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이란 글을 쓰기 위해 (1)에서 인용한 성경구절을 보면, 하나님 나라에 대한 계명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를 않는다. 이웃사랑에 대한 계명만인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예수님 당시 하나님 사랑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웃사랑은 이론이 분분했고, 많은 문제가 되었다. 선민사상에 깊이 빠져든 유대인들에게 심각한 문제였다. 어디까지 이웃이며, 도대체 누가 이웃이냐는 것에 고민했다.

어느 시대, 어느 교파, 어느 종교이건 하나님 사랑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으며, 있는 그대로를 고백했다. 그러나 이웃사랑에 대해서는 구가 이웃이며, 어떤 방식으로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문제에 대해서 논란이 일었다. 예수님은 “누가 내 이웃이냐”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했다. 즐거리는 이렇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를 만났다. 상처를 입고 죽게 되었다. 제사장은 그 길을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발견하고 피해 갔다. 레위 사람도 피해서 지나갔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만이 강도 만난 사람을 측은히 여겨 구해 줬다”

여기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은 종교인을 대표한다. 이들은 율법을 잘 알고, 신앙도 좋았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이들의 율법지식과 신앙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은 신앙이었다. 그들의 율법지식과 신앙은 성전에서 쓰는 것이었다. 이들은 입으로만 율법과 하나님의 사랑을 말했다. 하지만 실제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분명한 것은 이들의 율법지식과 고지식한 신앙은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을 가렸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이들은 가난하고 소외된 유대민족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이 되었다.

이 성경귀절에서 나오는 사마리아인은 유대인과의 사이에서 반목이 뿌리깊게 박혔다. 에브라임 지파와 유대 지파의 갈등에서부터 적대감정이 시작되었다. 사마리아는 북이스라엘 수도로서 오랫동안 유대와의 경쟁관계에 있었다. 앗시리아 제국 등의 식민지 피압박민족으로 이스라엘의 순수한 혈통을 보존하지 못했다.
갈릴리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먼 길을 돌아서 예루살렘으로 가곤했다. 이렇게 원수처럼 여기는 사마리아인을 모법적인 이웃으로 설정한 것은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충격적이었다. 또 도전적이었다. 더욱이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문제를 사마리아인과 관련지었다.

분명 생명은 죽음을 거부하는 것이다. 생명은 생명을 움직이게 한다. 생명은 생명을 낳고 생명을 지킨다.

어린 자녀에 대한 부모의 애정은 바로 이런 생명의 본질을 그대로 드러낸다. 만약 어린 자녀가 사고로 상처를 입고 죽게 되었는데도 그것을 모른채 하는 부모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현대 부모들 중에는 이런 사람이 있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내 속에 생명이 있다면, 다른 생명이 죽음의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고 아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인천 갈릴리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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