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명 환 목사
성서에 나타난 사마리아인은 시종일관 상처입은자 중심으로 행동한다. 사마리아은 강도만난 자를 측은히 여겼지만, 자신의 감정에 지배되지도 않았다. 상처 입은 자의 필요에 따라서 행동했다. 여기에는 값싼 동정도 없었다. 감상적인 진철도 없었다. 사마리아인의 행동은 말 그대로 성숙한 행동을 했다.

율법 교사가 예수님에게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물었을 때, 예수님은 “이같이 행하라”(누가복음 10장 27절)라고 두 번이나 말씀 하셨다. 여기에서 에수님은 예수님이 영원한 생명을 믿음과 연결시키지 않았다. 행위에 연결시켰다. 오늘 호화로운 교회당을 건축해 놓고,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한국교회에 많은 것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죽어버린 믿음, 교리적으로 굳어져서 생명력을 상실한 믿음, 자기만의 믿음은 영원한 생명과 아무 관계가 없다. 예수님의 “이같이 행하라. 그리하면 영원히 살 것이다”고 말하신 예수님의 답변은 유대교뿐만 아니라, 개신교의 교리주의자, 고지식한 교인, 교권주의자, 무게의 중심을 나에게 둔 교인들에게 충경적인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믿음이 필요없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산 믿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 사랑하는 자유를 가지면 영원히 살 수 있다. 한마디로 계산하지 않고 조건 없는 아카페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조건을 붙인 사랑, 돌려받을 것을 계산한 사랑은 오염된 물이 질병과 죽음을 초래하듯이 인간에게 피곤할 뿐이다. 계산하지 않은 사람만이 맑은 샘물과 같아서 인간의 마음과 마음으로 흘러 생명을 풍부하게 해준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이 율법에 있지 않고, 믿음에 있지 않고, 사랑행위에 있다고 교훈한다.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현장으로 눈을 돌려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 사회에서 강도는 누구이며, 상처 입은 자는 누구인가. 우리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는 농민, 우리의 삶에 필요한 물건을 제공하는 노동자, 돈 때문에 도시인들의 배설구 되어버린 창녀,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시궁창보다도 못한 삶을 산 정신대 할머니, 무게의 중심을 잃어버리고 사고로 희생을 당한 학생과 유각족 등, 이들이 강도 만나 상처를 입은 사람이 아닌가.

그렇다면 오늘 우리사회에서 강도는 누구인가. 바로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찬 사회구조를 형성하고 지배하는 자들이 아닌가. 그들에게 상처를 주는 정책을 고집하는 정치인, 이런 사회구조가 잘 유지되도록 기름을 칠해 주는 지식인들, 종교인들이 아니겠는가. 오늘 세월호 참사로 인해 하루하루를 눈물로 지새우는 세월호 유각족들을 향해 쏟아내는 한국교회 성직자들의 막말을 보라. 그들에게 생명의 존엄성과 가치를 찾아볼 수 있는가를 보라.

누가 제사장이고, 레위인인가. 강도들이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강탈하는 현장을 보면서도 외면해 버리는 우리가 제사장이고 레위인이 아닌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말하면서도, 사랑의 행동을 하지 못하는 내가 바로 이런 위선자 아닌가.

그리스도는 어디에 있는가. 호화로운 교회당에 있는가. 함늘에만 있는가. 청와대와 국정농단의 중심이었던 청와대에 있는가.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는 지극히 작은 형제들 속에 있다고 하지 않았는거ㅏ.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는 상처 입고 쓰러진 강도 만난 사람의 모습으로 현존하지 않는가.

이 세상에서 피와 땀과 눈물을 흐리며 천대받은 자들이 바로 피와 눈물 흘리며 십자가에서 모독을 당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상처 입고 쓰러진 자들에게서 영원한 생명인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내 자신의 문제와 가정의 일에만 집착하면, 참생명인 그리스도를 만들 수 없다. 나 자신을 열고 나의 삶을 열 때, 상처받은 너를 발견하게 되고, 상처받은 나에게서 충만한 생명인 그리스도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 오늘 한국교회는 강도만나 상처 입은 이웃에게로 가자. 그곳에서 십자가에서 피와 눈물을 흐리며, 조롱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자.

/인천 갈릴리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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