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기 대선을 앞두고 대선주자들의 교계 방문이 한창이다. 최근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한국기독교총연합회, 한국교회연합 등을 잇따라 방문하며 자신의 입장을 피력했다.

이 같은 대선주자들의 방문은 매번 선거철이 되면 되풀이되고 있다. 이들의 방문 자체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지만, 권력 주변을 맴돌며 온갖 혜택을 누려온 한국교회 역사를 생각해 볼 때 한편으로는 씁쓸한 생각이 든다.

한국교회는 이 땅에 복음이 전파된 이후, 양적으로 눈부신 성장을 했다. 전국 방방곡곡에 교회가 세워졌고, 교인들이 급증했으며, 세계 곳곳에 수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선교강국으로 발돋움했다. 그러나 이러한 양적 성장의 뒤에는 세상 권력에 아부하고 굴복했던 암울한 역사가 공존하고 있다.

매년 선거철이면 되풀이되는 정치인들의 교회나 연합기관 방문이 그리 달갑지 않은 것은 바로 이러한 연유 때문이다.

△권력에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선교 초기 외국 선교사들에게 빌붙어 그 권력을 향유하려는 기독교인들이 다수 존재했다. 당시 기독교는 정부도 함부로 할 수 없는 힘의 종교였다. 선교사들은 최상의 경칭인 ‘양대인’으로 불렸다. 이들 양대인의 세력을 빌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외세의존적인 기독교인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이들은 선교사와 교회를 배경 삼아 지역의 민중들에게 온갖 폐해를 끼쳤다.

이러한 양대인 자세는 토착교회의 주체성 상실로 이어져, 이후 기독교 문화와 신학 분야에서 서구교회 종속을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 중요한 요인이 됐다. 또한 ‘양대인 자세’가 ‘선교사 닮기’로 이어지면서, ‘서구 중심적 사고’가 무분별하게 유입됐다.

한국교회는 일본 제국주의 치하에서 우상숭배적 신사참배에 앞장서고 교인들의 헌금으로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하는 부일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이 또한 당시의 지배세력이었던 일본이라는 정치권력에 편승한 것이다.

물론 3.1만세 운동과 독립운동에 기여하는 등 권력의 부정과 부패에 도전하고, 이를 바로잡으려는 시도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일제치하가 장기화되면서, 결국에는 신사참배와 부일협력 등 일본제국주의의 폭정에 앞잡이 노릇을 자처했다. 일제의 강요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신사참배와 부일협력을 한 교회도 있었겠지만, 일제 말기 교회는 조직적으로 또 자발적으로 일본제국주의에 협력했다는 것이 소신 있는 학자들의 평가이다.

해방 이후 한국전쟁과 이승만 정권의 시기에도 교회는 정권과 유착해 관변단체로 전락했다. 이 시기의 교회는 한국전쟁을 정당화하고 휴전반대 운동에 나섰다. 또한 전쟁 후에는 이승만 정권과 유착해 독재정권을 지지했다.

한국교회는 또한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의 군사정권기에도 권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한국교회는 반공을 최전면에 내세운 5.16군사 쿠데타를 즉각 환영했다. 유신체제가 들어섰을 때에도 이를 정당화했다. 박정희 정권이 유신헌법에 대한 비판을 원천 봉쇄한 긴급조치 9호를 발표했을 때 교회는 앞 다투어 구국기도회 및 집회를 열고 반공주의를 역설했다.

박정희 정권과 유착한 교회는 강력하게 정권의 지지 세력으로 자리를 잡았으며, 그 유착관계를 상징적으로 드러내 주는 사례가 국가조찬기도회였다.

1980년 광주민중항쟁을 유혈 진압하고 난 후 완전하게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과도 교회는 손쉽게 손을 잡았다. 이처럼 한국교회는 그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권력 주변을 맴돌면서 권력에 기대왔다. 이는 교회의 양적 성장을 가져왔지만, 교회를 그 본질로부터 멀어지게 함으로써, 교회의 병폐 현상을 양산하는 주요한 원인이 됐다.

△군사정권 아래서 권력과 야합
일반적으로 한국사회에서 군사정권기는 1961년 박정희의 5.16군사쿠데타로 시작하여 1972년 성립한 유신체제 전 기간, 그리고 1980년부터 1987년 민주화투쟁에 이르기 전까지의 신군부의 통치기간을 말한다.
군사쿠데타로 시작한 박정희 정권은 민족통일과 자립화, 민주화를 이룰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반공주의와 경제성장에 모든 것을 내걺으로써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길을 선택했다.

박정희체제하에서 진행된 한국적 근대화의 최대 수혜자이자 동시에 협력자는 교회였다. 한국교회의 ‘성공’과 박정희체제의 ‘성공’은 매우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어쩌면 가장 긴밀한 밀월시대로 평가하는 것이 더 정당할 것이다. 예컨대, ‘조국근대화’는 ‘민족복음화’와 등식을 이뤘고, ‘잘 살아보세’는 ‘삼박자 축복’과 등식관계를 이뤘다.

한국교회는 미군정과 한국전쟁, 이승만 정권을 지나며 반공주의를 체질적으로 내면화했다. 당시 반공주의는 한국교회의 자기정체성을 유지하는 최고 가치처럼 작동하고 있었다. 공산주의 위협을 막을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가치보다 우선한다는 것이 한국교회 입장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반공을 최전면에 내세운 5.16 군사 쿠데타를 즉각 환영했다.

쿠데타가 일어난 지 10일 만에 교계는 그것을 지지하는 성명을 냈다. 당시 한 교계신문은 “우리는 자유를 희생하더라도 방종하는 무리들이 숙정되는 것을 보고 싶다”고 주장했다. 1961년 5월 29일 당시 한국기독교연합회(NCC)도 조속한 민정이양을 촉구하기는 했지만, ‘혁명’의 정당성을 인정했다. “금반 5.16 군사혁명은 조국을 공산침략에서 구출하고 부정과 부패로 기울어져가는 조국을 재건하기 위한 부득이한 처사였다”고 밝히고 있다.

군사 쿠데타에 대한 교계 입장은 지지선언으로 그치지 않았다. 국가재건최고회의가 6월 10일 국가재건을 위한 자립경제를 구축하고 악습과 부패를 정화한다는 명목으로 재건국민운동을 전개할 때, 교계 유력한 인사들이 한 때나마 본부 중앙위원으로 참여했다. 또한 6월 하순에는 교계 인사들이 ‘혁명정부의 국제적 지지’를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 쿠데타에 대한 이해를 구하는 활동을 하기도 했다.

교회는 유신체제가 들어섰을 때에도 5.16 군사쿠데타를 지지했던 것과 다르지 않은 논리로 정당화했다. 10월 유신체제 등장과 함께 더 강력하게 반공주의에 편승하게 됐다.

1975년 베트남과 캄보디아가 공산화되고, 이를 빌미로 박정희 정권이 유신헌법에 대한 비판을 원천 봉쇄한 긴급조치 9호를 발표했을 때 반공주의로 일관해 온 교회는 앞 다투어 구국기도회 및 집회를 열고 반공주의를 역설했다.

이렇게 반공주의로 무장한 한국교회는 복음의 보편성이나 인권의 보편성에 대해서는 아예 사고하기를 중단하고 국익과 체제안보에 매몰됐다.

△권력 주변에 기웃거리지 말라
5.16 군사쿠데타 당시 한국교회는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거의 한 목소리로 ‘혁명’을 지지하고 나섰다. 그러나 사실상 민정이양이 이뤄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후 한일협정 체결과 삼선개헌 과정을 지켜보면서 교계는 반성을 하기 시작했고 정권에 대한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는 교회 흐름을 뚜렷하게 형성했다.

그리고 그 흐름은 1970년대와 1980년대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주도적으로 나선 한국교회 전통을 형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공주의를 유대기반으로 박정희정권과 유착을 하기 시작한 교회는 오히려 더욱 강력하게 정권의 지지 세력으로 자리를 잡아간다. 그 유착관계를 상징적으로 드러내 주는 사례가 국가조찬기도회이다.

애초 국가조찬기도회는 1966년 2월 3일 기독교인 국회의원을 중심으로 원내 조찬기도회가 조직되어, 3월 8일에 조선호텔에서 대통령 조찬기도회를 개최한 데서 유래한다. 이후 연례행사로 치러왔는데 1976년부터 국가조찬기도회로 이름을 바꾸어 지속됐고, 1980년대 신군부 통치시대에도 지속됐다.

정권 입장에서야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장도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할 리 없었다. 교회 입장에서도 체제를 뒷받침해주고 협력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실리를 생각했다. 정권과 유착한 교회의 그와 같은 속내는 1973년 제6회 조찬기도회에서 한 K목사의 설교에서도 잘 드러난다.

“민족의 운명을 걸고 세계의 주시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10월 유신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기어이 성공시켜야 하겠다. … 당초 정신혁명의 성격도 포함하고 있는 이 운동은 … 맑스주의와 허무주의를 초극하는 새로운 정신적 차원으로까지 승화시켜야 될 줄 안다. 외람되지만 각하의 치하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군 신자화운동이 종교계에서는 이미 세계적 자랑이 되고 있는데, 그것이 만일 전민족 신자화운동으로까지 확대될 수 있다면 10월 유신은 실로 세계 정신사적 새 물결을 만들고 신명기 28장에 약속된 성서적 축복을 받을 것이다.”

이 설교에서는 정권의 비호 속에서 안정적으로 기독교 신자를 늘일 수 있다는 실리 계산이 숨겨지지 않은 채 드러나고 있다.

폭압적인 유신통치가 시행되고 이에 대해 저항하는 기독교인들 다수가 탄압을 받고 있는 바로 그 시기에 보수적 교회와 교계 인사들이 주도하는 각종 대형집회들이 정권의 비호 속에서 매우 빈번히 열렸고, 그와 같은 대형집회들은 기독교인들의 양적 성장을 가져오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80년 광주민중항쟁을 유혈 진압하고 난 후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과도 교회는 손쉽게 손을 잡았다. 그 해 8월 6일 유력한 교계 인사들은 서울 롯데호텔 에머랄드룸에서 나라를 위한 조찬기도회를 열어 전두환을 앞에 두고 군권찬탈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하고 그의 장도를 축복했다. 신군부에 대한 교계 인사들의 협력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1980년 5월 초헌법적 기관으로 ‘국보위’가 만들어졌을 때 다수의 교계 인사들이 입법위원 또는 국보위 종교부 담당자들로 협력했다. 계속해서 신군부 치하에서 국가조찬기도회 역시 끊이지 않았고,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거센 국민적 저항이 일어나고 있던 바로 그 시점에도 계속됐다.

정치권력에 야합하는 한국교회의 행태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최순실 국정농단도 고 최태민 목사로부터 시작됐다. 정권과 야합하고 그 주변을 끊임없이 맴돌면서 이권을 챙기려는 태도는 지금 이 순간에도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한국교회는 그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권력의 주변을 맴돌면서 온갖 혜택을 누려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로 인해 교회는 특혜 속에서 양적인 팽창을 이뤘지만, 교회를 그 본질로부터 멀어지게 함으로써, 교회의 병폐 현상을 양산하는 주요한 원인이 됐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권력의 주변에서 행해온 잘못된 행위를 반성하고 정치권력에 대한 비판적 거리를 유지해 나가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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