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통치하는 세상

국가는 이념적으로 정부와 구별된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정부는 국가라는 권위를 업고 사람을 다스린다. 그 점에서는 “정부는 국가”, “짐이 국가”라고 한 제왕국가와는 다른 말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가 국가를 대표한다. 국가라는 이름을 독점, 국민 앞에 나선다. 국가는 사회계약에 의해 형성되었다.

성서는 왕권과 국가의 폐해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지도층은 사무엘에게 “우리도 다른 모든 나라처럼” 왕을 세워 달라고 한다.(사무엘상 8장) 사무엘은 이스라엘 지배층의 왕권수립 요구를 반대했다. 그것은 이스라엘 지배층이 하나님의 주권을 배신하는 것으로 보았다. 강요에 못 이겨 왕권을 승인하면서 단호한 경고를 내렸다.

“가로되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가 이러 하니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취하여 그 병거와 말을 어거케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그가 또 너희 아들들로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삼을 것이며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병기와 병거의 제구를 만들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너희 딸들을 취하여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를 삼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의 제일 좋은 것을 취하여 자기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취하여 자기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취하여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너희 양떼의 십분 일을 취하리니 너희가 그 종이 될 것이라 그 날에 너희가 너희 택한 왕을 인하여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지 아니하실 것이다”(사무엘 상 8장 11-18절)

사무엘은 이스라엘 지도층이 왕을 세우려는 것을, 다른 신을 섬기려는 동기로 보았다. 또한 군국주의가 발달할 것으로 보았다. 또 민중을 노예화 할 것을 염려했다. 그리고 재산을 착취하고, 국가라는 이름 아래 민중을 비인간화 할 것을 예견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될 것을 경고하면서도, 왕을 세우기를 원하는 저들의 소원을 들어주라고 한다. 당시 왕권을 주창한 사람들은 권력에 들어서서 지배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 그러한 가망이 있는 계층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비천한 자들은 왕권을 거부했을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을 반대하는 큰 주류가 있었다. 사사의 한사람인 기드온은 부족을 지휘해서 적을 물리쳤을 때,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에 기드온은 “내가 그대들을 다스릴 것도 아니요. 내 자손이 그대들을 다스릴 것도 아닙니다. 그대들을 다스릴 분은 하나님입니다”(판관기 8장 23절)하고 거절했다.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은 12지파에 연유한 부족동맹이었다. 그들은 국가 이전에 사사들에 의해 결속되었다. 사사는 재판을 주관하는 원시부족의 추장과 같은 위치에 있었다. 이 부족동맹은 계약했다. 그 계약법은 공동의 하나님을 숭배하고, 복종하는 것을 중추로 하고 있으며, 사사는 그것에 의해 권위를 가지며, 그 권위로 통치할 수 있었다. 사사는 전쟁이 일어나면 선두에 서서 전장을 이끌었고, 그 때 사무엘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상에서 살펴 본대로 전제군주는 철저하게 가난한 민중들을 노예로 삼고, 이용했다. 이것을 알았기 때문에 사무엘은 왕권국가에 대해서 경고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인 사울은 불레셋군을 물리치는 한 전선의 사령관에 불과했다. 그의 통치영역은 애매모호했다. 사울은 다윗이라는 사람을 중심으로 한 반란자들에 의한 내환과 외환에 시달리다가 아들들의 모반에 의해 등극 2년 만에 끝났다.

 
제왕국가를 형성한 다윗

사울에 대한 기록은 다윗의 측면에서 서술되었다. 우리나라의 왕조사가 왕의 측근에 의해서 기록되었듯이, 다윗 왕조도 다윗에 의해 비화되었다. 그를 최후에 지배하던 신은 악령으로 다윗에 대한 질투의 화신처럼 그려진 것이 그 점을 노출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집권자의 유혹의 단명이다.

분명 제왕국가를 형성한 것은 다윗이다. 그가 세웠던 국가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강대한 나라였다. 나라 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언제나 동경의 대상이었고, 메시아사상의 골격을 이 왕국이 제공해 주었다. 그러나 다윗왕국의 형성사를 보면, 국가의 본질이 잘 나타나 있다.

다윗의 전왕 사울은 고용병과 징병제도를 병행했다. 다윗이 상비군에 지원함으로써 군인으로서의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다윗에 대한 사울의 질투는 다윗이 이미 자기세력을 구축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그의 추종자들은 그의 혈족과 무법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박해받는 사람들과 채권자들에게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었다. 즉 피압박 민중이었다. 다윗이 이들에게 기대를 걸었다는 것은, 사울왕국의 이면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는데 이의가 없다.

성경에 나오는 다윗은 자신의 야욕을 채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요즘 말로 말로 말하면 지략에 뛰어난 사람이었다. 다윗은 재력을 얻기 위해 나발의 부인인 아비가일과 전략적으로 결혼했고, 그의 재산을 차지했다. 그리고 그의 영역을 넓히는데 이용했으며, 유대지방과 인연을 맺으려고 했다. 그는 또 지략으로 시글라이라는 영지를 얻었다. 여기를 거점으로 다윗을 영토를 넓혀갔다.

고향에 돌아온 다윗은 사울과 그의 아들들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헤브론을 중심으로 하여 7년 반을 이스라엘 남부인 유대지방을 통치했다. 그 동안 다윗은 북 이스라엘을 통합할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 일에는 사울의 남은 아들들과 유족을 없애는 일도 포함된다. 그는 또 남과 북 중간에 있었다. 두 종족에 속하지 않았던 예루살렘을 강점하고, 그곳에 법궤를 안치함으로써 종교의 중심으로 삼았다. 그곳은 다윗 개인의 소유였기 때문에 ‘다윗성’이라고 불렀다. 다윗의 죄악은 여기에서 멈추지를 않았다. 장군 우리아의 아내가 탐나서 우리아를 전선에 보내 죽게 하고, 그 여인을 아내로 받아들였다. 성서는 다윗이 이 일을 두고 참회하는 것처럼 그려 상쇄시키려 했다. 예언자 나다니엘은 다윗의 생활 이면을 폭로했다.

“그는(다윗) 큰 부자로서 수많은 양과 소를 소유했으면서 품삯으로 얻어서 새끼처럼 애지중지하는 가난한 자의 한 마리밖에 없는 양을 약탈한 자며, 전왕의 말과 아내를 빼앗아 제것으로 했고, 어떤 여자나 제 마음대로 할 수 있었는데, 이제 자기 부하를 적군의 칼에 맞아 죽게 하고 그 아내를 취했다”(사무엘하 12장1절 이하)

다윗은 민중의 희망을 이용하고 배신했다. 그리고 결혼하지 않은 젊은이들을 징발하여 사병화 했다. 결국 다윗은 집권과 더불어 가난한 사람들, 즉 땅의 사람들의 적이 되었으며, 수많은 자식들 중 하나인 압살놈이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많은 민중들이 반란에 참여했다. 다윗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솔로몬도 이복형 아도니아를 강제로 귀향시키고 자객을 보내 살해했다. 또 제사장 아비아달을 추방했고, 요합장군을 살해했다. 부왕의 신하인 시므니를 처형했다. 이는 에돔이 떨어져 나갔고, 다메섹 도성이 떨어져 나갔다. 결국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지 못한 다윗왕조는 분열에 분열을 거듭했다.

민심을 배반한 권력의 최후

오늘 대한민국은 민심을 배반한 권력 때문에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고 있다. 다윗 왕조가 민을 배신해 분열되는 아픔을 겪었다. 다윗의 뒤를 이은 솔로몬은 부왕의 유업으로 최대의 향락을 누렸다. 솔로몬이 모든 정력을 집중한 것은, 예루살렘 성전건축과 자신의 왕궁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솔로몬은 성난 민심을 달래기 위해서 다윗이 장만해 놓은 지대 위에 성전을 세웠다. 열왕기상 3장에서 11장까지는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 건물의 화려함과 웅장함은 새삼 말 할 필요가 없다. 이를 건축하기 위해 민중의 고형을 얼마나 강요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방인들의 노예를 동원해 건축한 것처럼 미화되었으나, 그것은 믿을 수 없다. 그들을 강제하기 위해서 군대를 동원했다. 또 이집트 공주와 정책적으로 결혼하고, 그와 향락을 즐기기 위해 궁궐을 건축했다. 한마디로 왕이 나라와 국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유대사가들은 솔로몬을 지혜의 왕으로 평가했다.

일반 유대사가들이 눈이 먼 것은 그가 세운 호화로운 성전이다. 그럼에도 그의 업적을 냉엄하게 비판하는 눈은 있었다. 그의 왕궁은 성전과 비교해서 기록했다. 왕궁의 화려함과 웅장함은 성전에 비교도 안된다고 비판했다. 이것은 솔로몬이 향락에 얼마나 집중했는가를 가름하게 해 준다. 솔로몬의 악행은 여기에서 끝나지를 않았다.

그는 수교했거나, 점령한 모든 족속의 여인들을 후궁으로 불러들여서 그들이 끌고 오는 제신들을 함께 들여왔다. 마침내 솔로몬이 제신에 빠져 버렸다. 즉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과 맺은 계약을 철저하게 외면한 것이다.

성서의 편집자는 외국여인과의 결혼을 일체 금한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그것을 거역한 솔로몬의 죄상을 비판했다. 솔로몬의 후궁은 700명이었으며, 몸종이 3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성서기자는 솔로몬이 다윗만큼,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하며, 하나님은 마침내 분노했다는 기록이다.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마음으로부터 저버려, 결국 다윗이 세운 왕국은 남북조가 자식들의 모방으로 갈라졌을 뿐만 아니라, 다 빼앗기고 예루살렘 지방만 남게 되었다. 그 책임이 솔로몬의 죄악에서 연유했다는 신학적 심판을 신학자들이 내린다.

다윗이 세운 왕국은 분열된 채 백성들을 전쟁 속으로 몰아넣었다. 평화의 때는 거의 없었다. 기원전 721년 북이스라엘은 마침내 멸망하고, 남유대왕국은 기원전 586년에 망한다. 예언자들은 민중의 편에서 줄곧 왕후장상들을 비판했다. 그러므로 그들의 회개를 촉구했다. 그러나 나라는 망하고, 정신사만 남게 됐다.

한때 하스몬가는 수권자에 앉았으나, 민중이 흘린 피를 잊고, 홀로 공로자로서 군림했다. 부패는 극에 달했으며, 결국 자기내의 분열로 인해 나라는 또 망해 버렸다. 예언자들의 예언의 소리를 듣지 못한 이스라엘은 나라 없이 1천여년을 유리방황하는 선세가 되었다.

왕권의 폐해가 얼마만큼 큰지에 대해 성서를 통해 교훈하고 있다. 민을 배반한 권력, 민을 떠난 정부는 결코 오래가지를 못한다. 오늘 대한민국의 상황도 권력자들이 민심을 잃어버린데서 발생한 결과이다. 그럼에도 기독교 목사를 비롯한 일부 종교인들은, 국민간의 갈등을 부추기며, 권력을 향해 아우성치는 국민들을 향해 ‘빨갱이’, ‘좌경’, ‘용공’이라고 매도하며, 통치자에게 ‘계엄령’을 선포하라고 촉구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피조물인 생명의 가치와 존엄성을 상실한 결과이다. 민족을 떠난 교회, 민심을 떠난 권력은, 평화로운 나라를 만들 수 없다. 교회성장도 기대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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