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권력은 종교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라고 촉구한다. 여기에는 많은 것이 함축되어 있다. 부정부패에 대해서도 침묵하고, 가치관에도 침묵하라고 한다. 가난한 자나, 눌린 자의 친구도 되지 말라고 한다. 교회건물 안에서 기도나, 찬송으로 자신의 위안만 하라고 한다. 그리고 정부나, 권력이 추진하는 일에 대해서 무조건적으로 동조하라고 한다. 오늘 한국교회가 이를 철저히 수행하고 있다는데 씁쓸하다.

이 같은 정부나, 권력의 요구는 당연하다. 한국의 종교들이 그렇게 길들여져 왔기 때문이다. 불교를 비롯한 개신교 등은 권력과 결탁하면서, 타락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역사적인 교훈이다. 종교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지를 못했다. 오히려 권력과 가진 자들의 눈물을 닦아주기에 바빴다.

최태민-최순실 국정농단에서 한국교회가 침묵하며, 이들의 전위대로서 목회자들이 성직자 가운과 후드를 착용하고, 국정논단의 당사자인 권력을 향해 계엄령을 선포하라고 촉구하는 이유도, 한국개신교가 권력과 밀착되어 있다는 것을 반증하고도 남는다. 한국개신교가 추진한 정치세력화의 길이 좌절된 이유도, 정부가 요구하는 종교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라는 촉구와 일본식민지세력을 정당화 해 주기 위해서 선교사들이 주창한 ‘정교분리원칙’을 철저하게 지켰기 때문이다.

이 같은 현실 앞에서 국가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입장을 밝히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대한민국과 한민족을 위해, 그리고 정부의 오해를 시정하는 촉구적인 의미에서도 절실하다.

그리스도교의 국가관

안병무 교수는 자신의 저서 <역사 앞에 민중과 더불어>(1986년 8월, 한길사)에서 그리스도교의 국가관에 대해서 4가지로 명쾌하게 답했다.

먼저 그리스도교는 인권이 국가에 우선한다. 인간은 국가 이전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고, 지음 받았다. 그 인권이 하나님께 직속되었다고 믿는다. 국가는 이 같은 삶과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공동체로서 일반적 자연법에 근거한 공동체라고 본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준 질서라고 믿는다. 국가는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있다. 인권이 국가를 위해 있지 않다.

다음은 국가가 보전의 질서이지, 창조의 질서는 아니다. 국가는 하나님이 준 것을 보존하는 질서이지, 그 자체의 목적에 따라 있는 것을 파괴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할 권한이 없다. 혹자는 국가가 법을 만들 수 있는 권한이 있지 않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실은 국가가 법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질서를 명문화하여 그것을 구현할 따름이다. 만일 국가가 어떤 권력으로 그 자체의 특정한 목적을 위해 법을 마음대로 제정할 수 있다는 사고나, 행위는 오히려 반국가적 범죄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의 뜻’에 역행하는 것이 된다. 국가는 어떤 진리를 창조할 수 없다. 오직 주어진 진리에 근거한 가치체제를 수호할 의무만 남아 있다.

또한 그리스도교가 지향하는 궁극적 공동체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 나라와의 관계에서 국가는 상대적이며, 감정적인 공동체이다. 따라서 국가는 인간의 궁극적인 삶을 보장할 수 없다. 궁극적 구원을 약속할 수 없다. 그리스도교는 국가지상주의를 반대한다.

마지막으로 국가와 정부는 엄격히 구별된다. 보존의 절차로서의 국가의 기능을 위하여 권력이 주어졌다. 그리스도교 권력의 근원은 오직 하나님에게 속한 것으로 믿는다. 하나님은 국가에 권력을 주어 질서의 보전을 수행하게 한다. 정부는 국가의 권력에 의해서 주어진 법을 집행하는 기관일 따름이다. 왕권이 곧 국가권력인 시대에는 왕이 주권자일 수는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국민이 주권자이다. 그리스도교는 민주주의 국가체제가 현재까지 나타난 체제 중 가장 옳은 것으로 본다. 까닭은 하나님께 직속된 민이 국가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그 인권이 가장 적게 침해받는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국가는 보존의 질서, 창조의 질서 아니다

이상은 그리스도교 국가관의 테두리이다. 이 같은 국가관이 민주사회에서 국가권력과 충돌할 이유가 없다. 충돌 할 때는 집행기관인 정부가 국가와 자체를 동일시하고, 정부의 힘을 국가 전체 삶의 전역에 확대하여 공복의 자리에서, 다스리는 주인의 자리로 옮겨올 경우이다. 역사상 그 같은 충돌은 계속되었다. 우리는 그 같은 시련 속에서 성숙해 왔다.
정권과 종교적 충돌은 정권이 권력을 남용했을 때 생겼다. 어떤 민족사나 처음에는 국가적 통치권과 종교가 한배를 타고, 공존했다. 이 같은 형태를 지속하려고 애쓴 것은 그리스, 고대 로마, 이집트, 그리고 중국이며, 한국도 그랬다. 이러한 체제에서는 국가의 장이 동시에 종교의 장이었다. 이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으며, 한국교회 역시 권력과 결탁해서 교회를 성장시켰다. 결과적으로 한국개신교는 예수님이 벌인 역사의 현장인 가난하고, 소외되고, 떠돌이, 노동자, 농민, 병신, 노숙자 등 천박하고 보잘 것 없는 그 곳을 버리고, 부자들의 눈물을 닦아주며, 호화로운 교회당에 예수 그리스도를 가두어 버렸다. 성전 하나님, 성전 예수님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오늘도 한국교회의 일부 목회자들이 성직자 가운과 후드를 착용하고, 거리로 나와 권력자들의 눈물을 닦아주며, 세월호 참사로 바다 속에 수장된 생명들을 향해 천박한 목소리를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다. 그러면서 이들의 영혼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목회자와 교인들을 향해 ‘정교분리’를 외친다. 이들과 천박한 목소리를 거침없이 쏟아내는 목회자 중 누가 더 정치적인가(?) 교인들과 국민들은 묻고 있다.

이같이 한국개신교 목회자들의 몰인정한 목소리는 오늘 종교의 인정공동체가 없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리고 생명의 가치와 존엄성을 상실한 결과이며, 인권이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직속되어 있다는 진리를 잃어버린 결과이다. 때문에 목회자들은 잘못된 정치와 권력을 비호하는데 서슴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지신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고, 그 믿음을 통해 구원의 확신을 얻어야 한다. 하지만 한국개신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지기를 거부하며, 잘못된 정권과 잘못된 정부를 무조건적으로 비호한다. 이런 교회에 누가 희망을 걸겠는가.

국가가 권력 구조화되고, 점차적으로 탈종교화되고, 비 논리화 될 때, 비로써 종교는 개개인의 인권을 옹호하고 그 구원을 지키려는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그것은 국가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서의 공존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종교는 국가권력에 예속되었거나, 아니면 권력에서 밀려 났다. 결국 권력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만 종교의 임무를 수행하겠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권력의 범위서 종교의 임무 수행

공자는 ‘부재기위 불모기정’이라는 입장을 취했다. 정교분리를 내세워 권력영역에는 일체 간섭하지 않으며, 그것과 충돌하지 않는 신비주의적 태도를 보였다. 이것은 구약성서의 제정분리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리스도교는 정부라는 기관이 정립될 때부터 제정분리의 원칙을 세워, 그것을 그대로 계승한 구약의 위에 섰다. 분명한 것은 이 원칙은 권력의 횡포를 제동하기 위한 것이었다. 권력의 어떤 위험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왕을 세워 달라고 요구했을 때, 이를 거절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구약성서에서는 권력이 지닌 위험성을 잘 대변하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이 사무엘에게 왕을 세워달라고 호소한 것에 대해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다.

“사무엘이 이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내게 한 말을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이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라”

왕을 세운 결과는 사무엘상 8장은 정권수립에 대한 원초적인 회의와 경계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지배를 떠나매, 권력이 비대해져 민을 그 종으로 혹사할 위험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허락했다는 것은 필요악이라는 뜻이다.

“아들은 왕을 위한 군대에 징용당할 것이며, 딸들은 왕의 시녀로 고용되고, 민의 밭과 포도원과 감람나무의 제일 좋은 것을 빼앗아 왕과 신하들의 것으로 만들게 되리라”

구약에서는 권력의 한계를 그어줌으로써 제동하기 위한 제정분리체제로 일관했다. 왕이 있기 전에 신의 법이 있다. 신의 법의 열쇠는 왕이 아닌 제사장이 장악했고, 왕은 종교에 의해서 밝혀진 신의 뜻을 집행하는 것으로 제한했다. 왕권이 남용되면 이를 비판과 심판을 한 이들은 예언자들이었다.

예수님의 죄명은 ‘유대인의 왕’

예수님은 로마의 처형틀인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했다. 예수님께서 반로마정치운동을 했다는 주장에는, 십자가에 처형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 근거인 십자가는 로마의 처형틀이었다. 로마 국내에서는 반역한 노예들, 식민지에서는 반로마정치법들을 처형한 형틀이 바로 십자가였다. 예수님의 죄명은 ‘유대의 왕’이었다. 이렇게 명명한 것은 이를 입증한다. 이 사실에 대해서 반론을 펴는 사람은 없다.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마가복음 13장 17절)이란 성경구절을 인용, 정교분리의 원칙이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 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 예수가 점령세력인 로마에 무조건 복종하자고 한 뜻으로 받아드릴 수 없다. 이것은 납세와 관련된 질문의 대답으로 로마의 화폐를 보이면서 한 대답 이었다. 그 돈에는 가이사 디벨리우스의 상이 그려져 있고 ‘숭배해야 할 신의 아들 가이사 디벨리우스“라고 씌어져 있다. 한마디로 가이사 디벨리우스가 신의 아들임을 시인한 것이다. 그래서 세금을 달라면, 주라는 뜻 이상으로 확대할 수 없다. 로마정부는 유대인 정부와 야합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왜 예수님을 따르려거든 십자가를 질 각오를 해야 한다고 했는가. 교회마다 내걸린 십자가탑은 요즘 흔히 쓰듯이 단순히 고생할 생각하라는 뜻이 아니다. 권력에 의해 박해받아 죽을 각오를 하라는 것이다. 원뜻대로 하면 로마정권에 의해 정치범으로 죽을 각오를 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권력투쟁을 하라는 뜻이 아니다. 권력에 수난당할 각오를 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권력횡포에 예민했던 흔적이다. 예수님이 바로 그렇게 처형되다.

마가복음 13장 종말 시에 “너희들은 스스로 조심하라 너희가 법정에 넘어가게 되고 회당에서 매를 맞겠고 또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호출을 당할 터인데…”라는 예언이 있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 십자가를 정치적 집단을 위해서 이용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최태민-최순실 국정농단에 항의하는 촛불집회에 대한 맞불집회에 이용되고 있다. 이렇게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잘못된 권력을 비호하는데 이용되고 있다. 한국개신교는 십자가에 담긴 뜻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분명한 것은 한국교회가 불의한 사회, 잘못된 권력, 부자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교회를 향해 예언자의 사명을 충실히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한국교회가 잃어버린 생명의 가치와 존엄성, 교회의 본질과 가치관을 회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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