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한국교회가 중심이 되었던 3.1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98주년을 맞는 해이다. 100주년을 2년 앞두고, 역사학계와 한국교회서 대대적인 기념사업을 비롯한 역사적 재평가를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3.1만세운동은 일본제국주의의 방해와 탄압, 그리고 영미선교사들의 침묵 속에서 일어난 민족운동이며, 독립운동이라는데 의의가 크다. 본지는 3.1만세운동 98주년을 맞아 당시의 기독교지도자들의 형태와 선교사들의 형태, 만세운동의 중심에서 고난당한 교회의 기층민중들을 새롭게 조명, 굴절된 기독교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으로 특별기획을 금년도에도 준비했다. 본지는 4회에 걸쳐 용기 없는 기독교지도자들의 모습, 선교사들의 친일적인 행각 속에서도 싹튼 기독교의 독립운동, 만세운동의 중심에서 ‘죽임’을 당한 기층민중, 한민족의 선천적인 애국애 등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를 통해,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데 조금이나마 기여할 것으로 여겨진다.

한국선교, 봉건사회 극복의 결정적 계기

기독교 선교는 민족주의운동을 초월하는 하나님나라의 구원을 주제로 삼는다. 서양기독교 선교는 19세기의 자본주의와 신민주의 그리고 세계팽창의 대세에 따라 한국에 들어와 가난하고, 천박한 피압박 민족에게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크게 기여했다. 반면 선교사들은 알게 모르게 서양의 팽창주의와 일본의 식민지세력에 협조한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19세기의 서양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문화를 대변하기도 했다. 또 여기에 배경을 두고 성장했다. 한국개신교는 서양의 기독교 선교에 있어 일본의 식민지세력과 서양의 팽창주의를 정당화 해 주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것과는 반대로 일부에서는 민족교회에 대한 움직임도 있었지만, 그것은 식민지 세력과 정교분리를 주창한 선교사들에 의해서 좌절되고 말았다.

한국교회 사가 및 지식인들은 기독교의 전래가 대체로 봉건사회 극복과 근대화, 그리고 남녀평등사상의 변화, 교육의 변화에 결정적 계기를 가져다가 주었다고 평가한다. 당시 개화사상은 서양의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사조였으며, 가난한 한민족에게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러나 이것은 서양 침략세력의 이데올로기적 수단이었다는 사실과 이에 결부되어 전래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간파하지 못했다. 한마디로 기독교의 한국선교는 민족의 자주적인 봉건체제의 극복과 근대화의 잠재력을 꺾어버린 침략세력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는데 이의가 없다.

이에 대한 비판 없이 보수적인 한국교회는, 서양의 자본주의와 식민주의의 이데올로기적인 신앙과 신학이 최고인 것처럼 포장하는데 경쟁을 벌였다. 이 같은 사실은 1944년도에 출간된 헤밀턴의 저서 <개화기의 한미관계>에 잘 나타나 있다. 이광린이 번역한 이 책은 “하나님, 황금, 일본인”이라고 번역되었어야 했다. 이 책은 조선이 알렌박사의 활동무대로서, 식민주의적 관심을 그대로 적시하고 있다.

이 책은 개화파와 일본이라는 두 세력의 사이에서 영미선교사들의 활동이 유리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 두 세력은 선교가 개화운동에 힘이 될 것이라는 점과 서양문화를 접하게 되리라는 점에서 일치했다. 서양문화와 미국에 의해서 신흥세력으로 등장한 일본은 한국을 일본에 귀속시킬 수 있다고 계산했다.

당시 개화파나, 동학파의 힘으로 일본의 침략세력을 막는다는 것은 역부족했다. 오히려 개화의 정신적 지주로 삼았다. 그리고 한국개신교는 일본침략세력을 등에 업고, 성공적으로 ‘싸구려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기독교 선교가 침략세력의 힘을 빌려 순탄하게 진행됐다고 할 수 있다.

당시 한국기독교의 지도자들은 서양의 세계팽창주의의 이데올로기적 불의를 통찰할 능력이 없었다. 오히려 이것을 관념론적, 추상적으로 하나님나라와 일치시키는 잘못을 범했다. 그럼에도 한국기독교가 민족의 수난 속에서도, 반석 위에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은 곳곳에서 기독교적인 민족의식이 싹텄기 때문이다. 또한 선천적인 민족애가 가슴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성공회 선교사였던 휴 밀러는 “결국 나라가 심란하면, 선교사업에 도움이 된다. 좋은 정부 하에서는 서양의 학문이나, 과학이 회의론과 불가지론 등을 수반하게 된다”(윤치호 일기 1901년 6월 25일자 중)고 했다.
휴 밀러가 말하는 학문과 과학은 바로 서양의 지배수단이었다. 동시에 기독교 선교의 수단이었다. 이것이 오늘 정통 보수주의자들의 신학이 되었으며, 한국교회는 이 사상과 틀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결국 이는 한민족의 문화와 역사를 몰각하는 결과를 가져다가 주었으며, 추상적이고 감상적인 하나님나라를 외치게 했다.

이익을 챙기기 바빴던 선교사들

헤밀톤은 선교사들이 미국 문명을 가르치고 나서, 기독교가 바로 서양문명의 기본이라는 것을 성급하게 보여주려고 노력했다고 지적했다. 당시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양품시장을 열었고, 서양 상품선전에 열을 올렸다. 시장에 서양 상품을 공급했다. 또 과수원도 경영했다. 하숙과 여관을 경영하기도 했고, 미국수출업자들에게 정보를 제공, 시장개척을 알선해 줌으로서 이득을 철저하게 챙겼다. 여기에는 자비량선교라는 것이 철저하게 적용됐다.

언더우드는 석유, 석탄, 농기 등을 수입했다. 알렌의 선교직원이었던 그레함 리와 모펫 등은 압록강변 채벌권을 얻어내 약 3천 그루를 벌목했다. 여기에다 그레함 리는 한국정부가 세금을 부과하자, 이것이 불법이라며 생떼를 쓰기도 했다. 1884년에 들어온 알렌의 상업행위는 그 어느 선교사들보다도 두드러졌다. 알렌은 황실을 등에 업고, 최초의 전차노선, 최초의 도시발전소, 상수도, 전화시설, 현대식 관청건물 등의 산업권을 얻어 미국의 사업가들에게 중개했다. 그는 “한국내의 중요한 모든 재정사업이 우리들의 것”이라고 자랑까지 하며 다녔다. 이 말속에는 피압박민족, 가난한 민족의 설움이 그대로 배어 있다.

그의 상업행위는 여기에서 멈추지를 않고, 아시아에서 가장 풍부한 운산지역의 금광 채굴권을 얻어냈으며, 이것은 미국의 독점권이 되었다. 여기에서 알렌은 큰 이득을 챙겼으며, 나중에 금광을 어마어마한 돈을 받고 일본에 팔아 넘겼다.

알렌은 미국국무부차관에게 보낸 전문에서 “한국인들을 인디언과 같이, 흑인들보다는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비하했다. 한국은 알렌의 말대로 제국주의자들의 활동무대였다. 알렌의 이러한 형태는 일반 서양 사람들의 의식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러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는 한국 식민지화의 결정적인 시기였다. 일본의 승리는 서양 제국주의, 식민주의와의 결탁의 결과였다. 특히 미국의 배경에서 결탁되어 얻어진 것이었다. 일본의 한국지배는 미국의 묵인 하에 이루어졌으며, 을사보호조약과 함께 미국은 한국과의 수교를 단절해 버렸다. 그리고 일방적으로 미 공관을 철수했다.

분명한 것은 선교사들의 잘못된 형태와 굴절된 역사에 대해 한국교회가 짚고 넘어가야 함은 물론, 다시는 이와 같은 일들이 되풀이되어서는 안되는 의미에서도, 한국기독교의 역사적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그럼에도 한국개신교는 서양의 거대문화와 자본주의 문화, 그리고 다윗문화에 매몰된 나머지 호화로운 교회당을 건축하고,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다.

정교분리로 민족의식 봉쇄

일본의 한국침략과 지배가 노골화되면서, 선교사들은 앞장서서 정교분리정책을 제창했다. 정교분리정책이 선교사들에 의해서 먼저 주창되었다는데 한국교회는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영미선교사들이 국제적 불의에 대한 책임을 모면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비난받기에 충분하다. 결국 영미선교사들은 일본의 불의에 협력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이토의 식민정책과 맞아 떨어져 일본의 한국지배를 용이하게 해 주었다. 장로교공의회 선교사들은 교회와 국가의 상호불간섭이라는 취지문을 전국교회에 배포하기도 했다. 이것은 결국 기독교인들의 독립운동과 의식화의 길을 봉쇄하는 결과를 불러 일으켰고, 지식인과 독립운동가들이 교회를 떠나는 빌미를 제공했다.

대신 선교사들은 추상적이고, 감상적이며, 영적인 구원과 복음화운동에 모든 힘을 결집했다. 또한 정교분리정책에 입각해 국민들의 영적 구원과 도덕적인 계몽, 그리고 가난하고 미개한 백성들을 향한 사회사업 등의 선교사업을 펼쳤다. 한마디로 정교분리정책은 복음의 영적진리 아래 일본의 식민지독점권을 허용하고, 한국개신교의 치명적인 반민족적 요인이 되게 했다. 그리고 한민족의 문화와 역사는 한민족에게 있어 몰각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분명한 것은 기독교 독립운동의 중심에서, 기독교지도자와 선교사들을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감리교의 존즈와 스크랜톤은 정치적인 사건을 떠나 도덕적 및 영적인 고양에 힘쓰겠다는 것을 행동지침으로 삼았다. 일본을 제2고향으로 삼은 헤리스 감독을 비롯해 게일, 아펜젤러, 스미드, 브로크멘 등도 역시 일본 식민지지배세력에 적극 협력하며, 조선의 백성을 우매한 민족으로 몰아붙였다. 그리고 선교사들은 원산과 평양 등지에서 심령대부흥운동을 벌였다. 한마디로 한국개신교가 민족의 아픔을 몰각하고,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터부시 하며, 영혼구원에만 매진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선교사들의 이 같은 반민족적인 선교활동은 오늘 현장에서 하나님나라 선교를 감당하는 목회자들에게 그대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오늘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고난당하는 이웃을 외면한 채, 영혼 구원이라는 이름 아래 강단에서는 자본주의 산물인 돈!돈!돈!을 외치게 만들었고, 민족의식을 이단시 하는 결과를 불러일으켰다. 오늘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과거의 굴절된 역사에 대해서 반성하지 않고, 선교사들이 펼쳤던 원산대부흥운동과 평양에서 일어난 회개운동의 재현만을 위해 모든 힘을 결집, 영혼구원을 외치며, 교회성장에 급급해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교분리정책은 오늘 한국교회가 정치적인 불의 앞에 굴복하는 결과는 물론, 권력과 결탁해서 온갖 혜택을 누리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이것은 오늘 기독교의 정치세력화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지난 총선에서 기독교정당들이 국회에 입성하지 못한 이유는, 한마디로 목회자와 교인들에게 정교분리원칙이 뿌리 깊게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해방이후 기독교가 민주화와 인권운동에 침묵하며, 여기에 참여하는 국민들을 향해 ‘빨갱이’, ‘용공’, ‘좌경’으로 매도하며, 국민적 분열을 조장하기도 했다.

조선 백성의 주체성 박탈에 일조

정교분리정책은 선교사들이 철저하게 이용했다. 선교사들의 정신적 문화와 교육사업, 구령사업은 조선백성의 자유와 주체성 박탈에 크게 일조했다. 장로교 선교사들의 순수복음 제창은 일본 식민지세력의 불의를 은폐시키는 구실이 되었다.

일본 식민지세력은 회유책으로 한국기독교를 정책적으로 지원했다. 또한 1910년 한국 기독교 목사들을 일본으로 초청했고, 일본 조합교회의 한국진출의 문을 열어주었다. 한국기독교는 식민지세력과 한민족의 갈등을 정교분리정책으로 무마시키고, 지배세력의 이데올로기로 전락했다.

그렇다고 영미선교사 전체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이런 와중에서도 고난당하는 한민족의 아픔을 세계에 알리고,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주의 죄악을 알리기 위해서 노력한 선교사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미국을 비롯한 서양의 국가들이 일본과 마찬가지로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길을 걸었기 때문에 허사였다.

헐버트 선교사는 “백성들과 관련된 것들이 정치적이다”고 역설했다. 그리고 본토로 건너가 일본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죄악을 알리려고 했다. 그는 악의에 찬 외세에 의해서 고난당하는 한민족과 정당한 평가를 제대로 받아보지를 못한 국가를 변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런 가운데서도 한국교회의 일부 목사와 가난한 교인들은 조선의 독립과 외세를 몰아내기 위해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현장에서 행동했다. 한마디로 한국교회의 독립운동은 가난한 기독여성과 가난한 기독농민, 기독학생들에 의해서 자각되었다. 또한 당시 최고의 조직을 가진 교회는 독립운동을 벌이기 위해 민족주의자들과 지식인들이 몰려왔다. 기독교의 민족운동은 선교사들의 정교분리정책에도 불구하고, 민족의식을 자각한 이들에 의해서 계속 진행됐다. 이것은 또한 한국개신교의 가난한 교인들이 민족을 살리는 일에 앞장섰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것은 3.1만세운동에서 그대로 엿볼 수 있다.

1년 동안 계속된 3.1만세운동은 분명 기독교운동이었다. 그러나 운동의 주체는 33인이 아니다. 길삼해서 남편과 자식들에게 옷을 입혔던 무명옷고름 입에 물고, 검은치마 휘날린 민족의 어머니인 ‘기독여성’과 밭을 갈아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던 ‘기독농민’, 민족의 미래 지도자인 ‘기독학생’이 주체세력이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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