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만세운동은 비폭력 저항운동이다. 평화운동이며, 민족운동이라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 또한 3.1만세운동은 새로운 나라, 새로운 세상을 실현하기 위해 투쟁한 한민족의 역사 속에서 매우 중요하의다. 오늘 3.1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는 여러 가지 행사를 대대적으로 준비하고 있다. 각 단체에서 준비한 3.1절 행사는 새로운 나라를 실현하
올해는 2.8독립선언, 3.1만세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매우 뜻 깊은 해이다. 3.1만세운동은 한민족의 독립운동이며, 비폭력평화운동이다. 교회마다 단체마다 3.1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아 여러 가지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한국교회가 3.1만세운동 기념행사에 앞서 먼저 청산해야 할 일이 있다. 무엇보다도 1938년 9월 일
금년도는 종교개혁 502주년을 맞는 해이다. 영미교회들이 몰락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교회가 정치와 경제에 관심을 갖고 교회를 세속화시키면서,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한국교회 역시 권력과 밀착되어 많은 이권을 챙겼으며, 하나님나라의 척도를 ‘헌금의 액수’라고 부르짖으면서 쇄락의 길을 피하지 못하고 있다. 가난하고, 소외되고, 미천하고, 무식하고, 보잘
금년은 일제가 우리 대한민국을 침탈강점하고 불법약탈과 인권을 유린하는 등 강압적인 식민정책에 항거하며 거국적인 3ㆍ1독립운동을 일으킨 지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선열들은 하나님이 주신 자유와 평화와 주권을 찾기 위해 재산과 생명을 대가로 치루며 일제와 싸웠다. 실로 일제 강점기 36년간은 투쟁의 역사였고, 특히 불법적인 일제에 대항해서 많은 크리스
2019년 기해년 새해가 밝았다. 올해는 3.1만세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는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일본의 만행을 용서할 수는 있어도, 참담한 일본식민지세력의 만행은 잊어서는 안된다. 3.1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 여기저기서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그만큼 3.1만세운동이 한민족의 역사 속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길거리에 캐럴이 울려 퍼지고, 형형색색의 불빛들이 흔들리고 있다. 저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고, 성탄의 기쁨을 나누고 있다.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한 성탄절이다. 어두운 세상을 밝히시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찾아오신 예수의 사랑이 온 누리에 퍼지기를 소망한다.오늘 우리의 세
올 겨울은 유난히 한파의 위세가 강하다고 한다. 따뜻한 보금자리에서 마음껏 난방기구를 사용하는 가정이야 문제가 없겠지만, 검은 비닐과 천막으로 덮은 비닐하우스, 쪽방촌, 독거노인, 소년소녀가장, 백사마을 등 소외된 이웃들에게 보일러 온도를 1도라도 높이기란 만만치 않다. 어쩔 수 없이 냉골 속 이불만을 꽁꽁 둘러 추운 겨울을 나고 있다.안타까운 것은 이들의
‘몬스테라’라는 식물이 있다. 이 식물은 기이하게도 잎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마치 벌레가 갉아 먹은 것처럼 전체의 잎에 구멍이 나있다. 하지만 이 구멍은 벌래가 갉아먹은 것이 아니다. 키가 큰 나무가 즐비한 열대우림 속에서 생명과도 같은 빛을 골고루 쬐기 위한 특단의 조치이다. 하나의 잎이 받는 빛의 양은 적을지 몰라도, 구멍이 뚫린 것 때문에 빛은
11월은 결실의 계절이며, 감사의 계절이다. 11월 셋째 주일은 대부분의 교회가 추수감사절로 지킨다. 이날은 분명 ‘축제의 날’이다. 문제는 많은 교회가 추수감사절을 교회의 모자라는 재정을 충당하는 날로 변질시켰다는 것이다. 사실 추수감사절을 ‘축제의 날’이라고 생각하는 교인들도 그리 많지 않다. 한국교회가 미국의 추수감사절에 맞추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
한국교회가 신사참배를 회개하고, 3.1운동 100주년을 기리기 위해 모처럼 한 자리에 모인 날, 하늘도 울었다. 비바람이 매섭게 부는 광화문 사거리, 배교행위나 마찬가지로 한국교회 안에서 암묵적으로 입 밖에 내기도 금기시 됐던 신사참배의 얼룩진 과오를 이제라도 인정하고 회개했다. 그것도 서로 갈라지고 찢어져 아픔을 겪고 있는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각 연합기관
올해는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지 501주년이 되는 해이다. 한국교회는 500년이 되는 해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다양한 행사를 펼쳤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한국교회 안에서 종교개혁의 목소리가 그 어느 해보다도 높았다. 그런데 여러 교단과 단체들이 너도 나도 계획하는 종교개혁의 참다운 정신과 의미를 살리지는 못했다. 구호에 끝나 버렸다.
갈수록 각박한 세상이라는 요즘. ‘우리’보다는 ‘나’를 더욱 챙기는 개인이기주의가 팽배하고, ‘집 마당에는 안 된다(Not In My Back Yard)’는 ‘님비현상’은 이웃사촌이라는 말마저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온데간데없고,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삭막한 사회가 되어버렸다.이런 슬픈 현실 속에서 한
선교는 인간구원을 목적으로 한다. 우리 목회자들이 선교를 하는 목적은 이를 실현하기 위해 세계 곳곳을 다니며, 복음(기쁜소식)을 선포한다. 목회자는 하나님에게 속해 있다. 때문에 목회자는 진실해야 한다. 목회자가 진실해야 한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시간과 장소로 돌아가 성경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목회자들은 자신이 진실하게 살고
원근각처에서 장로교 총회가 한창이다. 연일 지상파와 종편을 넘나들며 뉴스에 보도될 정도로 시끄러운 총회가 있는가 하면, 비교적 적은 관심을 받으며 조용히 내실을 기하는 총회도 있다. 저마다 한 회기의 잘잘못을 돌아보고, 다음 회기에 대한 희망과 소망을 담아 총회를 열고 있다.혹자는 장로교 가을총회를 두고 “올해는 어떤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날까”라며 부정적인
일부 신학자들은 분열과 갈등, 파괴와 무질서를 여기에서 멈추고, 자연과 하나님, 인간과 하나님의 화해를 위한 행진을 벌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교회는 가진 것이 너무 많아 내려놓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교회는 율법과 자신들이 만든 법 위에 군림한다, 하나님을 율법과 성전에 가두고, 마음대로 이용한다. 하나님은 언제부터인가 마술쟁
한반도가 평화의 물결로 일렁이고 있는 가운데, 모처럼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금강산에서 열렸다. 오매불망 기다렸던 이산가족 상봉이기에 맞잡은 두 손을 놓지 않았고, 두 볼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한 핏줄로 태어나 생이별한 세월이 무색하리만큼 2박 3일의 일정은 정말 쏜살같이 지나갔다. 지척에 두고도 만날 수 없었던 세월이 야속하지만, 또 언제 만날지
일본의 압제에서 독립을 맞은 지 73년이 흘렀다. 8.15 광복절 제73주년을 맞아 한반도 전역에서 이를 기념하기 위한 각양각색의 행사들이 줄을 이었다. 저마다 민족의 해방을 외치며,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까지 내바친 순국선열들을 기리기 위해 분주했다. 내년이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해이기에 이번 광복절은 어느 때 보다도 의미가 남달랐다.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정신은 화해와 사랑, 평화의 의미를 담고 있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한민족의 요구인 남북한 민족의 화해와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평화적인 민족통일에 봉사해야 한다. 만약 한국교회가 한민족의 요구인 분단의 현장에서 민족통일의 문제에 관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교회의 사명을 스스로 저버리는 것이다. 또 교회가 분단된 조국의 상황에서 감당해야 할
우리나라가 일제에서 해방된 지 73주년을 맞고 있다. 36년간 일제의 압박에서 고통당하고 나라의 주권을 송두리째 빼앗겼던 때를 기억하고 있기에 일제의 만행을 규탄도 하고, 저들의 잘못에 대해서 사과받기를 원하고 있다.하지만 옹졸한 일본은 진정으로 사과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자신들의 만행을 미화하면서 엄연한 대한민국 땅인 독도를 자기들 땅이라고 계속
필리핀에서 18년간 선교사역에만 매진한 국내 선교사가 억울한 누명으로 구속 수감됐다는 소식에 억장이 무너진다. 도대체 언제까지 우리 국민들이 타국에서 억울하게 피해를 봐야 하는지 되묻고 싶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는 말씀만 쫓아 고향을 떠나 먼 나라에서 힘들게 하나님 말씀을 전했을 선교사를 생각하니 더욱 가슴이 먹먹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