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이기와 바벨을 노래하는 세계의 관심은, 인류의 평화에 있다. 그 중심에 세계교회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평화는 전쟁에 의한 평화(팍스)가 아니라, 예수님의 벌인 평화(샬롬)이다. 그것은 두 가지측면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자기가 가진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이기적인 동기에서 비롯되었다. 또 하나는 정말 인류의 생사에 결정적인 위기를 실감하고, 이것을 사전에 막아보려는 예언자적 전통을 이은 인류 모두가 더불어 사는 지구를 만들자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평화는 핵무기로 대표되는 살인무기 생산과 무기 판매경쟁을 벌이는 것을 막자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특히 남북한이 대치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에서는 매우 심각하다. 북한은 체제유지를 위하여 핵무기를 개발하고, 태평양을 향해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계속해서 발사, 한반도를 비롯한 이웃나라와의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다. 이성을 잃어버린 지 이미 오래되었다. 이것은 한마디로 정상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여기에 맞서 남한 역시 사드 배치를 이미 시작했으며, 미국은 1970년대에 남한에서 이미 사라진 핵무기 재배치 등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남한 자체적으로 핵무기를 개발하자는 여론도 국민들 사이에 거세게 일고 있다. 그것이 바로 북한 김정은의 도발에 대한 답이라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한반도를 둘러싼 군비증강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일본 역시 북한의 핵개발과 미사일 발사에 맞서 군비증강에 들어갔다. 평화헌법을 무시하고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로 헌법을 바꾸었다. 일본 패권주의가 다시 부활했다. 또한 중국은 남한의 사드 배치에 맞서 남한을 향한 경제보복에 들어갔으며, 많은 기업들이 피해를 입고 있다. 한마디로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국들이 ‘평화’라는 이름아래 군비증강을 경쟁적으로 벌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를 비롯한 불교, 천주교 등 종교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게 제기되고 있다. 평화의 종교인 기독교가 먼저 평화를 노래하며, 한민족의 화해와 비핵화를 노래해야 한다는 것이 기독교계의 일반적인 목소리이다. 헌데 오늘 한국교회는 그렇지 못하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성직자 가운과 후드를 착용하고, 십자가를 앞세워 “계엄령을 선포하라”는 한국교회에 무슨 희망을 걸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한반도의 평화는 기대할 수 없다. 본지는 한반도를 넘어 세계평화의 중심에 한국교회가 어떻게 기여할 것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은 한국교회는 지금이라도 한반도의 평화와 한민족의 화해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평화라는 이름으로 군비증강

인간의 역사는 이성적이지 못했다. 비이성이었다. 세계는 원시시대부터 ‘평화’란 이름으로 전쟁을 계속해 왔다. 이런 세계의 흐름을 보면서, 사람의 역사가 시간이 흐르면서 지혜롭게 되리라는 판단과 자체가 오판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해서 2차 대전을 종식시켰다. 이 원자폭탄은 순식간에 10만명을 죽였다. 당시 세계는 다시는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외쳤다.
그 후 70년이 지난 오늘, 세계는 그날을 잊고, 역으로 계속해서 한 번에 수백만명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가공할 무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지금은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백만배 이상의 파괴력을 가진 핵무기를 생산하고 있다. 그것은 1천억이라는 인간을 살상할 능력을 가졌다. 이 지구의 20배를 초토화 할 파괴력을 가진 것이다. 한마디로 세계는 핵무기에 노출되어 있다. 여기에다 원자력 발전소가 세계 곳곳에 세워져 언제, 어디서 사고가 발생해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을지 모르는 걱정스러운 상황이다. 일본 후쿠시마 대지진 당시 원전사고와 체르노빌 원전사고는 인류에게 많은 교훈을 주었다. 세계는 화약고 안에 있으며, 언제 어떤 사고로 인해 수많은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을지 모르는 상황에 처해 있다. 

이성을 잃어버린 한사람이 단추 하나만 누르면 인류 모두가 멸종될 수 있는 위기에 있다는 사실 앞에 인류는 무엇이라고 변명 할까. 오늘도 이러한 핵무기는 계속해서 생산되고 있으며, 발전하고 있다. 무기가 발전하면서, 과거에 생산된 재래무기를 어디에 버려야 할지도 고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무기는 선진공업국들의 가장 중요한 수출품목이 되었다.

살인도구 수출경쟁을 벌이고 있는 셈이다. 이제 정상들의 모임에서 나오던 세계비핵화라는 말까지 쑥 들어가 버렸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누가 이 전쟁의 중심에 있는가(?)를 한번쯤 집고 넘어가야 한다. 무기를 사들이는 국가는 대부분 제3세계 국가이고, 크게 돈을 버는 자는 무기상인들과 그들을 지원하는 제1세계국가들이다. 각 국가들의 무기구입비와 군사비는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또한 하루아침에 인류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비이성적인 사람들이 많아 졌다. 그 중에 하나가 핵개발과 미사일 발사로 한반도를 긴장상태로 몰아넣고 있는 북한의 김정은이다.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도전한 결과로 생태계 위기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통일 중심에 한국교회가 있어야


평화운동,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

세계 여러 국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평화운동은 살아남기 위한 인간의 최소한 몸부림이다. 오늘 세계에서 일어나는 전쟁은 내가 이기고, 네가 지는 것이 아니다. 모두 함께 죽는 것이 다. 때문에 한편에서는 무기경쟁이 오히려 평화를 가져다가 줄 수 있다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세계 민족이 모두 살기 위해서 문제를 무기로 해결하려는 자세를 버려야 한다. 이런 당연한 소리에는 아랑곳 하지를 않고, 강대국들은 무기판매에 혈안이 되어 있다. 제3세계 가난한 국가들은 독제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무기수입에 혈안이 되어 있다.

그것을 팔수 있는 대상이면, 어떤 지원도 서슴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다. 제3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이 독재정권 아래 있고, 그것이 유지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이렇게 실리를 추구하다가는 인류가 멸망될 것은 뻔하다. 많은 나라들이 이를 경험했으며, 경험하고 있다.

새 무기는 계속 개발되고, 낡은 무기는 쌓여가고 있다. 이것을 어떻게 소비하나. 그것은 전쟁을 일으키는 것만큼 확실한 해결방법이 없다. 한번 전쟁에 소비되는 비용은 천문학적인 숫자이다. 고통에 죽고 파괴되는 자는 제3세계인들이다. 6.25전쟁을 겪은 한민족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다음 전쟁은 한반도에서 일어난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역사의 추세를 누가 막고 나설 것인가. 누가 이것을 막을 것인가. 누가 이 죽음에의 행렬에 제동을 걸어야만 할 것 아닌가. 그것은 이 땅의 그리스도인이며, 세계 교회가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그런데 평화를 노래해야 할 교회가 전쟁과 민족적 갈등을 부추기며, 평화를 파괴하고 있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교회는 알아야 한다. 동독과 서독이 하나 되는데 그 중심에 독일교회가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한다.

끝없는 욕망, 생태계 위기로

인류를 파멸로 몰아넣고 있는 것은 신무기의 뿐만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욕심과 욕망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도전한 결과, 생태계가 위기를 맞고 있다. 미래 학자들이 멀지 않아 돌이킬 수 없는 위기가 인류에게 몰아닥칠 것이라고 예언자적인 절규를 했다. 그러나 그 길은 계속해서 그대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같은 경고 역시 기술문명을 독점한 제1세계가 이 예언을 묵살하고, 기술혁명을 거듭 예고하고, 그와 더불어 바다 또는 지구 밖에서 자원을 무한대 발굴하고 있다. 그러면서 생태학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고 있다. 이 장담과는 달리 북극과 남극의 얼음이 30%이상 녹아 내려앉았으며, 이로 인해 지구는 자연재해로 몸살을 앓고 있다.

여기에다 농업과 과학에 사용되는 화학물질이 약 4만여종, 매년 500-1000여종의 새화학물질이 증가되고 있다. 화학물질은 독이며, 핵무기보다도 더 무섭다. 해마다 공해 때문에 매년 네덜란드와 덴마크, 벨기에를 합친 면적의 산림이 파괴되고 있다. 아니 인류에게 먹거리를 제공하는 생명의 땅이 황폐화되어가고 있다.

그런데도 인간의 욕심과 탐욕은 끝을 보이지 않고 있다. 매년 에너지 사용량은 3%이상 증가되고 있으며, 현재 인류는 탄산가스로 몸살을 앓고 있다. 요즘 탄산가스 줄이자는 세계 각국의 모임도 잦다. 그 만큼 탄산가스가 인류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는 말이다. 사실 탄산가스로 인해 지구의 기온은 3도가량 높아졌다. 동식물들이 치명타를 입고 있다. 한마디로 인류의 탐욕이 빚어낸 공업화는 죽음에의 길이다. 한마디로 재앙이 인류에게 다가오고 있다. 결국 멈추지 않는 기계는 지구오염을 부채질 하고, 생명의 땅은 죽음의 땅으로 변해가고 있다.

인류평화 중심에 교회가 있어야

독점하는 자들 때문에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은 계속 죽어가고 있다. 세계 식량생산량 중 50%가 세계 인구 25%도 안되는 선진국이 소비하고 있다. 세계인구의 6%도 안되는 미국이 세계자원의 35%를 사용한다는 보고내용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이른바 선진국의 국민 한사람이 사용하는 에너지는 가난한 나라 국민의 40배가 된다. 스위스 국민 한사람이 아프리카 40인이 사용하는 자원을 쓰고 있는 셈이다. 그 결과로 가난한 나라의 유아 사망률이 부자나라의 수십배가 넘는다. 매년 5천만명이 굶어 죽어가고 있다. 여기에다 공해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도, 갈수록 줄어들고 있으며, 1억5천만명이 영양실조로 시달리고 있다.

또한 컴퓨터의 발달과 로봇의 산업현장 투입은 많은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쫓겨나는 결과를 가져다가 주었다. 이는 인간사이의 관계를 파괴하고, 문명의 기계가 사람사이를 가로막아 함께 사는 길을 막았다. 사람은 더불어 사는 존재이다. 이것이 기계와 다르다. 사람은 삶과 죽음을 함께 나눌 수 있어서 사람이다. 여기에 삶의 의미가 있다. 또 윤리도, 종교도, 애원도, 기도도 있다. 그런데 사람이 동고동락을 해서 이루어야 할 것이, 테크놀로지 사회로 이양되면서, 기계적으로 처리되고 있다. 함께 웃고, 슬퍼해야 할 사랑사이의 정을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최근 테크놀로지에서 해방되기 위해 ‘편리’란 것을 추방하고, 일시적이지만 서로 고통을 나누는 삶의 양식을 선택하는 작은 운동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것은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도시를 떠나 농촌으로 내려가고, 산으로 들어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공산주의 사회인 북한에서는 사람과 사람끼리 서로 감시하고, 체제를 비판하면 곧바로 숙청 또는 총살한다. 또한 사람은 노동의 단위로 계산되고 있다. 한사람을 위하여 국민 모두가 희생을 당하고 있는 독재국가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함께 사는 길을 막아버렸다. 삭막한 세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북한은 군사적 우위를 위해서, 아니 인민은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남한과의 싸움만을 위해 무기개발에 몰두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교회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해 진다. 그것은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를 노래하며, 남북한 민족의 화해와 평화통일에 대한 답을 내놓아야 한다는 목소리이다.

대한민국은 해방 이후 국가안보논리 때문에 마음 놓고 평화운동을 벌일 수 없었다. 특히 요즘 북한의 핵개발과 미사일 발사 등으로 인해 남북한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군축운동, 비핵화운동 등을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대한민국은 엄청난 예산을 국방비로 쏟아 부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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