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부터 서울 시내를 비롯해 전국 대도시를 중심으로 구세군 자선냄비가 일제히 모금활동을 개시했다. 그런데 올해는 자선냄비 자원봉사자들이 울리는 종소리가 유난히 애처롭게 들린다. 갑자기 차가워진 날씨에 종종 걸음으로 모금함을 스치듯 지나가는 시민들의 시선이 그 어느 때보다 싸늘하게 식었음을 체감하기 때문이다.

최근 기부금을 사적으로 유용하다 적발된 사건이 잇따르면서 우리 사회에서 기부를 기피하는 소위 ‘기부 포비아(phobia 공포증)’가 확산 조짐을 보이고 있다. 중학생 딸 친구를 살해ㆍ유기한 혐의 등으로 구속 수감된 이영학이 10여 년 간 자기 딸의 희소병을 내세워 받은 기부금 대부분을 사적으로 탕진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가뜩이나 메말라가는 인심에 연말 기부 문화마저 차갑게 식어버린 느낌이다. 모금 자원봉사자들은 “이영학 때문에 선량한 기부단체까지 한꺼번에 피해를 보고 있다”며 걱정을 토로하고 있다.

성탄 절기인 연말연시는 바야흐로 사람들이 꽁꽁 닫혀있던 마음과 지갑을 동시에 여는 기부의 계절이다. 한 해동안 건강하게 열심히 살아온 사람들이 가족에 대한 소중함을 깨닫게 되고 그와 동시에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에 대한 관심과 온정이 살아나면서 작은 나눔이라도 실천하려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올해는 그런 분위기가 더욱 싸늘하게 식은 느낌이 든다. ‘어금니 아빠’ 이영학 사건, 새희망씨앗 사회복지단체 사건 등 기부금 관련 불미스런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며 시민들 사이에선 TV 등 매체에 나와 도움을 요청하는 개인 뿐 아니라 기부금을 받는 단체들마저 믿지 못하겠다는 분위기가 역역하다. 이런 불신풍조가 지속될 경우 우리 사회에서 정말 도움이 절실한 빈곤층은 이 혹독한 겨울을 어떻게 견뎌낼지 걱정스럽다.

이럴 때 한국교회가 한 발짝 앞서서 나눔과 구제에 발 벗고 나서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기 예수님이 낮고 천한 유대 땅 베들레헴의 말구유에 태어나신 것은 부유하고 다 가진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들어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하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구제에 앞장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의무인 것이다.

그런데도 한국교회는 덩치에 비해 나눔과 구제에 인색하다는 비판을 줄곧 받아왔다. 성경에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교훈을 따르다 보니 세상 사람들이 몰라주는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실제로 한국교회만큼 구제와 봉사를 하는 종교도 드물다 하겠지만 그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야말로 코끼리 코에 비스킷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교회의 규모가 크고 성도 수가 많은 교회가 구제와 봉사도 많이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대형 교회일수록 전체 교회 예산에서 구제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극히 미미한 실정이다. 그야말로 생색내기에 지나지 않는다. 작은 교회에서 시작해 교회의 외형이 커질수록 사회적 책임도 그만큼 더 커지게 마련이지만 큰 교회는 거꾸로 구제비 예산을 제일 먼저 삭감한다. 그 이유는 교회가 대형화할수록 교회 자체를 유지하기 위한 비용이 더 늘어나기 때문이다.

한국교회가 이웃을 향한 나눔과 구제를 형편이 되면 하고 어려우면 안 해도 되는 취미활동 쯤으로 인식하는 동안 사회는 교회를 특권집단으로 규정해 버렸다. 호의호식하는 목사들이 세금 한 푼도 안내려 한다며 온 국민이 들고 일어나 종교인과세 즉각 시행을 요구하는 강력한 청원운동을 벌이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이 사회가 더 이상 교회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면 크고 호화스러운 예배당도, 목사라는 성직자도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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