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 성 택 목사

소위 해리성 정체장애라 불리는 다중인격(Multiple Personality Disorder)은 자기 고유의 인격이외에 한 가지 이상의 다른 인격이 그 속에 존재하며 번갈아가며 그를 지배하는 상태를 말한다. 이 인격의 주체성이 변화되는 것은 환경의 급격한 자극으로 갑자기 일어나는 것으로 이들 각 인격들은 정반대의 특징을 나타낸다. 통상 자기에게 다른 인격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 무관심하며, 본래의 자신은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할 뿐 아니라, 다른 인격에 의해 저질러진 일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예후는 다른 해리장애에 비해 좋지 않으며 제2의 인격이 평생 지속되기도 한다.

영화나 소설도 이러한 다중인격을 소재로 다룬 것들이 많이 있는데 대부분 하나같이 광적이고 위험하고 기괴하다. 잔혹함의 극치를 보여준 영화 ‘양들의 침묵’에 등장하는 한니발 렉터 박사, 장(巨匠) 히치콕 감독의 ‘사이코’나 에드워드 노튼이 열연(熱演)한 ‘프라이멀 피어’ 등도 다중인격을 소재로 한 영화로서 자기도 모르는 또 다른 자기가 원래 자기를 위해 살인 등 악행을 일삼곤 한다. 이처럼 다중인격의 위험성과 결과의 잔혹함을 거론하는 것은 바로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정치인의 다중인격을 염려함 때문이다.

망국과 독립, 전쟁의 폐허, 한강의 기적, OECD 가입과 IMF 등의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이룬 오늘날 우리의 변화와 발전은 모두가 부러워할 자랑스러운 현실에도 불구하고 민초들이 유독 정치인들을 혐오한다. 누구보다도 권력의 힘을 아는 민초들이 권력에 대해 과도한 관심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혐오과 불신을 보내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필자는 그 이유를 정치적 다중인격 성향을 보인 정치가들에 의해 저질러진 역사적 오점들 때문으로 본다. 민초들은 우리 사회의 최대의 적은 역시 정치적 다중인격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의학적 다중인격자는 자신이 다중인격자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나 정치적 다중인격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자신들의 과거 행적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정반대의 행동을 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굳이 구체적인 예를 들 필요가 있겠는가? 요즈음 정치가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신조어 “내로남불”이 그 대표적인 증상의 요약이다. 이 증상은 비단 정치인들에게 있는 것만은 아니다. 사회 전반적으로 나타난 현상인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역시 그 분야에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는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한다.

필자도 과거 군부독재와 투쟁하며 정권을 쟁취한 어느 정부의 가신(家臣)의 폭거를 직접 경험하며, 그와 법정 다툼을 벌인 적이 있다. 필자는 그 때 정치적 다중인격을 경험하고 받은 충격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여야가 뒤바뀌면 양심도 진실로 정의도 상관없이 오직 자신들의 정파적 이익을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우리의 정치적 다중인격의 추함을 부인할 수 없다.

역사는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부정한다고 지워지는 것도 아니고, 우겨서 되는 것이 아니며, 광명 천지에서 감추고 속인다고 되는 것이 없다. 평창 올림픽 기간에 벌어진 남한 내부의 정치적 갈등들, 사회 전반으로 퍼지는 ‘me too'운동 앞에서 추락하고 있는 이들의 화려했던 과거 행적들, 무슨 일이 발생하면 그 원인과 대책을 찾는 것이 아니라 책임질 사람을 찾고, 그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씌우는 무서운 현실의 가장 큰 피해자는 민초들이다.

그런데 이런 조잡한 정치적 다중인격의 피해를 경험한 민초들조차 최근 집단적 다중인격의 수령에 빠져드는 조짐을 보인다. 정치인의 다중인격도 위험하지만, 민초의 다중인격은 나라의 운명을 서녘에 걸리게 할 수도 있다. 이것이 민초의 향도를 자임하는 교회가 깨어 있어야 하고, 교회의 향도인 목회자가 정신 차려야 하는 이유이다. 교회 다중인격은 치유할 수 없는 불행의 시작이다.

그리스도대학교 전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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