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방성과 공공성서 이탈

오늘 한국 기독교는 물질만능주의, 샤머니즘적인 축복주의의 온상에 갇혀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개신교는 19세기 중엽 이래 식민지 지배체제 아래서,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내세워 경건운동과 각성운동을 세계 곳곳 벌였다. 그것은 영혼과 육신을 분리하는 선교신학에 기초하고 있다. 영혼구원만 고집함으로써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관계성에 있는 인간을 도외시하는 선교활동을 벌였다.

한마디로 삶의 현장에서의 인간구원을 도외시 한 채, 영혼구원만을 이야기하며, 샤머니즘적인 축복주의 신앙만을 강조했다. 추상적이며, 감상적인 영혼구원만을 강조한 결과, 오늘 세계 선교는 예수님의 시간과 장소에서 이탈한 것은 물론, 피선교국의 샤머니즘적인 종교와 결합돼 성서에서 크게 이탈했다. 여기에다 교파주의가 피선교국에 그대로 이식돼, 교회의 세계 개방성과 사회적 공공성을 상실했다. 이는 결국 개별교회주의와 교파주의를 뿌리내리게 했다.

오늘날 세계교회의 모습은 종교개혁자 루터가 주창한 ‘이왕국론’을 왜곡시킨 것이라는데 문제가 있다. 한국 개신교가 선교초기부터 내세운 ‘정교분리’는 한국개신교의 목회자와 교인들의 정치적 봉사를 철저하게 막았으며, 교인들을 교회 안에 매몰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즉 교회와 사회가 분리되는 결과를 빚었다. 이것은 마치 십자가 없는 부활의 설교와 같아서 인류의 구속을 위한 그리스도의 수난과 희생, 율법을 배제한 ‘꿀맛 같은 복음만을 고집했던 중세 종교개혁시대의 반율법주의자들의 오류를 반복하는 결과를 가져다가 주었다.

율법 없는 복음, 복음 없는 율법 선포는 한마디로 기독교 전체를 왜곡한다는 사실. 그래서 선교신학자들은 “율법과 복음을 동시에 설교해야 한다”고 말한다. 율법 없는 꿀맛과 같은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성서의 전체 진리에서 벗어나 기복주의에 빠지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요즘 부모들이 채찍은 없이 사랑과 사탕만을 주면서 아이를 키우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항상 부모에게 요구만 하는 성숙하지 못한 인간으로 만들 위험이 크다. 한국교회는 율법 없는 샤머니즘적인 축복설교가 뿌리를 내렸다.

한국개신교의 선교 신학적, 사회 윤리적, 정치적 이탈과 왜곡은 1970년대 미국의 성장동기배경론으로 탄생한 ‘교회성장론’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이때부터 한국교회는 ‘삶의 현장’과 동떨어진 ‘맘몬’을 노래하기 위한 물질만능주의와 샤머니즘적 축복주의를 부르짖게 됐다. 한마디로 복음을 상품화시킨 보수적인 한국개신교는 사회적 약자들을 돌볼 겨를이 없었으며, 오히려 무제약적 경제논리로 몰아가는 잘못을 범했다. 9일 MBC <PD수첩>에 방영된 M교회의 보도내용은 이를 대변해 주고 있다.

이는 한국교회가 ‘교회성장론’에 매몰된 결과이다. 사실 무제약적인 경제논리, 상품화시킨 복음에 힘입어 70-80년대 한국개신교는 세계교회가 놀랄 정도로 크게 성장했다. 여기에 탄력을 받은 한국개신교의 교단들은 경쟁적으로 교회 배가운동을 벌였다. 한마디로 이것은 1만교회운동, 2만교회운동, 하나님나라 선교 3천교회운동, 5천교회운동으로 나타났다. 1990년도를 기점으로 교회성장이 멈추고, 교인들이 떠나면서, 이 운동들은 유아무아 해졌다. 오히려 문을 닫는 교회들이 늘어나고, 작은 교회들은 통합하고, 오늘도 통합이 시도되고 있다.

한마디로 교회성장론은 교단 간, 교회 간의 불건전한 성장 경쟁을 야기했고, 이것은 교인쟁탈전이라는 결과를 불러 일으켰다. 여기에는 온갖 수단과 방법이 동원되었으며, 작은교회들은 중대형교회에 편입되는 결과도 초래됐다. 또한 이러한 성장주의의 결과는 ‘하나님의 주권주의’를 이탈하는 반신적인 업적주의를 낳았다. 즉 한국개신교는 물질만능주의와 샤머니즘적인 축복주의의 온상이 되어, 맘몬과 바벨을 승리자로 찬양, 우상을 숭배하는 이단 및 사이비로 변질되었다.

 
교회성장론, 교인쟁탈전과 이웃교회 빼앗기 운동으로 이어져
율법과 복음을 함께 전하고, 십자가 없는 복음 결국 기독교선교 왜곡

맘몬과 바벨을 승리자로 숭배

2010년도를 넘어서면서 한국개신교는 자본주의적 교회성장론의 한계를 드러냈다. 교단간의 통합, 또는 작은교단 흡수, 교단을 통째로 빼앗아오는 현상이 일어났다. 최근 일어나고 있는 모교단의 무분별한 교회를 빼앗는 행위는, 교인을 기성교회에 침투시켜 교인과 교회를 빼앗은 신천지에 비교하고 있으며, 신천지보다도 더한 교단이라는 비난을 받기에 이르렀다. 한국교회 원로인 조경대 목사는 교회를 인위적으로 통합하고, 빼앗는 행위에 대해 소말리아 해적에 비교했다.

한국교회의 병폐로 제기되고 있는 교회성장론의 모순인 교인쟁탈전, 교회 빼앗기운동, 교회배가운동 등은, 교회분열, 교단분열이라는 악순환을 거듭하게 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한마디로 실적주의에 매몰된 나머지 한국교회의 세계 선교는 영미의 제국주의 신학과 식민지신학, 지배자의 신학을 제3세계에 그대로 이식시키는 결과를 불러 일으켜 많은 시행착오를 겪게 했고, 오늘도 겪고 있다. 최근 필리핀에서 일어난 백모 선교사의 구속사건은 이를 말해주고도 남는다.

이 같은 한국교회 세계 선교의 오류는 예수님의 시간과 장소에서 이탈해, 맘몬과 바벨을 먼저 생각하는 일부선교사들의 경쟁적인 선교가 불러온 것이라는데 이의가 없다. 예수님의 선교현장은 떠돌이, 안식일을 지킬 수 없는 가난한자, 고난당하는 자, 병든자, 장애인 등 보잘것 없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하나님나라를 선포하고,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였다.

분명한 것은 한국교회가 제국주의적 선교신학과 식민지신학, 그리고 지배자의 신학을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 세계의 개방성과 사회적 공공성에서 이탈했다. 일부 교단과 교회는 제3세계국가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학교설립, 병원설립 등의 교육 및 복지를 벌여, 기독교의 치유적 선교에 충실하고 있다. 130년전 이 땅에 처음 들어온 선교사들도, 학교설립, 병원설립, 남녀평등사상 등의 치유적 선교에 치중, 수명을 다한 이씨 조선아래서 신음하는 백성들에게 새로운 나라에 대한 소망을 심어주었다는 것에 대해 한국교회는 늘 고마움을 표시해 왔고, 그 고마움에 감사해 한국교회가 성장한 만큼 제3세계 선교에 모든 힘을 쏟고 있다.

분명한 것은 한국교회가 교회성장론에 매몰된 사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이단 및 사이비들의 극성이 도를 넘었고, 한국교회는 교파주의라는 혼란에 빠지게 됐다. 여기에다 이단 및 사이비들의 교단과 교회를 향한 도전은 도를 넘어, 한국개신교를 혼란에 빠트리고 있다. 종교개혁 이후 허버트를 비롯한 아담스미스 등 종교학자 및 경제학자들은 “초자연적인 계시종교도 시간이 지나면 교리화, 제도화되고 성직자들에 의해서 타락하면서 교인들은 혼란을 겪는다”고 했다.

그렇다 한국교회의 정치적인 일부성직자들이 예수님을 교리화, 제도화시키고, 교회를 무질서하게 만들면서 교인들이 혼란을 겪고 있다. 그것은 교회가 예수님의 시간과 장소의 선교현장에서 이탈해,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이지 못하고,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선교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곳에 교회를 세우고, 이 땅의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나라를 선포하고, 이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여야 한다.

보잘 것 없는 사람 외면한 자는 이단

독일의 신학자 비서트 후프트는 1968년 세계교회협의회 움살라대회에서 “인종차별주의자와 같이 사회적 약자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 신자가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가난한 이웃들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며, 이단의 죄를 범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신앙고백’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주기도문’은 일용할 양식을 문제 삼고 있다. 때문에 일부 신학자들은 주기도문을 가난한 사람들의 기도문이라고 말한다.

한국개신교의 교인들은 주일예배와 매 예배 시 기도를 통해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 그리고 고난당하는 민족을 위해 기도하며,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의 해’가 임하기를 기도해 왔다. 그리고 주기도문을 술술 외우며, 기도했다. 하지만 이러한 기도는 구호에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생활현장 서 실천에 옮기지를 못했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은 한국개신교를 향해 말만 앞세우는 예수쟁이,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는 사람 등으로 치부했다.

그럼에도 한국개신교의 목회자들과 교인들은, 세상 사람들의 외침을 듣지 않았다.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기독교를 비난하는 사람들의 비아냥에 못 이겨 그리스도인이기를 스스로 포기하는 사람도 있다. 사실 한국교회는 사회적 약자들의 울분을 달래주지를 못했다. 오히려 부자들의 눈물을 닦아주며, 이들의 입맛에 맞는 메시지를 선포하고, 일부 목사는 ‘가난도 죄’라는 쓰레기 같은 말을 거침없이 내뱉는다. 그것도 신성한 강당에서 말이다.
오늘 한국교회의 목사들이 ‘목레기’라는 말을 듣는 이유도, 강단에서 사회적 약자들의 아픔을 외면하고, 이들을 비하하고 참담하고 쓰레기 같은 말을 내뱉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일부 한국개신교의 목사들은 이것이 바로 ‘복음’이라고 현혹시키고 있다. 이 같은 말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을 대해, 모교단의 교육국장은 비난하기에 바쁘다. 이미 이데올로기적 제국주의, 신민지 신학에 길들여진 이 국장의 반발은 오늘 한국교회의 상황서 당연한지도 모른다.

식민지신학과 지배자신학, 백인문화에 길들여진 한국개신교의 일부목회자들은, 유럽과 미국이 부자나라가 된 것을 극찬하며, 마치 하나님의 축복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떠들고 있다. 한마디로 이들 1세계가 가난한 나라를 세계화라는 이름 아래 침략해, 빼앗고, 착취했다는 사실을 몰각한 것이다. 그렇다 세계 선교라는 이름아래 원주민들은 언어와 문화를 빼앗기고, 죽임을 당했다. 멕시코의 원주민인 인디언의 숫자가 8백만명에서 100만명도 남지 않았다는 것은 이를 대변해 주고도 남는다.

세계교회협의회(WCC) 경제백서에 따르면, 세계인구의 1/4인 13억 명이 절대빈곤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신음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들 중 9억의 인구는 빈곤으로 인해 문맹에서 탈출하지를 못하고 있다. 여기에다 남반부의 대부분의 나라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세계경제질서로 인해 갈수록 부채가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이제 세계선교도 변화되어야 한다. 피선교국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피선교국 국민들의 심성을 담아내는 그리스도의 선교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교파교회의 선교는 선교 초기부터 한국 땅에 이식되었고, 한국에 이식된 교파교회는 선교사들에 의해 제3세계 국가에 그대로 이식되고 있다. 장로교회나, 감리교회 등 여타의 교파 교회들은 예외 없이 미국 모교회의 교파주의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미국 모교회의 교파주의를 배경으로 한 선교는 원주민의 교회라고 보기가 힘들다. 미국교회의 확대이며, 교파이식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나라 선교신학으로 전환 절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중히 여기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맘몬)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복음 6장24절)”고 재물(맘몬)을 확실하게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오늘의 현실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승리자로 찬양할 수 있는 그리스도 선교의 비전을 분명하게 제시해야 한다.

그 비전을 위해서는 △그리스도인들은 한국개신교가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하나님나라 선교를 위해서 활동했던 당시를 기억하고, 이들과 함께하는 선교계획을 세워야 하며 △공동체성과 연대성을 회복하고, 그리스도인들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불의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며 △오늘의 체제에서 식민지신학과 지배자신학에서 탈피하고, 이데올로기의 신격화를 배제하며 △성서 및 그리스도의 전통에 서서 세계 고등종교와 협력을 이루고, 분열과 갈등의 중심에서 중재자와 화해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그것은 한국개신교 선교사들이 피선교지 국민들의 ‘한의 소리’를 듣고, 고난당하는 이들을 위해서 일할 때 가능하다. 그것은 북한선교도 마찬가지이다. 한민족의 선교 수행은 남한민족만을 위한 선교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렇다고 북한민족만을 위한 선교가 되어서도 안된다. 남북한의 선교는 세계 230여개국에 흩어져 사는 한민족의 선교가 되어야 한다. 또한 한국개신교는 팍스, 힘에 의한 한반도의 평화와 한민족의 화해로부터 이탈해, 예수님의 평화, 샬롬을 노래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한국교회가 하나님으로부터 위탁받은 선교의 명령이다. 나아가 한국교회는 기아와 전쟁으로 고난당하는 세계 민족의 화해와 평화에 봉사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혼자서 가는 곳이 아니다. 너와 내가 함께 가는 곳이며, 인류 모두가 함께 가야 하는 곳이다. 그래서 선교신학자들은 북한선교, 남한선교를 떼어서 말하지 않는다. 남북한 민족과 230여개국에 흩어져 사는 한민족 전체를 아우르는 한민족선교로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민족선교는 한민족 모두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선교운동이다. 분열과 갈등, 목회자의 음주난동 및 윤리적 타락, 경쟁적인 담임목사 세습, 사회적 약자들을 외면하는 한국개신교는 먼저 부자들의 교회로 변질된 교회를 갱신하고, 중세의 식민지신학과 지배자의 신학을 극복해야만 한민족선교를 말 할 수 있다. 한국교회의 분열, 한반도의 분열은 선교초기 선교사들에 의해 교파주의와 개별교회주의가 뿌리를 내리면서,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또한 한국개신교는 아집과 고집, 교파주의, 개별교회주의을 버리고, 하나님의 선교정신에 따라 건강한 시민운동단체들과 연대해, 건강한 사회발전에 기여, 게토화된 교회의 사회적공공성을 회복하고, 잃어버린 선교자원을 만들어내야 한다. 또 정의롭고 평화로운 자연을 보전하는 삶을 구현하고, 구체적인 실천의 삶을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세계화시대 기독교의 두얼굴> 2007년 손규태 저 한울아카데미 참조)

성경 아모스서 5장 21절부터 24절은 오늘 한국개신교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적고 있다. 우리 모두 이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이 땅에 뿌리를 내리도록 헌신하는 그리스도인 되어야 한다.

“나는 너희가 벌이는 절기행사들이 싫다. 역겹다. 너희가 교회로 모여도 도무지 기쁘지 않다. 너희가 나에게 빈 재물이나 곡식을 바친다 해도, 내가 그 재물을 받지 않겠다. 너희가 화목제로 바치는 살찐 짐승도 거들떠보지 않겠다. 시끄러운 너의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희 거문고 소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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