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법정신서 이탈행위

칸트의 말대로 ‘양심은 마음의 법정’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신구약성서의 법정신서 이탈해, 양심이 마비되었다는 지적을 받아 왔고, 받고 있다. 이것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는 아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맘몬을 숭상한 나머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장로교 모교단의 총회장과 모단체의 대표회장을 지낸 A목사는 오늘 한국교회와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연합단체의 대표회장 선거에서 한 후보로부터 4천만원을 받아 구설수에 올랐다.

대표회장 후보로부터 4천만원을 받아 건넨 인물 역시 모교단의 총회장을 지냈다. 총회장은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자신이 속한 교단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B목사에게도 3천만원을 건넸다. 국민들과 양심을 가진 그리스도인의 상식에서 생각하면,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일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자행한 것이다. 이 연합기관의 대표회장이 되기 위해서는 후보 한사람이 작게는 5억원, 많게는 10억원을 쓴다는 말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심지어 20억원을 쓴다는 말도 나온다. 한국교회는 돈으로 신분을 결정한다.

이런 상황에 처한 한국교회를 바라보는 국민들과 양심을 가진 그리스도인 눈에는, 분명 종로5가는 ‘범죄자들의 소굴’로 비쳐질 수밖에 없다. 오죽했으면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인 전광훈 목사가 종로 5가의 목사와 장로들을 향해 ‘걸어 다니는 시체’라고 말을 했겠는가(?) 돈을 좋아하는 목회자들을 향한 질타의 목소리라는데 이의가 없다. 전 대표회장의 말에 동감을 하면서도, 그리스도이라는 사실이 부끄럽다.

전 대표회장과 같은 시각은 전부터 회자되었던 말이다. 김용민 목사는 8년 전 이성과 합리성을 잃어버린 목회자들에 대해서 ‘범죄자’로 규정했다가 한국교회로부터 몰매를 받았다. 국회의원에 출마한 김용민 목사는 보수적인 한국교회의 조직적인 낙선운동으로 국회입성이 좌절됐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면면을 살펴보면, 당시 김용민 목사의 말이 옳았다는 생각을 떨쳐 보릴 수가 없다. 본지 역시 하나님의 자리를 돈으로 대치시킨, 종로5가를 ‘범죄자의 소굴’로 규정했다.

김용민 목사가 8년 전 양심이 마비된 목사들을 향해 ‘범죄자’라고 말했을 당시, 한국교회의 보수적인 목회자들은 자신들의 치부를 건드렸다며, 집단적 항의 표시로 민주당 국회의원 후보인 김용민 낙선운동을 벌였다. 오늘날에 와서는 오히려 이들이 종로5가의 목회자와 장로들을 향해 ‘걸어다는 시체’라고 말한다. 언론은 종로5가를 ‘범죄자의 소술’로 규정했다. 그럼에도 이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목사, 장로는 없다. 사실로 받아드린다.

그것은 오늘 종로5가를 걸어 다니는 목사, 장로 모두가 자신의 양심이 마비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일부 목사는 이런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 종로5가에 나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종로5가만 나오면, ‘범죄자’로 취급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종로5가에 세워진 기독교회관들은 공실이 갈수록 많아지기 시작했고, 그렇게 많던 모임과 집회도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속옷까지 빼앗아 호화로운 교회당 건축 경쟁
돈이 있어야 행세하는 한국교회 양심적이라고 말 할 수 있는가

왜! 종로5가 범죄자의 소굴인가

7월은 법의 달이다. 신구약 성서의 법정신에서 이탈해 양심이 마비된 목회자와 장로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합리성을 가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성을 잃어버렸다. 인권운동의 중심적이었던 종로5가는 갈수록 비인권적이라는 말을 듣는다. 왜 연합기관의 임원들이 대표회장으로부터 ‘XXX’, ‘걸어다니는 시체’라는 말을 들어야만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를 스스로 포기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들을 향해 “걸어 다니는 시체”, “나를 의장 의장 하는데, XXX”라고 말해도 ‘아멘’으로 화답하며,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어느 신학자는 오늘날 목회자를 향해 ‘아멘 하지 말라’고 했다. 목회자들은 역사를 왜곡하며, 자신이 태어난 곳의 도민을 ‘빨갱이’로 치부해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드린다. 어느 인사는 “과거에는 빨갱이였는데. 대표회장을 만난 이후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서 안 이후, 전향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양심적인 사람이라고 한다.

같은 동역자를 죽이고, 살리는 것이 양심적인가(?) 선거철만 되면 후보자에게 금품을 요구하는 것이 합리적이며, 이성적인가. 북한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세습에 대해서는 핏발을 세워가며 비난하면서, 담임목사직을 세습하는 한국교회 목회자는 이성적인가. 교인들에게 순종만을 강요하며, 성서를 내세워 자유민주주의로 가장한 오늘 한국교회는 합리적인가. 마음의 법정인 양심에 물어 보라.

한국의 대형교회 목회자들은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진 북한의 세습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매 설교마다 이는 단골 메뉴로 등장했다. 북한의 핵실험 당시 북한세습에 대한 비판은 최고조에 달했다. 그러면서 대형교회 목회자들은 담임목사직을 세습하는데 경쟁하고 있다. 이는 한국교회 유행처럼 되어버렸다. 이제는 중형교회들도 담임목사세습에 편승했다. 어느 교단은 아버지에 이어 아들이 총회장을 맡는가 하면, 총무까지 아들을 세웠다.

그것은 선교단체도 마찬가지이다. 한국교회는 북한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진 세습에 대해서 비판 할 자격이 없다. 담임목사 세습은 목회자의 파쇼적인 교회운영철학이 불러 왔고, 성서적이라고 왜곡한다. 맘몬도 한 몫을 했다. 오늘 한국교회는 학식과 믿음에 좋아서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를 잘 만나야 큰 교회 담임목사도 될 수 있다. 돈이 있어야 큰 교회에 부임 할 수 있다. 장로, 안수집사, 권사도 돈이 있어야 할 수 있다.

믿음과 학식, 인간의 됨됨이로 교회의 직분을 맡는 시대는 지났다. ‘돈’이 최고인시대가 됐다. 예수님이 그렇게도 실어하시던 돈이 있어야 교회에서 직분도 맡고 행세 할 수 있다. 돈이 신분을 결정하는 교회로 변질됐다. 예수님은 돌로 만든 떡을 거부하셨다. 바벨탑(권력)도 거부하셨다. 그런데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돌로 만든 떡을 먹고, 마음이 굳어져 버렸다. 그래서 이웃의 아픔에 동참할 수 없다. 함께 아파 할 줄도 모른다. 성서의 주제인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의 고통과 해방에 대해서 전혀 말하지 않는다.

이것이 오늘 교주화 되어가고 있는 한국교회의 현주이다. 이것이 이단이며, 예수님을 팔아 장사하는 사이비다. 오늘 한국교회의 문제는 이단의 문제가 아니다. 사이비의 문제이다. 여기를 봐도 삯꾼, 저기를 봐도 삯군, 사이비가 판을 친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엇이 있다고, 속옷까지 빼앗아 호화로운 교회당을 건축하고, 그 곳에 신을 가두어 버린다. 이제 갇힌 신은 아사직전에 있다. 그런데도 목회자는 다른 종교보다 우월하고, 양심적이라고 말한다.

믿음과 학식이 필요 없는 시대

오늘 언행에 일치하지 않는 목회자와 교인들에게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라’고 말하고 싶다. 교회에서는 믿음과 학식, 경륜이 필요하지 않다. 돈만이 필요하다. 돈이 있어야 양반인 시대이다. 성서는 분명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의 고통과 해방을 주제로 삼은 경전이다. 여기에서 이탈하면 그리스도인라고 말 할 수 없다. 한국교회는 일본제국주의 아래서 정교분리를 주창하며, 민족의 문화와 역사를 몰각시켰다.

오늘 한국교회가 역사를 왜곡하며, 고난당하는 민족과 함께했다고 말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렇게 교육을 받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만주벌판서 항일무장투쟁을 벌인 독립투사를 부정한다. 원자폭탄 2방이 민족을 해방시켰다고 말한다. 독립투사들에 대해서는 일본 주요 인사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사람으로 매도한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은 한반도에 살 이유가 없다. 일본 땅으로 가야 한다.

일본식민지 아래서 일본군에게 시궁창만도 못한 대접을 받은 이 땅의 소녀들, 일본군의 총알받이가 되었던 이 땅의 청년들, 일본에 노무자로 끌려가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던 우리의 부모형제를 조금이라도 생각했더라면, 이성을 잃어버린 비양심적인 말을 할 수 없다.

오늘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은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이기 위해서 목자의 길을 걷는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이들은 밥을 먹기 위해서 목회자의 길을 걷는다고 해야 옳다. 그것은 목회자들이 맘몬과 바벨을 숭상하는 ‘삭군 목사’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워 장사하는 장사꾼이다. 이들은 자신의 양심을 스스로 마비시켰다. 이들에게서 합리적이며, 이성적인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

한국교회의 교인들은 예수님을 보고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 목회자를 보고서 교회를 다닌다. 이는 목회자가 교주화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렇다보니 다름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목회자의 권한이 권력이 되면서, 교회는 분쟁에 휘말리고 있다. 오늘 한국교회는 13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데 예수님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 그것은 최삼경 목사의 말에서 쉽게 알 수 있다.

“오늘 한국교회는 13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데, 예수님의 모습은 그 어디로 갔는지,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목회자의 교주적인 아집의 죄는 교회와 민족의 죄가 되었다. 신학교, 연합기관, 담임목사의 세습을 꿰뚫어보면, 비도덕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세월이 흐르면서 성숙해져야 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야 할 목사는 청빈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사는 그리스도인은 형제와 교회, 그리고 민족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 앞서 이웃과 더불어

최 목사의 말은 교주화 되어가고 있는 한국교회를 걱정해서 나온 말이다. 성서의 법정신은 한마디로 ‘하나님 앞에서 이웃과 더불어’로 요약 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웃과 주고받으면서 사는 참삶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 대부분은 이웃과 정을 나누며,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고, 강자가 약자의 것을 빼앗는 관계가 설정돼 있다.

이러한 현상은 이스라엘 역사가 말해주듯이 가나안 정착이후 소유가 생기고, 왕권이 수립되어 권력이 인간관계에 개입하면서 시작됐다. 구약의 법정신은 철저하게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그것은 오늘 현대국가의 법도 마찬가지이다. 구약성서에는 3개의 법전이 나온다. 계약법전(출애굽기), 신명기법전(신명기), 성법전(레위기)이 바로 그것이다. 이 3개의 법전 모두 상황의 차이는 있지만 분명한 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경제적 약자를 보호하시기 위해 “그가 나에게 호소하면 자애로운 나는 그 호소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가난한 자가 낸 소송사건에서 그의 권리를 꺾지 말라”고 했다. 신명기법전도 다른 양상을 보이기는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을 보호하는 법령이 있다. 레위기에는 토지 공개념에 대한 지적도 있다. “땅은 내 것이요. 너희는 식객에 불과하다”(레위기 25장23절) 이것은 희년의 실현을 뒷받침한다. 또 이것은 사회개혁의 기초를 놓았다.

예수님은 안식일법과 정결법 때문에 바리새파와 충돌했다. 당시 바리새파는 국민운동을 일으키기 위해서 구약을 동원했다. 유대교에서의 하나님의 법은 모세 오경에 국한되어 있다. 이것은 정결법과 안식일 법으로 그대로 나타난다. 바리새파가 내세운 법은 가난한 자와 병든 자, 소외된 자, 떠돌이 등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오히려 법대로 살 수 없는 계층에게 역기능을 가져다가 주었다.

정결법은 원래 사제계층에게 국한된 것이었다. 이를 일반인에게 확대시켜 사회적 약자들을 여기에 묶어버렸다. 한마디로 안식일법과 정결법은 사회 전반에 파급돼 가난한자와 병든자, 그리고 불결한 직업을 가진 자들을 더욱더 소외시키는 결과를 불러 일으켰다. 옷 한 벌로 살아야만 하는 사람, 항상 노동을 해야만 하는 사람, 문둥병자, 정신병자들에게 있어서 정결법은 지킬 수 없는 법이었다.

신구약성서에 나타난 법정신

안식일법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가면서, 밀 이삭을 잘라 먹었다. 저들이 배고파하는 현실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그것은 또 못가진 자의 구체적인 삶의 자리이다. 앞서 말했듯이 구약의 법정신은 한마디로 사람이면 배고픈 자를 돕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리새파 사람들이 안식일 날 배고픈 사람들이 일을 한 것이 불법이라는 것이다. 또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든 사람을 고쳐 준 것도 잘못이라고 말한다.

이곳이 바로 예수님이 사는 삶의 현장이었다. 예수님의 입장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마가복음 2장 27절)라는데 있다. 예수님은 법은 사람의 권리, 특히 약자나, 가난한 자의 권리를 억누르고, 사랑할 수 있는 자유조차 가로막을 때 사정없이 파괴했다. 법은 분명 ‘사람’을 위해 있다. 특히 법은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을 위해서 있다. 그런데 바리새파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을 변질 시켜 버렸다.

공관복음서는 예수님의 적대자로 바리새파를 내세웠다. 바리새파는 구약을 동원해서 국민운동을 일으켰다. 이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정신운동을 위하여 예언의 글과 구약의 고전, 그리고 랍비들의 성서해석을 원용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법을 국민운동의 규율로 적용했다. 결국 이것은 법이 담고 있는 본래의 뜻을 변질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오늘 한국교회 역시 바리새파들이 주장한 안식일법과 정결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이는 신약성서에 나타난 법정신에서 크게 이탈했다는 사실에 대해 한국교회를 책임지고 있는 목회자들은 어떻게 변명할까(?) 하나님의 법은 국가 안에서 눌린 자, 가난한 자, 떠돌이, 과부, 어린이,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보호하는데 목적이 있다. 그런데 바리새파는 하나님의 법을 국민 전체를 기동화 하는 도구로 이용했다. 이는 법대로 살 수 없는 계층에게 역기능이 됐다.

예수님은 안식일법과 정결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서, 그들이 있는 역사의 현장에서 활동하셨다. 한마디로 바리새파 사람들이 철저하게 동원한 안식일법과 정결법에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사제계층에 국한된 정결법을, 이를 지킬 수 없는 사회적 약자들에게까지 확산시켰다. 오늘 한국교회가 안식일법과 정결법을 동원해서 바리새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삶의 현장’서 이탈한 결과이다.

오늘 목회자들의 입에서 아무렇지 않게 사회적 약자들을 향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 “교회당을 하나님의 성전인 만큼, 가장 좋은 옷을 입고 나와라”, “교회에 나오기 전에 몸을 정결케 하라” 등등 예수님의 법정신과 대치되는 천박한 말들을 강단에서 아무렇지 않게 쏟아내고 있다. 이런 말들은 하루를 벌어 하루를 먹고사는 사람과 쓰레기를 치우거나, 대장간 등에서 일하는 사회적 약자들이 지킬 수 없는 법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것이다.

예수님 당시 안식일법과 정결법은 생활전반에 파급되어 있었다. 이는 가난한 자, 병든자, 불결한 직업을 가진 직장인들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가속시켰다. 그 중에 예수님과 충돌의 계기가 된 것은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이었다. 손 씻는 것은 제사 전에 사제가 제사를 집행하기 위한 사제법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런데, 종교적 권위로써 제재하는 법규가 되었다. 오늘 한국교회의 목회자와 교인들도 바리새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데 참당하다.

이것은 생활현장에 맞는 것이 아니었다. 또 사람의 생명을 위한 것도 되지 못하고, 사람을 삶에서 철저하게 유리시켰다.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정죄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런 법은 인간을 위하는 법에서만 의미가 있다. 그러나 바리새파에게는 사람의 삶의 현실보다도 그 법규를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가 문제가 되었을 뿐이다. 이것은 분명 복음서에 나타난 대로 바리새파의 입장이며, 예수님의 삶과 무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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