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 헌 철 목사

 어느 신부님이 강론 속에 나는 한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내가 죽을 때 “ 그는 숟가락 몽둥이 하나밖에 없드라”는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누어 주고 또 나누어 주어도 양복이고 무엇이고 늘어나니 고민 입니다.” 라고 말하여 장내의 웃음을 이끌어 냈다. 물론 그 웃음은 모두가 흐뭇해하는 평안의 웃음이었으리라. 나 역시 그의 말에 많은 것을 생각지 않을 수가 없었다.

또한 2009년 2월 16일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선생복종(善生福終) = 가톨릭 측의 표현]과 함께 그분에 관한 이야기들이 회자 되기도 했었다. 87년 명동성당에서 경찰관들을 몸으로 막았다며 “나를 밟고 신부들을 밟고 수녀들을 밟고 지나가야 학생들을 검거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여 한국의 민주주의에 한 페이지를 기록하게 한 분, 어렵고 소외된 자들의 편에 있던 분이라며, 그분의 정직과 청렴도, 나라 사랑, 민족 사랑, 나아가 북녘 동포 사랑 등 그의 사랑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신앙이라고들 칭송하는 이들도 있었다. 물론 개혁교회 측에서는 천주교를 총체적 이단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김수환 추기경의 삶 속에서 사랑이 배어 나옴까지 부정할 수는 없기에 ’김수환 추기경은 삶을 마감했음에도 사람들이 천주교에 호의를 갖게 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개혁교회들 지도자들이 그들을 이단이라고 하기 전에 그들보다 더 많은 은혜를 누리고 있을까 하며, 스스로를 돌이켜 보기도 했다.

개혁을 외치며 보수신앙을 파수해 나아간다면서도 독재정권에 기생하거나 아부하며 많은 이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해도 오히려 박수하거나 침묵하면서 심지어는 일제의 성적 고통을 당한 분들에게까지 돈과 결부시키며 치욕적, 매국적 왜곡의 말을 서슴없이 쏟아내면서 영욕(榮辱)의 삶을 살아오면서 ’나는 기독교인이다‘라고 말하는 이들보다 그가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했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필자는 2008년판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서 ’강원용‘ 목사님에 관한 글을 읽으며 큰 감동과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책에는 그분이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신앙의 정절을 지킨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맨발의 천사 ’최춘선‘ 목사의 삶이 소개된 책과 CD를 접하면서 많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기도 하며, 구태여 순교자들을 거론하지 않아도 우리에게 각성(覺醒)의 은혜를 끼친 목사님들도 많다.

그러나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4-26)‘라고 증거 하면서도, 권력 싸움, 재산 싸움, 교권 싸움, 정치적 논쟁 등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것까지도 복음으로 포장되어 얼룩지게 하거나, 오직 자기를 위한 세속적 성공을 위해 복음이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면 ’이제라도 돌이키자‘ 물론 너나 잘해라, 판단하지 말라 등등으로 되돌아올 수도 있겠지만,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정직을 기뻐하심을 되새기며 생동적 보수(生動的 保守), 화합적 일치(和合的 一致), 자애적 애린(自愛的 愛隣), 자주적 자립(自主的 自立), 순교적 봉사(殉敎的 奉仕) 정신(精神)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누리기를 기도 한다.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 찌니라(행 20:35).

한국장로교신학 학장•본지 논설위원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