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너의 결혼식'의 한 장면.

가정은 선하고, 창조적인 것

5월 21일은 부부의 날이다. 부부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자녀를 낳아 가정을 이루는 하나님의 창조적 선물이다. 하나님의 창조적 선물인 가정이 분노와 부부의 갈등, 배신감 등으로 인해 해체되고 있다. 또한 생명을 실어 나르는 아이들이 부모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과 인간의 마음과 마음을 연결해 주는 인정이 메말라 버렸기 때문이다. 아니 하나님의 참사랑을 잃어버린 결과이다. 성경전서 창세기 2장 18-25절은 부부의 창조적 선물을 강하게 제기하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인간은 누구나 생명 속에 성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다. 이 성적 욕망을 잘못 이해하고, 잘못 사용함으로써 범죄하고, 부부간의 갈등과 배신의 원인이 된다. 분명한 것은 성적인 욕망은 남자와 여자가 하나 되려는 갈망이다.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속한다. 이 갈망은 자녀를 낳음으로써 실현된다. 자녀 속에서 남자와 여자가 하나로 결합된다. 남녀가 서로 하나 되려는 갈망을 주고, 결혼을 통해서 함께 살도록 한 것은 하나님의 창조적 선물이며, 섭리이다.

위 성경 구절은 남녀 간의 사랑과 결혼이 하나님의 축복이며, 선물이라는 사실을 잘 드러낸다. 하나님은 아담의 일을 거들 짝으로 들짐승과 공중의 새, 집짐승을 지었다. 아담은 이 짐승과 공중의 새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름을 짓고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서로의 관계를 맺고, 의사를 소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아담은 이 짐승들에게서 마음을 주고받을 온전한 짝을 찾지 못했다. 인간은 짐승의 짝이 될 수 없다.

서로 이해하고 사랑을 주고받아도 아담과 짐승 사이에서 사랑이 싹틀 수 없었다. 이를 지켜보던 하나님은 아담의 갈빗대를 뽑아서 여자를 창조했다. 성서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은, 여자는 남자의 갈빗대로 만들었으니, 남자에게 예속된 존재로 폄하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열등한 존재로 취급하며, 종속시키려 한다. 아담이 흙으로 만들어지지 않고, 인간의 갈빗대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분명 하와와 마찬가지로 아담도 똑같은 인간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여자와 남자는 동등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담은 자신의 갈비뼈로 만들어진 여자를 보고 외쳤다.

“드디어 나타났구나!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아담은 드디어 짐승들에게 발견할 수 없는 짝을 찾았다. 마음을 주고받을 여자를 찾았다. 한마디로 아담과 똑같은 존재, 대화가 통하고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존재, 그리고 공감하며 하나 될 수 있는 이브를 만났다. 한마디로 마음에 드는 인간을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물로 주셨다. 남녀 간의 깊은 관계는 개인적인 쾌락의 충족일지 모른다. 하지만 남녀가 하나된 것은 인류의 생명을 보전하고, 종족을 유지하는 수단이다. 생명을 실어 나르는 가족이 탄생했다. 남녀의 애정은 죽음보다 위대하다. 그리고 넓고, 깊다.

하나님의 참사랑과 창조적 섭리를 잃어버린 현대 가정은 분열과 갈등이 만연돼 가족해체의 위기를 자초하고 있다. 오늘날 가정의 위기는 존속 살인과 사랑해서 낳은 아이 살해 등등의 범죄가 말해주고 있다. 남녀의 사랑은 선하고, 창조적 섭리에 속한다는 것을 잊었다. 인류가 타락하고, 지배욕과 소유욕의 노예가 된 나머지 남녀의 사랑은 부끄러운 것, 아니 추한 것이 되어버렸다. 가족 간에도 굳건했던 인정공동체가 사라지고 있다.

“부모의 사랑을 대신 할 수 있는 인류사회 어디에도 없다”
인간 사이의 중보자로 그리스도가 존재해야 참된 사랑 가능

인간의 욕망에 의해 상처투성이

인간은 타락하기 이전에 알몸으로 지냈다. 그러면서도 창피하거나, 부끄러운 줄 몰랐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 부끄러워 나뭇잎으로 앞을 가려야만 했다.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 적대적의 관계가 생기고, 남녀사이에 지배와 피지배의 종속관계가 성립되었다.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인간의 마음은 사라지고, 긴장과 대립, 그리고 불안과 갈등이 생겨났다. 자신을 상대에게 내 맡기고, 상대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마음적 여유가 없어졌다.

자신의 치부를 가린다고 해서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상대를 평가하고, 비교하며, 의심하고, 자신을 숨기는 마음의 분열이 일으키고 있다. 결국 남녀관계가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게 했다. 기독교는 도교나, 불교 등과 다르게 인간과 인간 사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로막힌 담을 헐고, 화해를 이루려고 한다. 완전한 화해를 추구한다. 한마디로 인간 모두가 자아를 잃지 않고, 화해와 일치를 이르려 한다.

인간의 타락은 인간의 위기를 말한다. 인간의 위기는 곧 자신의 위기이며, 하나님의 창조질서의 위기이다. 오늘 우리 사회는 이혼율이 급증하면서, 하나님의 창조적 섭리인 가정이 해체되고 있다. 존속살인 및 형제살인, 이웃살인, 자녀 살해 등의 사건이 급증하고 있다. 오늘날과 같은 산업사회에서 결혼생활을 지속한다는 것이 쉽지 않게 됐다. 오늘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이혼율 1위라는 불명예를 얻게 됐다. 이것만이 아니다. 자살률도 높아지고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인간 모두가 생명의 가치와 인간관계가 상실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결국 가정이 해체되고, 아니 부부 관계가 금이 가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보니 마음이 강퍅해진 인간들은 사랑을 사람에게서 찾는 것이 아니라, 개나, 고양이와 같은 애완동물에게서 찾고 있다.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동물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병적이라고 할 수 있다.

옛날 봉건시대에는 남자와 여자가 한번 부부의 연을 맺으면, 죽음에 의해 갈라지기 전에는 헤어지는 일이 없었다. 당시에는 이혼이라는 말도 없었다. 여자가 잘못하여 쫓겨나는 일은 있었어도, 합의해서 이혼하는 일은 없었다. 그것은 부부가 완전한 생활공동체였기 때문이다. 논농사, 밭농사를 지으면서, 부부는 가족들의 생계를 위하여 하루 종일 함께 땀을 흘리며, 일을 했다. 다른 곳에 눈을 돌릴 수 있는 겨를이 없었다.

아내는 길쌈하고 바느질해서 남편과 자녀의 옷을 만들었고, 밥을 지어 가족 모두의 생명을 책임졌다. 대신 남편은 지붕을 이어야 했고, 밭과 논을 갈며, 나무를 해서 가족들이 따뜻하게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쉬지 않고 일을 했다. 이렇게 부부는 생존을 위해 평생 함께 일하는 생활공동체였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농경시대에는 이혼이라는 말도 없었다. 가정이 해체되는 일도 없었다.

가정, 인간사회의 기초적 토대

농경사회, 가부장적 사회에서는 부창부수니, 삼종지도니 해서 아내는 절대적으로 남편의 말에 복종하고 따라야 했다. 남편의 권위가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가정은 평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수명을 다한 조선말, 개신교가 들어오면서, 여성들도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남녀평등사상이 들어온 것이다. 여성들도 강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독립군이 되어 만주벌판에서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했다. 3.1만세운동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어날 수 있었던 것도 깨어난 여성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오늘날의 부부는 함께 지내는 일이 아주 짧아졌다. 어찌 보면 직장의 동료들보다도 함께 지내는 일이 짧다. 부부간의 대화도 자연스럽게 짧아졌다. 여성 역시 직장동료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이로 인해 많은 문제들이 야기되기 시작했고, 부부간의 관계가 남보다도 못한 관계로 변질되어 버렸다. 부부는 밤에 잠깐 보는 관계가 되었다. 남자나, 여자 모두 윤리적으로 타락하는 횟수가 잦아졌다. 이런 상황에서 대한민국의 가정은 무너지기 시작했고, 이혼은 유행이 되어버렸다. 대한민국은 OECD 가입 국가 중 이혼율 1위라는 불명예를 얻었다.

결혼은 분명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다. 축복이다. 그리고 인간생활, 사회생활, 국가의 기초이며, 토대이다. 그것이 물질문명의 발달과 인간의 탐욕에 의해 흔들리고 파괴되고 있다.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남편이 아내를 살해해 주검을 유기하고, 부인이 정부를 시켜, 또는 독극물로 남편을 살해해서 주검을 유기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있다. 여기에다 자녀들은 부모를 살해하고, 형제를 살해하고, 이웃 친구를 살해하고 있다.

이렇게 죽어간 사람들의 ‘한의 소리’가 땅과 하늘에서 사무친다. 죽임을 당한 아벨(이웃)의 울부짖음이 하늘에서 울부짖고 있다. 이들의 울부짖음을 들은 하나님은 “네 동생 아벨(이웃)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고 계시다. 물질문명의 발달은 형제간에 분쟁과 갈등을 일으키고, 내가 살기 위해 이웃을 희생시킨다. 가정은 인간이 사랑을 배울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장소이며, 생명을 이어가는 토대가 된다.

아직까지 부모의 사랑을 대신할 수 있는 인류사회는 어디에도 없다. 자신의 약점과 비밀을 스스럼없이 드러낼 수 있는 곳은 가정 이외는 아무 곳도 없다. 가정은 자신을 내놓고 맡길 수 있는 곳이며, 한 사람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는 곳이다. 경제적인 필요를 떠나서 정신적으로 근원적인 합일, 온전한 일치를 이루는 곳이다. 고아가 불쌍한 것은 집이 없어서가 아니다.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사랑할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특히 어머니의 젖은 말 그대로 생명의 젖줄이다. 아이는 엄마의 젖을 빠는 순간 사랑을 배운다. 어머니의 태는 생명의 근원이다. 때문에 어머니의 젖과 태를 생명, 사랑, 평화, 행복이라고 말한다. 현대사회는 이러한 생명의 근원인 어머니의 젖과 태를 상품화시켜 버렸다. 범죄가 발생하고, 가정이 해체되고 있다. 여기에다 가정의 질서를 세워주던 가부장적인 사회제도는, 여권신장이니, 여성해방이니 하면서, 가정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자녀와 부모사이에 존재하던 위계질서도 붕괴되기 시작했다. 가족 간에 반목과 갈등이 계속되고 있다.

한마디로 생활의 리듬과 생각, 느낌이 현대 물질문명에 젖어들면서, 평화로운 가정, 사랑과 행복이 넘치는 가정의 생활공동체가 파괴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오늘 기독교계나, 사회는 가정상담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 잘못된 사이비 목사는 가정상담을 한다면서, 가족의 합치를 위해서 상담하는 것이 아니라, 부부간에 헤어지라고 주문하는 경우도 속출하고 있다. 우스운 것은 부부 간에 이혼을 시키고, 합의금의 일부를 헌금하라는 사이비 목사도 등장했다.

반석 위에 세운 가정

사랑과 평화, 그리고 행복의 가족 생활공동체는 자기기준이 아닌, 상대의 기준을 생각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에 근거한 가정,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가정, 반석위에 세운 가정이다. 또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실현하는 평화와 사랑의 공동체이다. 무게의 중심을 상대방에게 둘 때 이런 가정이 만들어진다.

오늘날 현대가정은 과거 농경시대와는 달리 남자들의 일방통행이 불가능 해졌다. 생활의 리듬이나, 생각이나, 느낌을 서로 조정하고 맞춰야 가정의 평화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가정은 나 자신을 상대방에게 맞추기 보다는 상대방이 나 자신에게 맞추기를 바란다. 무게의 중심을 자신에게 두는 한 가정의 평안을 기대할 수 없다. 남녀가 동일선상에서 직접 부딪치면, 분명히 그 생활공동체는 깨진다. 둘 사이를 결합시켜 줄 제3의 자리가 필요하다.

키에르 케고르는 평생 동안 한 여인만을 사랑할 능력이 없음을 통감했다. 그리고 약혼녀 레가네 올챈과 파혼했다. 그가 도달한 결론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 그리스도가 중보자로 나올 때만 참된 사랑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 모든 사람은 서로 손에 손을 잡고, 눈길을 한데 모을 수 있는 제3의 자리가 있어야 한다. 그 제3의 자리는 그리스도일수도 있고, 공동 목적일수도 있고, 자녀일수도 있다. 제3의 자리는 가정의 사명과 목적을 말하는 것이다.

전 한신대 박재순 교수는 자신의 저서 <예수운동과 밥상공동체>에서, “오늘 현대가정의 기초가 흔들리고 파괴되는 것은 가정의 사명과 목적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박 교수는 이 책에서 “결혼은 창조시에 하나님이 인류에게 준 선물이다. 그리고 가정은 인간생활의 기초적이며 토대이다. 이것이 지금 흔들리고 깨지고 있다. 그래도 인간이 사랑을 배울 수 있는 곳은 가정이다”면서, “부모의 사랑을 대신할 만한 지극한 사랑이 아직 인류사화에는 없다. 자신의 약점과 비밀을 드러낼 수 있는 곳은 가정밖에 없다”고 했다.

그렇다 박 교수의 지적대로 자신을 내놓고 맡길 수 있는 곳은 가정 밖에 없다. 한사람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는 곳이 바로 가정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며, 선물이다. 옛날에는 자식을 낳아 가문을 잇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종족보전과 인류의 생명보전이 중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아들을 많이 낳은 아내는 가족들로부터 내접을 받았다. 그리고 아내 역시 큰소리를 칠 수 있었다. 반면 아들을 낳지 못한 아내는 소박당하거나, 아니면 가족들에게서 쫓겨났다.

그렇다고 이혼당하는 일은 절대로 없었다. 남편은 종족보전을 위해서 밖에 나가 자식을 만들어 오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아들을 못 낳으면, 가정에서 이탈되거나 쫓겨나야만 했다. 한마디로 여자들의 운명은 기구했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구가 차고 넘쳐 산아제한을 해야 하는 일이 이 땅에서 벌어졌다. 산아제한의 표어는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것이었다.

그 결과 이 땅은 인구절벽현상에 부딪쳤다. 경제적인 능력이 남자나, 여자나, 있다 보니 생명을 이어갈 결혼을 기피한다. 구태여 결혼을 하지 않고서도 혼자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결혼하고서도 구태여 자식을 낳아, 그 올무에 갇혀 살 이유가 없다는 것이 요즘 젊은이들의 생각이다. 그렇다보니 이 나라도 일을 할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외국에서 사람을 수입해 와야만 하는 세태가 벌어지고 있다.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고 벌인 ‘산아제한정책’은 한마디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적 선물이며, 섭리를 인간 스스로 거부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이제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도 잃어버렸다. 젊은 사람들의 탈선은 도를 넘었으며, 배속의 아이를 지우기 위해서 산부인과를 찾는 젊은 부부가 많아졌다. 살기 힘들다는 이유로 사랑해서 낳은 자식을 내다 버리거나,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다. 얼마나 파렴치한 일인가.

과거 가족전체가 먹고살기 위해 온 가족이 피땀 흘려 일을 했다. 먹고사는 일은 이제 각자가 해결할 수 있다. 돈만 있으면 먹고 사는 일이 해결되기 때문에 굳이 가정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 이제 자식을 낳거나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가정의 목적이 되었던 시대는 옛날이야기가 됐다. 오늘날 가정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나라를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 실현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자식을 많이 낳는게 아니라, 바르고 정의로운 삶을 사는 것이 인류의 삶을 풍성하게 한다.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