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학적 위기, 모든 삶의 체계를 위기로

 

인간의 탐욕과 욕망은 삶의 체계 전체에 생태학적 위기를 불러 왔다. 인간 개인은 물론이고, 가정, 사회, 경제, 종교 등 전반에 걸쳐 생태계가 파괴되고 있다. 치유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특히 인간의 탐욕에 의해 만들어진 환경오염은, 인간이 자기 자신과 자기의 주변세계를 그 속에 몰아넣었고, 몰아넣고 있다. 이는 현대 산업사회의 생태학적 위기이며, 모든 삶의 체계는 혼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자연은 착취하는 인간의 기술과 자연과학에 의해 계속 파괴되었고, 파괴되고 있다. 이러한 추세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삶의 모둔 체계의 생태계는 회복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인간의 자연적 환경은 사회적인 환경과 분리하여 생각 할 수 없다. 생태학적 위기는 우리의 삶 전체, 산림의 사멸로부터 시작하여 노이로제 확대에 이르는, 물의 오염으로부터 시작하여 대도시에 사는 많은 사람들의 허무주의적 삶의 감정에 이르는 모든 체계들의 위기를 말한다.한마디로 자연세계 파괴과정의 원인은 경제적 과정들과 사회적 과정들 속에 있다. 이를 가리켜 정치, 사회, 종교, 경제 등 모든 영역의 생태계가 위기를 맞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가정의 생태계도 만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더 이상 파괴되지 않고, 보전하려면, 인간사회의 경제적 사회적 상황들이 달라져야 한다. 생산을 더 늘리고, 기술을 더 발전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회는 환경파괴를 제한 할 수 없다. 극복 할 수도 없다. 이는 한마디로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도전하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인간의 삶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이런 체계들을 변화시키는 것은 고통스럽고, 고난의 길이다. 또한 오랜 기간에 형성된 문화와 체계를 바꾸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이러한 몸부림 없이 환경문제, 생태학적 위기로부터의 해방을 말하는 것은 말뿐인 것으로 공허하다.

새로운 상황에 대처하고, 위기에 처한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되돌릴 수 없는 사회는 자기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다. 자연파괴를 중지시킬 수도 없다. 그 사회가 초래한 자연세계의 파괴는 오히려 파괴적인 방법으로 그 사회로 되돌아온다. 그 속에서 가치의 상실은 물론이고, 의미의 위기를 초래한다. 환경 위에 지워진 부담은 인구밀도에 비례한다. 이는 정서적인 행동양식과 도덕적인 관습들과, 삶의 확산 등 삶의 체계 전체가 혼란스럽게 된다.

즉 생태학적 위기는 인간의 사회적 위기, 인간사회 가치의 위기, 의미의 위기, 개인적인 위기를 불러온다. 따라서 이러한 위기는 인간사회의 반응도 모호 할 수밖에 없다. 생태학적 위기의 대책들은 오히려 위기를 확대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신종바이러스 감염증과 같은 바이러스가 자기 안에 들어 올 경우, 자기면역의 과정이 시작된다. 자기면역은 일정한 기간 자기를 보호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자기를 파괴한다.

오늘날 강력한 코로나19 델타 변이 바이러스가 계속해서 나타나 인류를 괴롭히는 것을 보면, 그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인간의 탐욕에 의해 만들어진 바이러스도 요술을 부리며, 확대 재생산돼, 인간의 지혜로 해결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을 반증하고도 남는다. 이러한 생태학적 위기를 기술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생태학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래서 자연과학자들은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있는 그대로 보전하고, 관리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기대여 살아야 하고, 후손들이 기대여 살아야 할 곳이기 때문이다.

 

생태학적 위기, 인간의 지배와 소유욕에 의해 자행

창조질서 이탈한 동성애법·건강가정기본법 등 반대 당연

 

자연의 죽음에 무감각해지는 인간

 

분명한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도전한 결과, 바이러스는 계속해서 요술을 부리며, 인간의 삶 전체를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그럼에도 인간은 서서히 진행되는 자연의 죽음에 대하여 무감각해져 가고 있다. 인간의 삶 의지마저도 죽음의 충동을 받고, 자살하는 사람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이런 상황서 고난을 감내 할 수 있는 삶의 체계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가 됐다. 배우려고 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전향 할 수 있다. 또한 자기를 쇄신도 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의 창조신앙과 그 가치는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인간과 신의 관계에 있어 복합적인 평형의 체계들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문화는 발전과 팽창, 정복을 지향하여 설계되었다. 그래서 인간은 힘을 이용해 자연을 정복하고, 이웃을 정복한다. 이웃국가도 정복한다. 그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큰 교회가 힘을 내세워 작은교회를 집어 삼키고, 연합단체도 큰 교회와 큰 교단을 중심으로 뭉치고 운영된다.

작은 교회나, 작은 교단의 목회자는 부자 목회자와 교회가 지원하는 돈 몇 푼에 쉽게 넘어간다. 그리고 이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리화 시킨다. 이단의 돈을 받아 한국교회를 혼란에 빠트리는 인사들도 적지 않다. 그것이 바로 오늘 한국교회이고, 한국교회를 변화시켜야 할 막중한 책임을 가진 언론이이다. 그래서 어느 목사는 한국교회애서 가장 부패한 곳이 언론이고, 목회자라고 거침없이 지적한다.

본지가 10명의 교인들에게 오늘 한국교회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10명중 6명이 목회자가 변해야 한국교회가 변한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목회자와 교인들은 목회자와 언론을 절대로 믿지 않는다. 이 같은 대답은 돈이면 이단도 좋고, 이단과도 결탁하기 때문이다. 돈이 신이 되어버렸다. 하나님 대신 돈으로 대치시켰다. 목회자의 입에서는 돈!!! 돈의 소리가 아무렇지 않게 흘러나온다.

언론은 힘 있는 목사의 돈을 받아 그의 앵무새 역할을 하고 있는 것도 부정 할 수 없다.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는 세상이 되었다. 교인들의 신앙 생태계도 자연스럽게 바뀌고 있다. 이런 상태로는 한국교회가 새로운 나라, 새로운 세상,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 할 수 없다. 이러한 잘못으로 인해 교회와 교인들의 신앙생황에 생태학적 위기가 닥치게 했다.

오늘날 생태학적 위기는 현대사회의 가정, 가족의 구성원까지 위기로 떨어트렸다. 생태학적 위기는 경제적 위기, 도덕적 위기, 문화적 위기, 윤리적 위기, 정치적 위기, 종교적 위기, 경제적 위기, 사회적 위기 등 삶의 체계의 위기라고 말해도 전혀 틀린 말이 아니다. 성서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부부의 연을 맺는 창조적 선물을 인간에게 주었다. 헌데 오늘날 사회는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 간에 사랑하고 동성결혼을 허락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가족도 인정해야 하는 가족제도에 대한 법률개정도 국회에 상정됐다. 그것도 건강가정기본법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다. 동성애는 분명 하나님의 창조질서에서 이탈했다. 한국교회가 신의 질서에서 이탈한 차별금지법과 동성애법, 건강가정기본법 등의 법률개정에 반대하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한국교회가 기술의 발달로 인간의 가치, 삶의 전체에 생태학적 위기가 닥칠 것이라는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동성애·건강가정기본법 창조질서서 이탈

 

생태학적 위기는 경제적, 정치적, 종교적, 윤리·도덕적, 종교적, 환경 등 인간의 삶 전체체계를 흔들어 놓고 있다. 되돌릴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렇게 인간의 삶 전체체계를 위기로 몰아넣은 것이 유다-그리스도의 전통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는 신학자와 자연과학자, 목회자들도 적지 않다.

그리스도 전통은 인간을 땅의 지배자로 만들었다. 힘이 최고인 사회를 만들었다. 중세교회는 권력과 결탁, 세계를 지배하는 종교가 됐다. 그것은 오늘도 만찬가지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하나님이 되려고만 달려들었고, 달려든다. 모두가 신이 되려고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도전, 지구 온난화, 이상기온, 자연재해, 공해, 신종바이러스 감염증, 사막화, 메뚜기떼 출몰 등의 결과를 불러 왔다. 한마디로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세계, 자연세계를 비악령화, 비신격화시켰다.

중세에 등장한 르네상스와 유명론은 새로운 하나님상이 되었다. 성서의 인간중심적인 사상을 모두 가려버렸다. 그리고 하나님을 전지전능하신 분이라고 고백하면서도, 땅 위에 있는 그의 형상인 인간은 그의 신성인 힘과 초능력을 얻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자신이 하나님이 되려고만 했다. 이같은 악은 창조이후 지금까지 멈추지 않고 계속되어 왔다. 모두가 돈에 끌려 다니며, 교회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를 생태학적 위기에 처하게 했다. 이제 세상은 하나님과 진리가 아니다.

힘과 돈이 신성의 가장 고귀한 술어가 되었다. 모두가 성령을 망각했다. 오히려 성령이란 이름으로 범죄하며, 교회와 사회를 혼란으로 몰아넣고 있다. 이제 한국교회는 돈이 있어야 장로도 되고 집사도 된다. 단체장도 되고, 교단장도 된다. 돈이 곧 힘이 되었다. 간난한 사람을 돌보던 교회의 전통은 깨졌다. 그리고 모두가 하나님나라에 혼자 가겠다고 아우성친다. 한마디로 이것은 교회도 생태계 위기를 맞았다는 것을 그대로 증명하고도 남는다.

오늘 현대사회와 교회를 향해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고 말하는 이유이다. 인간은 하나님과 비슷한 힘을 얻기 위해 과학과 기술을 변화시키며, 지배를 받으려고 하지 않고, 지배하려고만 달려든다. 경기도 양주시 한 목사모녀가 식당에서 갑질을 한 것도, 목사의 권위와 권력을 내세운 갑질이었다는데 이유가 없다. 이것은 교회도 생태학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베이컨의 아는 것이 힘이다는 말은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힘을 가진 인간임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자연법칙에 대한 과학적 인식의 목적은 데카르트가 말과 같이 인간을 자연의 주인과 소유자로 만드는데 있다. 자연적인 삶의 방법들을 분석하고, 대상화시키는 방법은 그 체계들을 인간의 의지 아래 복종시키는 방법이다. 인간은 이제 창조의 사귐의 한 지체가 아니라, 사귐에 대하여 자연의 주인과 소유자로서 자신을 대칭시킨다.

따라서 인간은 더 이상 자신을 신체적으로, 자연적으로 동일화시킬 수 없다. 인식과 의지의 유아독존하는 주체가 된다. 과학을 통한 자연의 대상화는 인간을 통한 자연을 착취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오늘날 산업국가의 사회와 자연의 관계는 힘들의 소유와 자연자원의 착취를 통하여 결정된다. 지금까지 자연은 저지되지 않고, 약탈적 관계였다. 인간의 착취는 시간이 흐르면서 회복 할 수 없을 만큼 자라났다.

 

1세계, 개발이란 이름으로 제3세계 예속

 

한마디로 인간의 욕망을 통제 할 수 있는 능력은 자라나지 않았다. 자본주의적인 인간을 통한 인간의 착취는 신자유주의주의 경제체제를 견고하게 만들었고, 그리스도교는 자유라는 이름아래 이웃국가의 경제적 침략은 물론이고, 자연적 침략 이념침략을 노골화했다. “인간을 통한 인간의 착취를 노골화했다. 공산사회주의나, 자본주의의 자연계 파괴는 도긴개긴이다.

자연이 사회주의의 생산 증가로 파괴되든, 자본주의의 팽창으로 파괴되든 국가의 이념과는 전혀 관계없이 생태학적 위기를 불어온 것에 대해 누구도 부인 할 수 없다. 현대의 과학기술의 발전은 자연을 파괴하는 것 중에 가장 큰 괴물이다. 이로 인해 일어나는 결과는 하나님의 피조물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다는데 안타깝다.

오늘 세계 곳곳에서 창궐하고 있는 신종바이러스 감염증만 보더라도, 더 강력한 델타바이스가 나타나 언제 피조물들이 신종바이러스 감염증으로부터 해방될지 불투명한 상황에 봉착했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자연을 지키기 위해 코로나19혁명을 일으켰다. 이와 함께 지구는 온난화로 인해 신의 질서에 균열이 생기고, 메뚜기 떼가 출몰하고, 이상기온으로 인해 지구 곳곳에서 자연재해가 발생하고 있다. 심지어 인간의 먹거리도 조작한다. 한마디로 우리가 통제 할 수 없는 성장의 과정이 어디에서나 나타나고 있다는 얘기다.

인구의 증가, 공업의 성장, 환경오염의 악화, 에너지 소비의 팽창, 자극의 범람의 만연, 인간의 영적인 불안정 증대, 이 과정들은 서로 의존하고 있다. 서로를 가족화 시키고 있다. 이제 진보라는 말은 더 이상 희망의 표현이 아니다. 공업국가 사람들이 저주받은 것으로 느끼는 운명이다. 1세계 국가들이 오랜 역사를 지닌 문화국가를 저개발국’, ‘개발도상국으로 판단하는 것은 자신의 지배권에 예속시키겠다는 의도가 짙게 깔려 있다.

우리는 1세계에 선한 것을 기대 할 수 없다. 미국과 중국, 러시아, 유럽 국가들을 보면 그것은 극명하게 드러난다. 우리는 이들 나라를 참 나쁜 나라라고 말한다. 그렇다 대한민국 국민에게 있어 일본은 나쁜 나라이다. 일본은 36년 동안 대한민국을 침략, 온갖 착취 등을 통해 피해를 준 것에 대해 반성 한마디 없이, 대한민국을 향해 경제보복을 단행했다. 오히려 일본은 대한민국에 많은 은혜를 입혔다고 생떼를 부린다.

그리고 후쿠시마 원전 쓰레기를 바다에 버리겠다고 결정했다. 잘못된 것들은 모두 대한민국과 연결시킨다. 대한민국 국민은 일본의 경제보복에 맞서 일본상품 불매운동을 벌였다. 그 결과 대한민국은 불화수소 등을 국내에서 생산하는 놀라운 기적을 이루었다. 분명 일본은 일본의 아사이신문이 밝혔듯이 후진국이다. 코로나19에 대응하는 것만 보아도 일본을 보건적으로 깨끗한 나라라고 볼 수 없다.

선교초기 영미선교사들은 일본을 보건적으로 깨끗한 나라라고 극찬했다. 이런 나라가 원전 쓰레기를 바다에 버려, 피조물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이제 일본은 경제적으로 대한민국을 따라올 수 없는 나라가 됐다. 이런 나라를 극찬하는 대한민국의 정치인, 경제인, 학자, 언론인들을 보면 참담하다. 여기에 대해 한국교회는 자유롭지 못하다. 모두가 일제의 잔재인 개발주의 신앙에 빠져, 예수를 믿으면, 모든 것이 잘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개발주의가 얼마나 자연을 망가트렸는가를 생각해 보라. 국민 모두가 개발주의의 망령에 빠져 있지 않은가. 인간 모두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함에도, 그러한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인간은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세계 앞에 낮아져야 한다. 인간이 신이 되려고 하는 한,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고, 소유주가 되는 한,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하나님과 인간은 사귐의 관계를 유지 할 수 없다. 새로운 나라, 새로운 세상, 하나님나라를 기대 할 수 없다. 모두가 생태학적 위기, 자연의 위기, 인간의 위기를 극복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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