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법정신서 이탈한 교회

 

7월은 법의 달이다. 법은 사람을 위해서 있다. 신구약성서에 나타난 법도 가난한 사람, 소외된 사람, 떠돌이, 과부, 어린이 등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데 있다. 예수님은 안식일법과 정결법이 안식일을 지킬 수 없는 사람을 위해서 있다고 했다. 헌데 오늘 한국교회 안에는 신구약성서의 법정신을 지키는 성직자와 교인들을 찾아보기가 힘들다는 지적의 목소리가 높다. 그것은 많은 교회가 사회적 약자를 돌보기보다는 부자들을 위한 종교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칸트는 양심은 마음의 법정이다고 했다. 그리스도인들이 신구약성서의 법정신서 이탈해, “양심이 마비되었다는 말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는 아니다. 오늘 교회의 지도자들은 맘몬을 숭상하며, 십자가탑을 높이는데 경쟁을 벌이고 있다. 한국교회는 신약성서의 정결법과 안식일법을 지킬 수 없는 하루 벌어 하루를 먹고사는 사람들을 거부한다. 또한 구약성서의 법정신인 가난한자, 소외된자, 떠돌이, 과부, 어린이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해서 일하지 않는다.

모든 교회가 혼자만 살겠다고 몸부림친다. 그리스도인들도 혼자만 하나님나라(구원)에 가겠다고 아우성친다. 그래서 성서는 신구약성서의 법정신에서 이탈한 목회자와 교인들을 향해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라고 한다. 오죽했으면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전 대표회장인 전광훈 목사가 종로5가를 걸어 다니는 목회자와 장로들을 향해 걸어 다니는 시체라고 말했겠는가.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이 주신 인간이 누려야 할 권리를 스스로 박탈했기 때문에 이 같은 말을 듣는 것이 아닌가.

인권운동과 민주화운동, 그리고 독립운동과 구민운동의 중심적이었던 종로5가는 다윗건물(기독연합회관)이 들어서면서, 이같은 모습은 없고, 다툼과 분열의 현장이 되었다. 종로5가를 걸어다는 목사와 장로들은 자신을 향해 걸어 다니는 시체라고 말을 해도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아멘으로 화답한다. 그래서 어느 목사는 아멘 하지 말라고 했다.

종로5가의 목사와 장로들은 동역자를 죽이고, 살려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이것이 성서에 나타난 법정신이며, 양심적인가고 교인들은 묻는다. 선거철만 되면 후보자에게 금품을 요구하는 것이 합리적이며, 이성적인 것은 분명 아니다. 북한 김일성-감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세습에 대해서는 핏발을 세워 비난하면서, 담임목사직을 세습하는 한국교회 목회자는 이성적인가. 교인들에게 순종만을 강요하며, 성서의 민주주의로 가장하는 오늘 교회는 합리적인가. 마음의 법정인 양심에 물어 보라.

담임목사 세습이 일반화되고, 이를 성서적이라고 말하는 한국교회는 북한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진 세습에 대해서 비판 할 자격이 없다. 담임목사 세습은 목회자의 파쇼적인 교회운영철학이 불러 왔다. 맘몬도 여기에 한 몫을 했다. 오늘 한국교회는 학식과 믿음에 좋아서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를 잘 만나야 큰 교회 담임목사가 될 수 있다. 돈과 정치력이 있어야 큰 교회에 부임 할 수 있다. 장로, 안수집사, 권사도 돈이 있어야 피택을 받는다.

 

하나님과의 관계 파괴, 강자가 약자의 것 빼앗는 관계 설정

한마디로 성서의 법정신 하나님 앞서 이웃과 더불어로 요약

 

돌로 만든 떡을 먹고 굳어져버린 마음

 

믿음과 신앙, 인간의 됨됨이로 교회의 직분을 결정하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오늘 개신교는 이 최고인 종교가 됐다. 예수님이 그렇게도 실어하시던 돈이 있어야 교회의 직분도 맡고 행세 할 수 있다. 돈이 신분을 결정하는 교회로 변질됐다. 예수님은 돌로 만든 떡을 거부하셨다. 바벨탑(권력)도 거부하셨다. 그런데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돌로 만든 떡을 먹고, 마음이 굳어져 인정머리라고는 하나도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이웃의 아픔에 함께 아파 할 줄을 모른다. 신구약성서의 중심사상인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의 고통과 해방을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죄인이다. 목회자들은 무조건 교인들에게 순종만을 강요한다. 교주화되어 가는 한국의 일부교회가 바로이단이며, 예수님을 팔아 장사하는 사이비다. 오늘 한국교회의 문제는 이단의 문제가 아니라, 사이비가 문제라는 말까지 나온다.

여기를 봐도 삯꾼, 저기를 봐도 삯군, 사이비가 판을 친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엇이 있다고, 속옷까지 빼앗아 호화로운 교회당을 건축하고, 그 곳에 신을 가두어 버린다. 바벨탑 아니 교회당에 갇힌 신은 아사직전에 놓여 있다. 그런데도 목회자는 다른 종교보다 우월하고, 양심적이라고 말한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목회자와 교인들을 향해 칸트는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라고 했다.

칸트는 분명 신구약성서의 법정신에서 이탈한 교회의 성직자와 교인을 보고, 양심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라고 했을 것이다. 칸트의 말대로 양심은 마음의 법정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양심이 필요하지 않다. 믿음과 신앙, 경륜도 필요하지 않다. 돈만이 필요하다. 돈이 있어야 양반된다. 성서는 분명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의 고통과 해방을 주제로 삼는 경전이다. 여기에서 이탈하면 그리스도인라고 말 할 수 없다.

한국교회는 일본제국주의 아래서 정교분리를 주창하며, 민족의 문화와 역사를 몰각시켰다. 오늘 한국교회가 역사를 왜곡하며, 고난당하는 민족과 함께했다고 말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렇게 교육을 받은 한국의 어느 목사는 만주벌판서 항일무장투쟁을 벌인 독립투사를 부정한다. 원자폭탄 2방이 대한민국의 해방을 가져다가 주었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이는 한국교회를 지나간 역사를 잃어버리고, 미래를 준비하지 않는 교회의 모습을 드러낸다.

일본식민지 아래서 일본군에게 시궁창만도 못한 대접을 받은 이 땅의 소녀들, 일본군의 총알받이지가 되었던 이 땅의 청년들, 일본에 노무자로 끌려가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던 우리의 부모형제를 조금이라도 생각했다면, 성서의 법정신을 올바로 교육을 받았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이성을 잃어버린 비양심적인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마디로 이들이 바로 천박한 목사이며, 그리스도의 길을 걷는다고 말하는 하나님의 종이다.

성서의 법정신에서 이탈한 한국교회의 일부 목회자와 교인들은 하나님나라가 하늘에서 이루진 것 같이 땅에서 이루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이 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은 예수님의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밥을 먹기 위해서 목회자의 길을 걷는다고 해야 옳다. 그것은 목회자들이 맘몬과 바벨을 숭상하는 삯군 목사로 변질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워 장사하는 장사꾼이다.

 

교주화 되어가는 한국교회

 

삯꾼 목사들의 입에서 예수님의 샬롬(평화)이 나오기를 기대했다면, 큰 오산이다. 이들은 예수님의 샬롬 대신 로마팍스(힘에 의한 평화)를 노래한다. 이들은 자신의 양심을 스스로 마비시켰다. 이들에게서 합리적이며, 이성적인 모습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근본주의에 갇혀 이웃과 마음을 주고받을 수 없는 가짜 목사이며, 가짜 그리스도인이다. 이들은 보수 보수를 외치다가 보수주의에 떨어졌다.

이들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복음(기쁜소식)을 선포하고, 이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인 예수님의 길, 십자가의 길에서 이탈했다. 교인들은 예수님을 보고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 목회자를 보고서 교회를 다닌다. 이는 오늘 일부 교회의 목회자가 교주화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렇다보니 다름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목회자의 직함이 권력이 되었다.

이를 둘러싼 교회의 분쟁은 끝을 보이지 않고 있다. 최삼경 목사가 어느 목사의 출판기념회에서 지적한 설교는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오늘 한국교회는 13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그런데 예수님의 모습은 그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를 않는다.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목회자의 교주적인 아집의 죄는 교회와 민족의 죄가 되었다. 신학교, 연합기관, 담임목사의 세습을 꿰뚫어보면, 비도덕적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세월이 흐르면서 성숙해져야 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야 할 목사는 청빈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형제와 교회, 그리고 민족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들을 위해서 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의 일부 목회자가 이단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단집단의 돈으로 자신의 배를 채우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들이 사이비다. 오늘 한국교회는 결코 이단의 문제가 아니다. 사이비의 문제이다. 이단은 나름 신념과 신앙이 있다. 이단은 피도, 눈물도, 사랑도, 용서도 있다.

하지만 교주화 되어가는 한국교회의 일부 사이비 목회자에게서는 이런 것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다는데 안타깝다. 성서의 법정신은 한마디로 하나님 앞에서 이웃과 더불어로 요약 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웃과 주고받으면서 사는 참삶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 대부분은 이웃과 정을 나누며,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고, 강자가 약자의 것을 빼앗는 관계가 설정돼 있다.

이러한 현상은 이스라엘 역사가 분명하게 말해준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 소유가 생기고, 왕권이 수립되어 권력이 인간관계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구약의 법정신은 철저하게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그것은 오늘 현대국가의 법도 마찬가지이다. 구약성서에는 3개의 법전이 나온다. 계약법전(출애굽기), 신명기법전(신명기), 성법전(레위기)이 바로 그것이다. 3개의 법전 모두 상황의 차이는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부자된 교회 하나님을 잊지 말자

 

하나님은 경제적 약자를 보호하시기 위해 그가 나에게 호소하면 자애로운 나는 그 호소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의 아우성 소리를 듣고, 이들의 삶속에서 역사하셨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가 낸 소송사건에서 그의 권리를 꺾지 말라고 했다. 신명기법전도 다른 양상을 보이기는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법령이다. 레위기에는 토지 공개념에 대한 지적도 있다.

 

땅은 내것이요. 너희는 식객에 불과하다”(레위기 2523)

 

이 말씀은 희년의 실현을 뒷받침한다. 이 말씀은 사회개혁의 기초를 놓았다. 예수님은 안식일법정결법을 둘러싸고 바리새파와 크게 충돌했다. 당시 바리새파는 국민운동을 일으키기 위해서 구약을 동원했다. 유대교에서의 하나님의 법은 모세 오경에 국한되어 있다. 이것은 정결법과 안식일 법으로 그대로 나타난다. 이들이 내세운 법은 가난한 자와 병든 자, 소외된 자, 떠돌이, 과부 등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법대로 살 수 없는 계층에게 역기능을 가져다가 주었다. 정결법은 원래 사제계층에게 국한된 것이었다. 이를 일반인에게 확대시켜 사회적 약자들을 여기에 옭아맸다. 한마디로 사회전반에 파급돼 가난한 자와 병든 자, 그리고 불결한 직업을 가진 자들을 더욱더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옷 한 벌로 살아야만 하는 사람, 항상 노동을 해서 살아야만 하는 사람, 문둥병자, 정신병자들에게 있어서 정결법은 지킬 수 없는 법이었다.

그것은 안식일법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가면서, 밀 이삭을 잘라 먹었다. 저들이 배고파하는 현실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이것은 또 못가진 자들의 구체적인 삶의 자리였다. 이곳은 예수님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이기도 하다. 앞서 밝혔듯이 구약의 법정신은 한마디로 사람이면, 누구나 배고픈 자를 돕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리새파 사람들은 안식일 날 배고픈 사람들이 일을 한 것이 불법이라는 것이다.

또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든 사람을 고쳐 준 것도 잘못이라고 말한다. 예수님의 입장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마가복음 227)고 분명하게 말한다. 예수님은 법이 사람의 권리, 특히 약자나, 가난한 자의 권리를 억누르면서, 사랑할 수 있는 자유조차 가로막을 때 사정없이 파괴했다. 법은 사람을 위해서 있다는 것을 교육하고 있다.

분명 신구약성서의 법은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있다. 그런데 바리새파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을 변질시켜 버렸다. 하나님은 법을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이 법을 지키게 하기 위해서 율법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래서 법을 지키지 않는 정치인, 목회자, 가진 자들에게는 율법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공관복음서는 예수님의 적대자로 바리새파를 내세웠다. 바리새파는 구약을 동원해서 국민운동을 일으켰다.

이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정신운동을 위하여 예언의 글과 구약의 고전, 그리고 랍비들의 성서해석을 원용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법을 국민운동의 규율에 적용했다. 이는 결국 법이 담고 있는 본래의 뜻을 변질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오늘 한국의 일부교회 역시 바리새파들이 주장한 안식일법과 정결법을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는데 참담하다. 바리새인과 헤롯은 하나님나라와 세상을 철저하게 분리시켰다.

이들은 하나님나라와 세상나라의 중간에서 양다리를 걸치고 살았다. 오늘 한국교회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닌지. 선교초기부터 한국교회 역시 하나님나라와 세상권력과의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고, 어정쩡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일제하, 군사정권하에서 일부교회가 권력을 이용하고, 권력에 얼마나 이용당했는가를 생각해 보면, 그것은 분명해진다. 한마디로 불의에 항거하며, 복음을 위해서 세워진 교회답지 못했다.

한국교회를 책임지고 있는 일부 목회자는 예수님의 법정신에서 크게 이탈했다. 이에 대해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어떤 말로 변명할까(?) 하나님의 법은 국가 안에서 눌린 자, 가난한 자, 떠돌이, 과부, 어린이,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보호하는데 큰 의미가 있다. 예수님은 안식일법과 정결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서, 그들이 있는 역사의 현장에서 활동하셨다. 이들이 있는 곳이 예수님의 삶의 현장이었다.

전국 곳곳에 높이 치솟은 화려한 교회의 첨탑, 세상에 길들여져 하나님나라의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질서를 위해서 있지 않다. 이 첨탑은 이제 종교권력이 되었다. 이 첨탑의 높이와 크기에 따라 목회자의 권위, 아니 교회의 권력이 결정된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인은 겸손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잊었다. 교회는 건강한 공동체를 위해서 일해야 한다. 그리고 부자된 교회는 하나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신구약성서는 분명하게 교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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