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문화강국

오늘 대한민국은 선진국의 반열에 들어섰다고 국민 모두는 매우 고무적인 평가를 내린다. 하지만 생명의 가치를 잃어버린 대한민국이 과연 선진국이냐(?)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도 부인 할 수 없다. 전국 방방곡곡에서는 비정규직 노동자와 택배노동자, 외국인노동자, 일일노동자들의 한숨소리만 들린다. 아침에 살아서 일하러 나간 노동자가 주검으로 돌아오는 일이 매일같이 일어나고 있다.

또한 부모에 의해 학대당하는 아이들, 양부 또는 양모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아이들의 한의 소리가 하늘에 사무친다. 신종바이러스감염증으로 곤궁한 삶을 살아가는 자영업자들의 눈물, 구조조정으로 직장에서 쫓겨난 노동자들의 신음소리는 끝을 보이지 않는다. 모두가 경제적 사고에 종속돼 혼자만 살겠다고 몸부림친 결과이다. 그러면서도 대한민국 국민은 선진국의 반열에 들어갔다고 자화자찬에 빠졌다.

혹여 대한민국 국민은 경제력(부력)과 군사력(강력)으로 선진국이 되었다고 착각 속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분명한 것은 경제력, 군사력 못지않게 윤리적, 도덕적, 문화적으로 앞서가야 선진국이라고 말 할 수 있다. 문화적으로 선진국이어야만 세계의 문화를 선도 할 수 있다. 대한민국은 일본이나, 유럽의 강대국처럼 최소한 이웃나라의 것을 빼앗아 부유한 나라가 되지는 않았다.

우리 스스로 우리의 문화와 도덕, 윤리를 지키며, 모든 분야를 발전시켜 오늘에 이르렀다. 그것은 경제력도, 군사력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스스로 헤쳐 나왔다. 그런데 갑자기 비쳐진 빛 때문에 국민 모두가 맹인이 된 것은 아닌지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인간들의 목소리는 커질 수밖에 없고, 갈수록 커지고 있다. 물질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모두가 잊고 있다.

또한 내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군대도 가보지 않은 후보는 국가주의에 빠져 안보타령을 하기에 바쁘다. 이것은 국민을 하찮게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는 물질이 없어도, 마음이 평화로웠던 것은 마음에 성령이 충만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 평화는 자신의 희생을 통해 얻은 평화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참평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하며, 행동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 일부 교회는 예수그리스도가 없는 평화, ‘로마팍스를 말한다. 한마디로 성령을 내세운 참평화(샬롬), 힘의 의한 평화(로마팍스)로 둔갑했다. 원수된 세상, 하나님과 화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웃과 화해해야 한다. 이웃나라와 화해해야 한다. 화해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 우리는 참평화를 이루기 위해 예수그리스도에게 복종해야 한다. 인간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피조물이다.

 

문화의 힘, 인류 모두를 행복하게 만든다
자신 십자가 지고 이웃의 고난에 참여하자

산자의 땅, 죽은자의 땅

오늘 인간사회는 너를 죽여야 내가 사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이것은 생명의 가치와 생명의 존엄성을 잃어버린 결과이다. 그래서 너의 생명을 존중하고, 생명의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생명문화, 그것도 인간 스스로 문화를 선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희생을 통한 생명문화, 이것은 인간사회를 평화로 안내한다. 백범 김구 선생은 경제도(부력), 군사(강력)도 아닌 문화강국, 그것도 우리나가 선도하는 문화강국을 꿈꾸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충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 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김구 선생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소원했다. 또한 김구 선생은 진정한 세계 문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 세계에서 실현되기를 갈망했다. 김구 선생의 문화강국론은 무엇보다 생명의 존엄과 소중함을 근원으로 삼고 있으며, 모방이 아닌 창의력에 의한 새로운 문화를 갈망했다는데 큰 의미를 갖는다.

70년 전 김구 선생이 소원한 문화강국론은 오늘 문화적으로 이웃나라, 일본이나, 중국, 서양문화에 뒤지지 않는 대한민국의 창조적 새로운 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데 높은 평가를 받는다. 몇 년 전 사이의 강남스타일은 전 세계를, 드라마 별 그대가 중국 본토를 뒤 흔들었다. 워싱턴 포스트는 중국의 지도자들이 전인대회에서 왜 중국은 이런 드라마를 만들지 못하는지 한탄을 했다는 기사를 실었다. 다시 한 번 참 지도자의 깊은 통찰력을 느끼게 한다.

식민지세력으로 대한민국에 들어와 국민을 괴롭혔던 일본의 지도자들과는 차별화되는 참지도자의 모습이다. 하루하루를 연명하기도 힘든 일본식민지 아래서 군사강국, 경제강국이 아니라, 생명의 가치를 아는 문화강국이라니, 대부분의 국민들은 김구 선생의 말뜻을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예수님 당시 군대귀신에 의존해 있던 이스라엘 민족은 특히 기득권자들은 예수님을 향해 이 땅에서 빨리 떠나 달라고 했다.

한마디로 당시 이스라엘은 산자의 땅이 아니었다. 죽은 자의 땅이었다. 오늘 대한민국은 내년 3월 제20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예비후보들이 저마다 공약을 내놓고 있다. 이들의 입에서는 번영을 위한 노래, 경제강국과 군사강국을 위한 공약을 하루가 멀다고 발표한다. 이들의 입에서는 자신의 희생을 통한 생명과 화해를 위한 노랫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 언론 역시 종합부동산세 등을 보도하며, 마치 전 국민이 세금폭탄을 받는 것처럼 보도한다.

한마디로 정치인이나, 언론이나 모두 60만 부자들을 위한 말 폭탄, 보도를 쏟아 내고 있다.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 예수님의 삶의 현장서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떠한 연민의 정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부자들을 위한 기도소리, 언론보도, 부자감세 운운하는 정치인,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협상하는 의료인, 최저봉금을 노동자에 비교해서 몇 배의 임금을 받으면서도, 그것이 모자라다고 아우성치는 귀족노조, 이들은 코로나정국서 전면파업을 하겠다, 국민을 협박한다.

 

정치인·판검사·귀족노조만 보인다

대한민국 국회, 정치인들은 코로나19로 자영업자들이 못살겠다고 아우성치는데, 일용직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매일 죽어가는 데, 강도만난 서민들이 죽음에 이르렀는데, 참생명의 문화를 상실한 청소년들이 힘없는 어르신들을 조롱을 당하는데, 성폭력과 직장 괴롭힘으로 힘없는 국민들이 살해당하고 있는데도 나몰라라 하는 모습은 한마디로 안타깝다.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협상하는 모습은, 생명도, 의술도, 자신의 권리주장 등 모두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의 경제적 사고에 종속시켜 버린 결과이다.

모두가 경제적 사고에 종속돼 이웃의 아픔, 이웃의 고난에 동참하지 못하고 있다. 노조라는 이름아래 자신을 지키려고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웃의 아픔에 함께해야 한다는 것은 성서의 진리이며, 성숙한 인간의 모습이다. 오늘 대한민국의 노조 역시, 사업주와 마찬가지로 고난당하는 이웃의 아픔을 몰각했다. 분명한 것은 정치인들이 정쟁만 일삼으며, 생명을 위한 법을 만들지 못하고 있는 사이, 힘없는 국민들은 고난당할 수밖에 없다. 이들은 국민의 혈세를 축내는 버러지만도 못한 인간이다.

이제 대한민국 국회는 소외된 자, 더 이상 고난당하는 자들을 대변하는 국회가 아니다. 이런 나라는 산자의 땅이 아니다. 죽은자의 땅이다. 다국적 기업들은 노동자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보니 제3세계 국가의 노동자들은 죽으면서도, 쓰러지면서도 일하며, 다국적기업을 살찌워 주고 있다. 생명의 소중함도, 생명문화도, 종교도, 국회도, 대기업도, 모두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인 경제적 사고에 종속되어 버렸다.

모두가 경제적 사고에 갇혀 이웃의 고난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만 낸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귀족노조와 정치인, 언론인 판검사만 보인다고 말한다. 이들은 60만명의 부자들을 위해서 일하는 모리배이다. 신상득 시인은 하늘이시여라는 제목의 시에 하늘을 향해 아우성치는 국민들의 목소리를 그대로 담았다. 또한 경제적 사고에 종속되어 버린 이 땅의 그리스도인, 교회, 정치인, 귀족노조, 가진 자를 향해 회개를 촉구했다.

 

군대·경제귀신 걸린 인간의 최후(?)

하늘이시여/중고 아파트 샀다가 가격 세 배 올랐다고/당신께 감사기도 드리는 자/당신은 그 기도가 가당하게 들리십니까?//아파트 판자는 억울함이 가슴을 후비는데/하물며 괴로워하다가 생명줄 놓기까지 하는데 /당신은 그 기도 소리가 기쁘게 들리십니까?//아파트 값 세 배 뛰어 큰돈 번 자를 향해/당신이 내린 축복이라 설교하는 자/이 자의 허튼 목소리가 당신의 음성입니까?//아파트 판자에게 미안스러워 하고/그 미안함에 일부 장학금이라도 내놓는 자//이런 뜻이 당신이 일깨우는 진정한 사랑 아닙니까?//주식 거래로 큰돈 번 자의 감사기도/축구 경기에서 골 넣은 자의 감사기도/당신은 이들의 기도가 참으로 갸륵하십니까?//주식 잃고 골 먹은 자는/그 아픔과 좌절에 휘청거리는데/당신은 저들의 기도가 과연 흐뭇하십니까?//하늘이시여/예수 믿고 천국 가겠다는 자/그리해야 한다고 소리치는 자/당신은 이들의 뜻이 썩 좋아 나무랄 데 없습니까?//가족 이웃을 불구덩이에 놓아두고/믿는 자만이 홀로 걸어가는 곳/그곳이 당신이 만든 눈물 없는 천국입니까?//사랑하는 남편 아내 자식 팽개치고/믿는 자만이 홀로 영원토록 머무는 곳/그곳이 당신이 만든 기쁨 넘치는 천국입니까?//자신은 천국 가면서 지옥 가는 남편 향해/믿으랄 때 믿었어야 한다고 힐책하는 아내//그런 자가 가는 곳이 당신이 만든 천국입니까?//믿지 않아 지옥 가는 남편 대신해/지옥행 자처하며 남편 천국 발원하는 아내/천국은 그런 자들에게 열려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어둠을 사랑하는 것은 뒷전이고/당신을 믿어 천국을 가려고 골몰하는 마음/천국은 그런 무지막지한 욕심쟁이에게 닫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하늘이시여/감사에 앞서 누군가 아픈 사람 없는지 돌아보게 하시고/당신을 믿는다는 외침보다 사람을 사랑하게 하시고/자기구원보다 이웃구원에 목말라 하는 지혜 품게 하시어//이제는 우리가/당신 닮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게/가장 간절한 기도가 되게 하소서/가장 버젓한 용기가 되게 하소서/가장 훤칠한 긍지가 되게 하소서

하늘을 향한 이 기도는 얼마나 처절한가. 오늘 한국교회는 경제적사고에 종속된 나머지 설교시간 마다 악마의 금전, !!! 돈만을 외친다. 교회당 안에 십자가는 없다. 교인들 역시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는다. 모두가 지상의 삶은 어찌 되었건 예수 믿고 하늘나라 가겠다고 외친다. 심지어 부자된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한다. 목회자의 입에서는 큰돈을 번 자의 머리에 손을 얻고 축복해 준다.

이제 교회는 이들만의 교회가 되었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비집고 들어갈 공간이 없다. 모두가 경제귀신에 걸려 맘몬을 노래한다. 하나님의 참사랑을 찾아 볼 수 없다. 모두가 경제적 사고에 종속되어 있는 한 예수님시대와 마찬가지로 경제귀신 군대귀신은 절대로 물러나지 않는다. 교회는 죽은자의 교회가 되었다. 생명력도 잃어버렸다. 생명의 가치보다 돈의 가치를 우선한다. 이제라도 교회는 소외되고 가난한 교인들이 들어 올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교회가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의 바리새파, 율법학자, 유대인들은 군대문화와 경제문화에 길들여져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삶의 현장에서 복음을 선포하고,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인 예수 그리스도를 몰아내려고 했다. 그렇다보니 이스라엘 민족은 나라 잃는 백성으로 유리방황 할 수밖에 없었다. 군대귀신, 경제귀신에 걸린 인간은 바다에 빠져 몰살 당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성서는 분명하게 교훈하고 있다.

경제적 사고에 기독교를 종속시켜 버린 한국교회는 교인들과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지 못하고 있다. 하나 남은 속옷까지 빼앗아 버린다. 자신의 욕심과 탐욕을 버리지 않는 한, 우리는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대한민국은 경제력과 군사력 때문에 선진국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대한민국은 김구 선생이 그렇게도 원했던 문화의 힘 때문에 강대국이 되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웃의 아픔에 참여하는 교회

대한민국은 인간을 먼저 생각하는 감각, 이웃의 아픔을 먼저 생각하는 감성문화를 가졌기 때문에 선진국의 반열에 섰다. 자기희생을 통해 원수를 친구로 만들었다. 교회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참평화와 화해를 위해서 세워졌다. 따라서 교회의 그리스도의 몸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성령 충만해야 한다. 그의 십자가를 통해 이 땅에서 참평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리고 참평화를 위해 자기를 희생해야 한다.

대한민국이 아프간서 미라클 작전을 성공 시킬 수 있었던 것은 대한민국이 이웃의 생명을 먼저 생각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일본은 죽음을 먼저 생각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일본은 자신만을 생각했다. 오늘날 일본의 형태를 보면 그것은 극명해진다. 36년 동안 대한민국을 침략하고서도, 그것에 대한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물론,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소녀들, 노무자로 끌려간 이 땅의 청년들에 대해서 사과 한마디 없었다는 사실.

이들에게 선한 것을 기대한 대한민국 국민이 잘못이다. 천황이라는 우상을 섬기는 일본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다는 것을 잊지 말자. 생명의 존엄성을 잃어버린 일본, 물질에 사로잡혀 과거에 대한 잘못을 반성하지 않는 일본은 망 할 수밖에 없고, 망해 가고 있다. 이런 일본을 향해 아베님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하는 교인이 있는 한 대한민국은 선진국이 될 수 없다. 그것도 일본제국주의 아래서 시궁창보다도 못한 삶을 산 이 땅의 소녀 앞에서 이런 만행을 저질렀다는데 참담하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생명의 존엄성을 상실한 일본은 아프간서 한사람도 구하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일본과 대한민국의 차이이다. 일본을 극찬하며, 일본으로부터 은혜를 입었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이 땅의 정치인, 종교인, 언론인, 학자들은 생명을 존엄성을 잃어버렸다. 이들은 예수님 당시 귀신에 걸려 바다에 머리를 박고 몰살당한 돼지처럼, 경제귀신, 군대귀신에 걸린 사람으로 바다에 머리를 박고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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