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득권 세력으로 변질된 교회

내년 3월에 실시하는 제21대 대통령선거 6개월을 앞두고, 대통령 후보를 결정하는 투표가 각 당에서 한창 진행 중이다. 더불어민주당은 이미 후보를 이재명 경기도지사로 결정했다. 문제는 각 후보들에게 국민의 삶의 질을 높여주겠다는 정책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데 안타깝다. 모두가 상대의 약점을 물고 늘어지기 일쑤다. 검찰의 여권인사 고발사주, 성남 대장동 개발을 둘러싼 논란이 끝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 두 사건이 대통령선거정국을 집어 삼키고 있다. 같은 당 안에서도 서로 물고 뜯으며, 적대적 관계가 형성되고 있다. 국민의 입장에서 각 당 후보들의 면모를 보면,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다. 국민들은 후보 모두가 대통령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주요후보들의 국민 혐오는 모두 50%를 넘는다는 여론. 이들은 또 이념갈등을 부추기며, 국민을 편 가르기의 중심에 서 있다, 지역감정도 부추긴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다.

너를 죽여야만 내가 후보가 될 수 있다. 심지어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들에게 과연 국민을 섬기며, 미래 대한민국을 맡길 수 있겠느냐(?)고 국민은 묻고 있다. 이들에게서 국민을 섬기고, 남북한 민족의 화해와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 일 할 소명은 가지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은 모두 소명보다 국가고시에 응시한 응시생에 불과하다.

그것은 모두가 기득권세력으로 변질돼, 기득권 세력만 위해서 일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앞날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은 누가 대통령이 되도, 이념갈등, 세대갈등, 보혁갈등, 노사갈등, 지역갈등 등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 할 수 없다고 잘라 말하는 이유이다. 그러면서도 이들의 입에서는 국민통합을 외친다. 여야 후보 모두는 국민들의 생명과 삶의 질 보다, 기득권 세력으로 권력을 손에 쥐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후보마다 상대후보의 약점을 물고 늘어져 상처를 입히기 일쑤다. 성남시 대장동 사건만 보더라도, 정치인, 법조인, 언론인 등이 깊숙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서로 책임을 회피하며, 뒤집어씌우기에 바쁘다. 언론은 이들의 잘못을 매일 보도하고 있다. 하지만 모두가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지 않는다. 잘못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너를 죽이기에 바쁘다. 이들의 돌로 만든 떡을 먹고 마음이 굳어져 버렸다.

산업현장서 노동자가 매일 죽어나가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한다. 혹 잘못을 지적하면, ‘명예훼손등을 운운하며 법적대응을 강조한다. 법적 고발사건도 끊이지를 않는다. 50억원의 퇴직금을 받고서도,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수 년 동안 근무하고 퇴직한 퇴직금과 산업재해 보상금이라고 변명한다. 보통사람의 눈높이에 전혀 맞지 않는다. 이들 기득권세력에게서 국민은 선한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재물은 축적해도, 생명의 양식은 축적하지 못한다

희망을 잃어버린 정치권을 향해 예언자의 목소리를

 

생명의 양식보다 물질에 눈먼 세상

 

정치인, 언론인, 법조인 모두가 돌로 만은 떡을 먹고 마음이 굳어져 버렸다. 모두가 너와 나, 그리고 그에게 생명수가 흐르지 않아 마음이 강퍅해 졌다. 인정이라고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마음의 법정인 양심도 마비됐다. 너를 죽여야만 내가 사는 세상이 됐다. 물은 흐르지 않고 웅덩이에 그대로 고여 있으면, 물이 섞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은 정치인들에 의해, 아니 기득권세력에 의해 썩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생명을 이어주는 생명수가 전혀 흐르지 않고 있다. 돌로 만든 떡을 먹고 마음이 굳어져 국민들에게 전혀 감동을 주지 못한다. 그렇다 보니 모두가 기득권 세력으로 변질돼 자신의 잘못을 감추기에 바쁘다. 무게의 중심이 기울어져 침몰하기 직전에 있다. 화천대유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기득권세력은 가난한 원주민들의 재물을 빼앗아 자신의 욕심을 채웠다. 원주민들의 탄식소리가 하늘에 사무친다.

청년 한사람이 130년 동안 모아야 할 돈을 뇌물로 받고서도,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보통사람이 생각 할 수 없는 돈을 공로금, 퇴직금, 산재보험금이라고 말한다. 타락한 정치인들은 뇌물로 적게는 2억원, 많게는 20억원, 50억원을 받고서도, 오리발을 내민다. 심지어 200억원을 뇌물로 주었다는 말도 나온다. 이럴 때 이 땅에도 구약시대의 예언자가 절실하다.

헌데 한국교회의 정치꾼 목사들은 여기에 부화뇌동하며, 정치에 깊숙이 개입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데 안타깝다. 정치꾼 목사는 부정한 돈의 일부를 떼어 헌금한 이들을 위해서 기도해주고, 예배한다. 어느 후보는 교인들의 표를 의식해 성경책을 옆에 끼고 예배에 참석한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근본주의와 정통주의 신학에 갇혀 보수보수를 외치다가 보수주의에 떨어진 것과 무관하지 않다.

한국교회는 보수정권을 지탱해주는 힘었던 것은 부정 할 수 없다. 피 묻은 손에 기도해 준 한국교회, 기득권세력에게 예언자적인 사명을 기대했던 것이 오히려 문제이다. 그렇다보니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걱정하는 세태가 됐다. 모두가 돈에 취해 맘몬을 노래하며, 십자가탑을 높이는데 경쟁을 벌인다.

생명의 양식은 축적하지 못한다

재물은 인간의 삶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따라서 누구나 재물을 축적 할 수 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쌓아 둘 수 있다. 그러나 모두가 재물 축적의 욕심이 죄를 낳고, 사망에 이른다는 성서의 진리를 망각했다. 대장동 사건에서 말해주고 있듯이 재물을 탐한 정치인, 언론인, 법조인들의 죄는 끝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들에게는 법이 필요하다. 법은 이들, 기득권 세력을 강제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법을 만들어야 할 정치인, 목사들은 정의를 세우기 위해서 법을 만드는데 매우 인색하다. 모두가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목사들은 예언자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데, 정치권에 깊숙이 개입해,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에 바쁘다. 이들은 과거 군사독재정권 아래서 예언자의 사명을 감당하며, 고난당하는 국민들을 위해서 일한 목회자들을 용공, 빨갱이, 좌파, 정치 목사로 매도했다.

그렇다보니 목회자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정쟁만을 일삼는 정치인과 가진자들의 대변인 역할만 하고 있는 것처럼 국민들에게 비쳐졌다. 이로인해 교회는 신뢰를 잃어버렸다. 이제 교회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교회가 아니다.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시대가 아니다.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시대가 됐다. 이런 상황서 한국교회의 마이너스 성장은 당연하다. 부자교회는 떠난 교인들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이웃교회의 교인을 빼와야 하는 형국이 됐다.

요즘 신종바이러스감염증으로 인해 국민 모두는 곤궁한 삶을 살고 있는데, 정치인들은 정쟁만 일삼고 있다. 교회는 정부의 방역정책이 종교의 자유를 방해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정치가 코로나19와 국민의 삶 모두를 집어 삼켜버렸다. 소상공인, 직장에서 쫓겨난 국민들은 못살겠다고 아우성친다. 소상공인, 가난한 사람들은 자살이라는 최악을 선택하는 일까지 일어나고 있다.

이럴 때 교회가 해야 할 일은 극명해진다. 정치인의 손을 얹고 기도해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코로나19로 인해 사지로 내몰리는 이웃을 위해 기도하고 예배해야 한다. 이들이 바로 한국교회의 선교자원이며, 십자가의 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서, 가난하고, 소외되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복음(기쁜소식)을 선포하고, 이들과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였다는 것을 한국교회는 잊지 말아야 한다.

이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이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며, 십자가의 길이고, 그리스도인의 길이다. 여기에서 이탈하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인의 길을 가고 있는가. 모두가 돈에 취해 바리세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기득권 세력과 부합한 정치인, 교회, 언론인들은 타락할 수밖에 없다. 정치인은 보수적인 교회를 멀리 할 수 없다.

교회가 언제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 예수님의 삶의 현장서 성실하게 일하는 노동자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예배 한번 드렸던가.

부자들의 눈물 닦아주기에 바쁜 교회

사실 한국교회는 부자들이 드린 헌금과 눈물을 위해서 새벽마다 기도는 해도, 노동자들의 땀방울과 눈물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무엇이라고 변명 할까. 변명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그렇다보니 교회는 세상 속에서 빛을 잃어버린 지 이미 오래 되었다. 소금의 맛도 변질됐다. 그것은 교회가 예수님의 삶의 현장서 이탈했기 때문이다. 교회는 돈에 취해, 맘몬에 취해 물질만능주의에 편승됐다.

교회도 정치인과 언론인, 법조인들과 마찬가지로 기득권세력이 되어 성서의 생명 나눔의 약식보다 물질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교회 재산 늘리기에 바쁘다. 십자가 탑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높아지고 있는데, 우는 자는 끝을 보이지 않고 있다. 교회 안에서 예언자의 목소리가 끊어졌다. 교회는 부자들의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이며, 이들의 눈물을 닦아준다. 초대교회의 기능을 상실했다.

기득권 세력으로 변질된 교회는 성령을 몰각하고, 성령을 복 방망이로 악용하고 있다. 사실 한국교회는 부자가, 기득권 세력이 교회에 나오면, 크게 환영한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이 교회에 나오면 홀대한다. 혹 주일날 걸인이 교회를 찾으면, 1천원짜리 한 장을 손에 쥐어주고 내 쫓는다. 기득권세력이 된 교인들 역시 이들 옆에서 예배를 드리지 않고, 피하는 것이 오늘 교회이다. 오늘 교회는 만인이 기도하는 집이 아니다. 기득권자를 위해 기도하고, 예배하는 곳으로 변질됐다.

이것은 바로 교회가 생명의 나눔양식을 잃어버렸다는 증거이다. 그렇다 보니 교회에서 드리는 성만찬 의식도 크게 퇴색됐다. 교회 안에 돈 많은 부자, 학식 높은 지식인, 이웃을 사랑하고, 자기십자가를 져야 하나님나라에 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을 수년동안 공부한 목사와 전도사는 많지만, 이들에게는 생명나눔의식이 전혀 없다. 모두가 기득권세력으로 변질돼 교회가 생명력을 잃어버렸다.

혼란한 사회 속에서 교회는 예언자의 사명을 전혀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모두가 권력의 주변에서 줄서기에 바쁘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서 일하는 교회가 없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기득권세력으로 등장한 교회가 물질에 눈이 어두워 물질을 독점하려는 것은 폭력과 비리를 만들어내는데 일조한다. 보수적인 교회가 적극적으로 지지한 후보의 손바닥에 자가 새겨진 모습을 보고 어떤 느낌이었을까.

박근혜 정부시절 오방과 악령이 되살아나는 느낌을 받지 않았을까. 그래서 성서의 예언자들은 왕이 잘못가면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라고 했다. 교회 역시 정치지도자, 사업가 등등이 성서에서 이탈하면, 예언자의 목소리로 사회와 정치권을 정화해야 한다. 교회가 침묵하고, 목회자가 예언자의 전통에서 벗어나면, 우리사회는 폭력과 비리가 난무 할 수밖에 없다.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이 예수를 버린 것과 다르지 않다.

이런 이유에서 교회는 과거에 머물러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미래 하나님나라를 내다보지 못하고 있다. 기득권 세력을 비호하는데 급급했던 한국교회의 원로들은 야당의 유력 대통령 후보에게 안수기도를 헤 주었다. 그것도 유력후보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해 준 것이 아니라, 등에 손을 얹고 기도해 주는 모습은 한마디로 권력의 주변을 맴돌며, 온갖 혜택을 누려온 한국교회 목회자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다는데 참담하다.

정치 목사들은 사지에 내몰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노동자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해 주지 않았다. 정치 목사들은 일본제국주의 아래서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시궁창보다도 못한 청춘을 보낸 위안부 할머니를 위해 기도해 주지 않았다. 오히려 한국교회는 우상 천왕을 위해 기도하고, 신사참배를 결의, 하나님을 배신하는 배교의 범죄를 저질렀다. 한마디로 우상, 천왕을 섬기는 일본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다는 사실, 성서의 진리를 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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