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능하신 하나님 대신 시장 등장

오늘 가난한 나라들이 부유한 나라의 부유한 사람들을 원조하고 있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부유한 나라의 부유한 사람들이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의 주머니를 털어가고 있다는 말로 해석된다. 신종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세계민족 모두가 곤궁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부자나라들은 가난한 나라에서 돈을 벌어 부자가 됐으면서, 백신은 부자나라들이 앞을 다퉈 독점하고 있다.

부자나라들은 백신이 남아돌아 폐기하면서도, 가난한 나라에 백신을 지원하는 것에 대해서는 매우 인색하다. 가난한 나라 민족의 생명은 하찮게 여긴다. 세계자원에서 볼 때, 부유한 나라들이 가난한 나라들을 원조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독일의 시사주간지 <슈미겔>199212월 콜럼버스의 미 대륙 발견 500주년을 기념하는 특집호에서 오늘날 자본주의적 세계경제질서를 한마디로 요약했다.

전능하신 하나님 대신 시장이 등장했다. 이 신의 현현은 다우존스 주가지수이고, 그의 성체는 미국의 달러이고, 그의 미사는 환율조정이고, 그의 나라는 그렘린의 지도자들까지도 찬양하는 자본주의적 보편문명이다

오늘날 세계는 자본, 금융이 지배하는 시대이다. 500년전 대서양을 건너던 경건한 가톨릭 신자 콜럼버스는 하나님이 승리하실 것이다. 지구상에 있는 모든 백성들의 우상을 비로 쓸어버리고, 그들이 처한 곳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게 할 것이다는 성 아우구티누스의 기도를 굳게 믿고, 항해에 나섰다.

그러나 콜럼버스의 기도와 희망과는 달리 오늘날 승리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본주의이며, 그를 경배하는 것도 하나님이 아니라 미국의 달러이다. 이것은 사회주의 국가도, 회교 국가도 마찬가지이다. 교회 역시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를 그대로 받아들여, 하나님의 자리를 맘몬, 돈으로 대치시켰다. 찬양과 존귀와 영광의 대상도 하나님이 아니다. 예수님이 배척했던 맘몬이며, 자본주의 보편문명이다.

이제 교회도 자본주의 보편문명에 동화되어 가고 있다. 자본주의 보편문명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고난당하고 있다. 1997년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국가, 중남미 국가의 국민들이 IMF(국제통화기금)으로 인해 많은 고통을 당해야만 했다. 우리나라는 IMF 관리 체재에서 200만명의 노동자가 거리로 쫓겨났다. 이들에게 속한 700만명의 가족들이 생존에 위협을 받았다.

당시 노동자들은 경제적 어려움뿐만 아니라 심리적·정신적 고통을 당했다. 직장에 남아 있던 노동자들도 불안한 미래 때문에 희망을 잃어버렸다. 그들은 월급이 삭감되었고, 상여금을 받지 못했다. 심한 정신적 고통과 패배감에 빠져 시름했다. 외환위기는 우리나라 성인인구 1500만명이 여러 모양으로 고통을 당했다. 우리나라의 금융위기는 한마디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노동자와 그 가족들의 희망을 빼앗아 버렸다.

이탈리아 로마 누볼라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첫날 개최된 1세션 ‘국제경제·보건’에서는 코로나19 백신 불평등 이슈가 핵심사안이었다.
이탈리아 로마 누볼라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첫날 개최된 1세션 ‘국제경제·보건’에서는 코로나19 백신 불평등 이슈가 핵심사안이었다.

성서의 경제관 나눔과 섬김을 삶의 현장서 실천하라
코로나19로 곤궁한 삶속에 있는 사람들과 연대 절실

금융자산, 맘몬이 최고인 시대

IMF 당시 한국교회는 희망을 잃어버린 노동자를 위해서 무엇을 했느냐고 묻지 않을 수 없다. 정신적 고통과 패배감에 사로잡혀 있는 노동자를 위해서, 거리로 내몰린 노동자를 위해서 교회는 행동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각에서는 IMF가 교인들을 결속시키고, 교인들의 생활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헌금이 많이 나온다도 말이 회자됐다. 사실 교인들이 결속되고, 교회재정이 더 늘어났는지는 몰라도, IMF 금융위기와 함께 교회에서 지원하던 선교비와 구제비가 중단된 것에 대해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한 통계에 따르면, 외환위기 3개월 동안 1188명의 가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로 인해서 3000가정이 해체 됐다. 이러한 경제적 위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지난해 시작된 신종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정국에서, 자영업자 10만명이 가게 문을 닫았다. 교회도 8만 교회 중 1만교회가 문을 닫았다고 한다. 가슴 아픈 일이다. 경영에 압박을 느낀 자영업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뉴스가 연일 보도되고 있다. 매몰로 나오는 교회도 적지 않다.

심지어 가족 전체가 경제적 압박에 못 이겨 죽음으로 내 몰렸다. 이런 상황서 부자들은 더 부자되고, 부자 나라는 가난한 나라의 것을 빼앗아 더 풍요해지는 현상도 일어나고 있다. 빈익빈, 부익부 현장이 그 어느 때 보다도,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 이제 세계는 인간의 생명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대가 아니다. 맘몬이 최고인 시대이다. 금융자본, 금융자산, 돈이 최고인 시대라는데 이의가 없다.

과거 노동자가 생산한 물건을 팔아 경제적 부를 누렸던 시대가 아니다. 금융재산이 최고인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부자나라는 금융자산을 가난한 나라에 빌려주고, 높은 이자를 받고 있다. 가난한 나라는 이 빌린 금융자산을 부자들에게 줘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고리대금업을 하게 한다. 심지어 일부 제3세계국가 권력자들은 자신의 안위와 정권연장을 위해 이 돈으로 신무기를 도입, 자신의 권좌를 지켰다.

이 빌린 돈은 모두 국민이 갚아야 하는 돈이다. 신종바이러스감염증이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교회들도, 모자라는 교회재정을 빌리기 위해 은행 문을 두드리고 있다. 한마디로 신종바이러스감염증 이후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모든 나라의 민족, 교회 등은 혼자만 살겠다고 아우성친다. 성서에 가르침은 혼자 살라고 하지 않았다. 성서는 분명하게 너와 나, 그리고 그와 함께 살라고 했다.

예수님은 1천년동안 이웃나라에 조공을 강요받으면서, 자신들의 삶을 파괴당했던 유대인을 해방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대안적 사회질서와 인간다운 삶의 질서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전통 속에서 태어났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전통 가운데 새로운 계약, 대안사회를 하나님나라 실현에 두었다. 하나님나라 실현은 유대교 전통 가운데 서 있다. 하지만 이것은 종말론적이 아니라, 하나님나라를 이 세상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성서의 통치와 경제관 섬김과 나눔

예수님은 하나님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누가복음 1721)고 하셨다. 인간의 얼굴을 가진 하나님나라에 대한 희망은 일차적 뿌리는 유다의 율법과 예언자적 전통에 두고 있다. 세계 요한은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면서, 사람들의 회개를 촉구했다. 예수님도 세례 요한의 촉구를 받아드리고, 그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례 요한과 달리 가난하고 소외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게 하나님나라를 선포했다. 그리고 하나님나라가 이들 안에서 실현 될 것을 확신하고, 이들과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였다.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의 실현이 전 세계에서 실현 될 것을 확신했다.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의 실현을 민족들의 순례시(사도행전 22-5)와 결합시킴으로써 전 세계의 사건으로 이해했다. 한마디로 하나님나라가 유대 땅에서 시작되어 세계 모든 민족에게로 퍼져 나갈 것을 전망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한 발작 더 나가 자기가 추구하는 하나님 나라가 성취되었다”(누가복음 417)고 선포했다.

마태복음 20장은 예수님이 말하는 하나님나라의 정치경제학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나라의 통치로서 섬김과 하나님나라의 경제 질서로서 나눔을 제시하고 있다. 한마디로 성서가 말하는 통치와 경제 질서는 섬김과 나눔으로 요약 할 수 있다. 이러한 섬김과 나눔의 통치와 경제 질서는 초대교회 당시까지는 잘 지켜졌다. 초대교회는 모두가 가진 것을 가지고 나와, 생활에 필요한 만큼 가져가는 생활공동체였다.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태복음 2024-28)

하나님나라 경제 질서에 충실하라

하나님나라 삶에서 경제 질서는 아침 일찍부터 일한 사람이나, 오후 늦게 와서 일한 사람이나 똑같이 대접받는 것이다(마태복음 제장 1-6). 하나님나라의 경제 질서는 자본주의 신자유주의경제체제에서의 노동질서처럼 일한 만큼대접받는 것이 아니다. 능력 있는 사람이나, 능력 없는 사람이나, 자기가 능력만큼 일하고, 모두 삶에 필요한 만 큼 받는 것이 하나님나라의 경제 질서이다.

갈릴리 변방 출신인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가난한 자들과 버림받은 자 가운데 사셨다. 처절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인간의 생활현장이 바로 예수님의 삶의 현장이며, 역사의 현장이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나님나라를 얻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헌데 오늘날 교회는 가난한 사람을 위한 교회가 아니다. 부자들의 눈물을 닫아주기에 바쁘다. 거지가 교회에 나오면 문전박대 하는 것이 오늘 한국교회이다.

교회 모두가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였을 때 교회가 성장했다는 것을 몰각했다. 사실 한국교회 130년의 역사를 살펴보면, 가난하고, 고난당하는 민족,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였을 때, 교회는 크게 성장했다. 한국 초대교회가 그랬으며, 해방과 6,25 한국전쟁 이후와 70-80년대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교회가 성장했다.

하지만 교회가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와 맞물려 돌아가면서, 교회는 기득권세력으로 변질됐고 부자들의 눈물을 닦아주기에 바쁘다. 간난한 사람들을 외면했다. 더 이상 교회는 가난한 사람을 위한 교회가 아니다. 교회마저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랑했던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버렸다. 그렇다보니 교회 안에서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의 설자리가 점점 사라졌고, 그 자리를 부자들로 채워졌다. 강단에서 외쳐지는 목사들의 설교는 대부분 을 내용으로 한 설교이다. 성서는 분명하게 말한다. 하나님나라는 가난한 사람들의 것이라고……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나라가 저희 것이다”(누가복음 620)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냈다”(누가복음 152)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태복음 1128)

그리고 부자들에게는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도 쉽다”(마태복음 1025)고 했다.

과거나 오늘이나 부자가 된다는 것은 가난한 자들의 몫을 차지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적어도 초기에는 예수님의 선포와 가르침 가운데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 이것은 사도행전에 나타난 공동체의 삶의 조건에 잘 나타나 있다. 사도행전을 보면 하나님의 영을 받은 제자공동체가 형성됐다. 이들은 제국의 언어, 경제적,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문화적 지배 바벨탑의 언어로부터 해방됐다.

화폐증식 메커니즘을 통제하는 집단

이 같은 입장은 2-3세기 교부시대에까지 어느 정도 이어졌다. 교회공동체가 정착되면서, 세상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2세기 말-3세기 변증론자들은 소유에 대한 금욕적 사고들을 더욱 철저하게 철학적 논거들과 결합시켰다. 100-160년경에 활동했던 디오 그레티는 편지에서 행복이란 인간이 자기의 이웃을 지배하거나, 자기보다 약한 이웃을 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에서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행복이란 또한 인간 스스로 부해지고, 낮은 사람들을 억압하는 것에서 성립되는 것도 아니다. 이런 방식으로는 아무도 하나님을 본 받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렇다 많이 가졌다고 해서 행복한 것이 아니다. 너와 나, 그리고 그와 함께, 서로 섬기고 나눌 때 사람은 행복하다. 문제는 인간사회가 예수님의 말씀과 초대교회의 생활공동체, 교부시대의 가난한 사람을 위한 지원 등의 진리에서 크게 벗어났다. 로마제국에서 지배적 세력이었던 맘몬을 한국교회가 숭배하고 있지 않은가.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는 담지자들은 원칙적으로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서야 함에도,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와 부합된 부자와 권력자들을 위해서 일하는 교회가 됐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한 4세기 이후부터 기독교는 박해받는 종교에서 인정받는 종교로 탈바꿈 했다. 여기에다 기독교는 여타 종교를 탄압하는 특권을 누리는 종교의 지위를 차지했다. 이렇게 시작된 기독교는 국가신학과 함께 중세에 들어와서 하나의 특권계급으로 등장했다. 가난하고 고난당하며,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위한 예수님의 민중적 전통에서 완전히 이탈했다.

중세 이전까지 정치, 경제, 사회 등 전반은 종교에 종속되어 있었다. 모든 삶이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 아니 오늘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하에서의 종교는 경제에 종속되는 결과를 가져다가 주었다. 루터의 삼중 질서론, 즉 정치적 질서, 교회의 질서, 경제적 질서 등 모두가 공동체적 삶의 보호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루터는 고리대금업이나, 독과점, 투기 등을 막아야 정치적 질서를 유지 할 수 있다는 논리를 폈다.

칼뱅 역시 재산은 의무적 요소를 가진 하나님의 질서에 속한다고 루터와 같은 입장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은 경제와 관련해서 철저하게 성서의 가르침을 따르려고 했다. 이들의 사회적 준거는 언제나 사회적 약자들의 삶의 조건이었다. 이들은 또 교회가 당시 새롭게 등장하던 초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화폐증식 메커니즘을 통제하는 집단이 될 것을 촉구했다. 칼뱅은 예정론과 그에 기초해서 근면과 절약정신을 강조했다.

종교개혁 전통도 나눔과 섬김

종교개혁 504년이 지난 오늘 한국교회의 경제관은 한마디로 성서의 가르침인 섬김과 나눔이 아니다. 한국교회는 나눔과 섬김을 통한 사랑의 선교를 강조하고 있지만, 이를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교회가 됐다. 만만 앞세우다가 국민·사회와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교회의 신뢰도는 바닥을 치고 있다. 이로 인해 선교의 경쟁력도 상실했다.

한마디로 교회는 가난한 사람의 문제를 사회경제적인 측면에서 접근하지 못하고, 자선적 단체에 머물러 있다. 교회는 세속화되고, 교회를 멀리하는 이들을 다시 교회로 돌아오게 하려는 복음화의 입장에서만 접근했다. 초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일한 교회, 한국개신교는 자본주의적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와 함께 세속화되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전혀 감동을 주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빠져나가면서, 공동체가 해체되고 있다. 한마디로 한국교회는 경제적 불의로 인해 믿음도, 사랑도, 소망도 상실했다. 오히려 중세교회의 맘몬이 최고인 시대가 됐다. 돈을 받고 면죄부를 판매한 중세교회와 믿음의 척도를 헌금의 액수로 계산하는 오늘날 한국교회와 무엇이 다른가. 이제라도 한국교회는 가던 길을 멈추고, 경제적 불의에 대해 비판적으로 외쳐야 한다.

그리고 경고해야 한다. 경제적 질서, 정치적 질서, 종교적질서의 파수꾼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경제적 위기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믿음과 소망, 사랑이 지배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는 청빈한 생활을 영위해야 한다. 코로나19로 인해 곤궁한 삶을 살아가는 보잘 것 없는 사람들, 언제 직장에서 쫓겨날지 모르는 계약직 노동자들과 연대해야 한다. 이 때 비로소 한국교회도 상실한 신뢰를 되찾고, 예수 그리스도의 길, 그리스도인의 길을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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