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여정

서리 한줌 녹인 만큼
햇살도 한줌만큼 사라지는 가을이다

나뭇잎들이 제각각 노을빛으로 치장하고
새로 산 시집 책갈피에
그 가을 그리움을 저장하고
황금빛 들녘은 맨살을 드러내며
그렇게 가을은 떠나고 있다

떠나가는 그 뒷모습이
보는 사람에 따라
처연하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한데

늦가을 속으로 들어가는
내 뒷모습은 무슨 빛깔일까

 

-『형상 21』 시문학회 엔솔로지 24권에서

정 재 영 장로
정 재 영 장로

시속에 나타난 가을이 주는 무수한 이미지, 알곡으로 보면 성숙이기도 하고, 낙엽으로 보면 별리의 다양한 실존의식으로 읽을 수도 있다. 그것은 마지막 연에 가서 시각적 감각인 빛깔로 구체적으로 치환하고 있다. 

시는 언어로 그리는 그림 즉 형상 제시다. 즉 관념을 실감으로 감각하게 만든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각화는 아주 중요한 수사학이라 할 수 있다.

첫 연에서 도량화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미지 동원을 위함이다. 만추를 햇살이 아직은 따스함을 가진 계절 즉 서리가 오지만 한줌정도 되는 서리이며, 가을 낮 길이도 아주 짧아진 것이 아닌 한줌정도 짧아진 그런 때다. 달력 숫자를 피함으로 그림으로 그려 보여준다. 독자에게 상상으로 추론케 하는 것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나뭇잎의 색깔도 노을 색깔로 치환하여 보여주고 있다. 가을을 새롭게 산 시집 책갈피에 저장했다는 말도 가을의 서정성을 시집이 주는 이미지로 대신 가두고 있는 것이다. 들녘마저도 대지의 맨살이 드러낸 그림처럼 보여주어 시각화를 추구한다. 

이 가을의 속성은 따나감이다. 역시 화자의 뒷모습도 떠나감의 이미지다. 가을 들녘처럼 흔적을 남기는 현존재의 상황이다. 화자의 가을은 시간적 가을이 아닌 실존의 존재탐구 계절인 것이다.  마지막 연 진술을 보면, 만추를 음풍영월하듯 노래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자아와 연결된 존재인식을 철학적 담론을 통해 상상하도록 인도하여, 독자를 그 가을 속에 세워 두고 있다. 그러나 정작 시인은 그 자리를 뜨고 있다. 설득이 아닌 독자의 상상을 통해 스스로 사유함으로 현존재의 실존의식을 가지도록 시각화하고 있는 것이다.            

전 한국기독교시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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