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림받은 자가 있는 곳에 교회 세우고 하나님나라운동 벌이자

교회는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오늘 세상 사람들은 교회다운 교회,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한다. 그것은 교회가 하나님의 참사랑(복음=기쁜소식)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해서 봉사하지 않는다는 비난을 받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인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지적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분명 교회는 예수님의 삶의 현장’,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 버림받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교회는 무엇을 하는 곳이며,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를 성경의 진리를 통해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증명해야 한다. 기독교는 종교적으로 표현하면 하나님(성부), 예수 그리스도(성자), 성령의 존재를 믿는(성령) 삼위일체 신앙을 추구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사제나, 목사를 매개로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과의 개별적 인격적 만남을 통해 구원을 받는다. 기독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는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존재한다.

오늘 한국을 비롯한 세계는 교회가, 아니 기독교가 종교의 역할을 상실하면서, 종교에 대한 무용론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종교개혁의 전통, 특히 개혁교회(장로교)의 전통에 따르면, 인간은 타락한 존재이다. 띠라서 자신을 스스로 구원 할 수 없다. 인간의 죄는 행동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인간은 신의 은총으로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이 같은 진리를 깨닫고 있음에도, 성직자, 목회자에게 복종하는 모습을 보인다. 전지전능하신 신의 자리를 인간들이 독차지 했다. 신이 받아야 할 영광을 인간이 받는다.

그것은 교인들의 모습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 즉 목회자나, 성직자에게 복종한다. 이들을 보고 교회에 나가고, 이들을 매개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렇다 보니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세계와 사회에 대한 책임을 회피한다.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인은 사회와 세계의 두 차원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사회와 세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된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인은 주님께 신실하고, 세상에 대해 신실해야 한다. 분명 인간은 불완전한 피조물이다. 자기 존재의 보존을 위해서 많은 외적인 것들을 필요로 할 수 밖에 없다. 그리스도인이 이타적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의해서보다도, 종교적 신념과 명령, 신적계명, 나가서는 증언적 명령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신적계명에 의해 잘못 가다가다가도 돌아서는 것이다. 문제는 가다가 돌아서지 못하는 인간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생존과 보전을 위해서 타인의 생명을 해치기도 하고, 타인의 재산을 빼앗기도 한다. 사실상 서구나, 동양의 역사는 인간과 인간의 투쟁의 역사이다. 홉즈는 인간은 인간에 대하여 늑대로 활동한다고 했다. 이러한 사악한 인간성을 순화하기 위해서 종교가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인간은 윤리적, 도덕적으로 채워지지 않는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종교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성경 역시 인간에게 선을 교육하고 있다. 하나님의 참사랑을 교육하고 있다.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은 참사랑이다고 고백하면서도, 삶의 현장서 이를 행동으로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십자가탑으로 붉게 물든 대한민국 야경.
십자가탑으로 붉게 물든 대한민국 야경.

버림받은 자들을 위해서 일하는 교회로 거듭나자
인간을 신격화하는데서 수많은 사이비 교주 양산
교회가 해야 할 일을 교회가 주체적으로 감당하라

기독교 존재의미를 상실한 교회

기독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이다. 국민들은 교회가 교회의 역할에서 빗나가면서, 성경에서 이탈하면서, 기독교가 선한 종교인가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을 국가나, 사회단체가 대신하는 결과를 가져다가 주었다. 교회가 버림받은 사람을 외면하면서, 이 일을 국가와 사회단체가 대신하고 있다는 애기다. 70년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한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의 현장, 삶의 현장에 교회를 세우고, 가난하고 소외된 보잘 것 없는 사람들, 즉 노동자, 거지, 장애인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였다. 고대교회도 가난한 사람을 위한 교회였다. 이런 교회가 예수님을 교리화, 제도화시키면서, 타락하기 시작했고 중세 유럽교회에 와서 최악에 이르렀다.

기독교가 왜 세상에 존재하는가에 대한 이해는 지금 교회의 모습 속에서는 그 의미를 찾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 버림받은 자를 찾아 가시밭길, 벼랑 끝을 헤매셨다. 헌데 예수님의 몸 된 교회라고 말하는 오늘날 교회는 이들을 찾지 않는다. 이로 인해 한국교회는 마이너스 성장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대신 교회는 부자들의 눈물을 닫아주며, 이들이 축적한 부에 축복기도를 해 준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돈이 있어야 교회에 다닐 수 있다고 비아냥거린다. 버림받은 자를 찾아 나서야 할 오늘의 교회, 예수님을 교리화, 제도화시켜 그 뒤에 숨어버렸다. 오늘날 기독교에서 세속종교와의 차이를 발견할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목회자들은 강단에서 지금까지 기독교는 세상 종교와 다르다고 강조해 왔고, 강조하고 있다.

오수강 목사는 본지에 게제한 <지금 교회가 하는 일이 교회가 해야 할 인인가?>이란 제목의 칼럼에서 실제 세속종교와 기독교의 차이가 없다는 것은 바로 속 교리는 제쳐두고 겉의 모습은 오히려 기독교가 세속종교보다 물질에 대한 소유욕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면서, “이제 교회는 이 땅에서의 하나님나라 실현보다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의 산물인 맘몬을 사랑하는 종교로 변질되었다. 기독교도 세상종교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겉모습만 보고, 십자가의 높이로, 교회의 사이즈로 목회자를 평가하고, 교회와 교인을 평가한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교회도 일반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건물을 호화스럽게 건축하고 십자가탑을 높인다. 그리고 교회당 내부를 세상종교에서나 볼 수 있는 호화롭게 장식한다. 세상종교는 그 곳에 신이 있다고 믿게 하고, 지도자들은 복장과 외형을 신비스럽게 치장하여 신도들에게 종교의 권위를 나타낸다. 이것이 바로 보이는 종교의 특성이다. 그 특성은 속 빈 강정에 불과하다. 교회가 세속종교를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안타깝다. 교회는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예수님의 역사의 현장에 있어야 한다. 버림받은 자들 가운데 교회가 있어야 한다. 이들에게 복음(하나님의 참사랑)을 선포하고, 이들과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여야 한다. 이것이 성서의 가르침이며, 교회가 해야 할 일이다. 예수님은 호화로운 곳에서 태어나지 않으셨다. 짐승들이 기거하는 말구유에서 태어나셨다. 호화로운 교회당을 고집하며, 부자들만을 위한 교회는 성서에서 이탈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최고의 신, 하나님을 경외하라

성경에서 이탈한 교회가 세상과 동화되어가고 있다는데 참담하다. 여기에다 한국교회는 교회간, 교파간, 단체간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모두가 내 교회, 내 교단, 내 단체만이 최고라고 주장한다. 종교개혁 이후 난립한 교파 중심의 중세교회의 전철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 종교개혁 이후 유럽교회는 종파간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평신도들이 나섰다. 당시 평신도 신학자였던 허버트를 비롯한 아담 스미스, 토마스 홉스, 존 로크 등은 초자연적인 진리의 신을 증명하는데 노력했다.

한마디로 인간들이 자연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공통의 것, 원종교를 발견하자는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됐다. 당시 허버트는 모든 종교의 영원한 이성적 핵심 다섯 가지를 제시했다. 최고의 신(하나님)이 존재한다 그는 마땅히 경외되어야 한다 덕성과 경건은 예배의 본질적 부분이다 죄는 참회와 회개를 통해서 해결되어야 한다 신의 선하심과 정의로부터 시간과 영원에서나 보상과 형벌이 초래된다 등이 바로 그것이다.

분명 기독교의 특징은 보이지 않는 살아계신 한 분의 신을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겉보기보다는 속, 즉 영혼에 충실해야 한다. 그런데 기독교 지도자들 가운데 일부는 이방 세속종교의 형태와 행위를 믹스해 기독교 교리와 지도자의 신비한 모습을 통해 신자들에게 신격화하려는 자들도 있다는 사실. 이들은 천상의 삶, 천국만을 말하며, 인간의 죄를 옥죄이며, 심판을 강조한다. 이들에게 지상에서의 삶은 중요하지 않다. 지상의 삶은 천상을 위한 삶에 불과하다

사실 중세교회는 인간의 삶 모두가 종교에 종속되어 있었다. 오늘 한국교회가 바로 중세교회의 모습을 그대로 연출하고 있다. 죄의 심판과 저주를 설교하는 지도자 자신은 마치 영매 자들이나 무당 또는 신접한 자들에 가까운 행동으로 일관한다. 그렇다보니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전하는 지도자의 말을 불순종하면 벌을 받게 된다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목회자들은 목적달성을 위해 성서에 나타난 은사를 방매하며, 교인들의 입맛에 맞는 은사만을 끄집어 내 교인들을 현혹시킨다. 이들은 바울서신에 나타난 은사는 평등하다는 것을 잊은 자들이다.

그렇다 오늘 한국교회는 이들에 의해서 교주가 만들어지고, 이단·사이비가 탄생한다. 한마디로 이들의 강론은 자신을 매개로 하나님을 만나고,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어느 목사는 불순종하면, 생명책에서 지우겠다고 말한다. 종교개혁 전통, 개혁교회 전통서 벗어났다. 또한 일부 목회자와 사역자, 부흥사는 예수님을 돈 벌이의 수단으로 삼는 사이비이 짓거리를 서슴지 않고 있다. 인간사회와 교회를 혼란에 빠트리고 있다.

애덤 스미스는 인간사회의 혼란과 고통은 신이 원하는 질서를 파괴하는데서 온다고 했다. 즉 신이 창조한 세계가 인간의 죄로 인해 무질서에 빠진다는 것이다. 리츨은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는 도덕성을 완성하는 것이 종교의 궁극적 목표이며, 이것이 가능하게 될 때 하나님나라가 실현된다고 말했다. 헌데 오늘 한국교회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대신 돈을 사랑한 나머지 기독교의 가치를 상실했다.

돈에 종속된 교회지도자

오늘 한국교회 안에서는 이단의 문제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악용하는 사이비가 더 큰 문제이다는 지적의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대부분의 교회지도자들은 맘몬에 매몰돼 사례금을 많이 주는 부자목사를 극찬하며, 신격화하는 일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렇다보니 일부 교회지도자는 돈에 종속돼, 스스로 하나님의 종이기를 거부한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보다도 돈을 사랑하는 종교지도자로 변질됐다.

이제 한국교회도 교인들의 삶이 종교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의 산물인 금융()에 종속되어 버렸다. 그렇다보니 목회자들은 자신이 개척한 교회의 후계자를 아들로 삼을 수밖에 없고, 삼고 있다. 담임목사 세습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는 교단은 삼각, 사각으로 편법세습을 시행하고 있다. 이 교회가 속한 교단은 이로 인해 무질서에 빠져들었고, 이런 현상은 도미노처럼 일어나고 있다.

어느 교회 감독출신 은퇴목사는 처남을 담임목사로 세워놓고, 뒤에서 재정 및 인사를 마음대로 조정한다. 이 은퇴목사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다. 이 은퇴목사는 신앙의 자유,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상실했다. 한마디로 원로목사로부터 조정을 받는 처남담임목사는 한마디로 로봇에 불과하며, 초라하기 그지없다. 목회자의 권위도 상실했다. 이 교회는 은퇴목사가 전지전능하신 신이다.

이런 교회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는데 안타깝다.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해서 악용하고 있다. 이들이 바로 돈에 종속된 교회의 지도자이다. 신앙적 진리는 로마의 가톨릭 주장처럼 교리나, 교회의 전통에서 구하지 말고 오직 성서 자체에서 찾아야 한다는 진리를 상실한 목사이다. 분명 인간의 구원은 어떤 성직자나, 교회가 매개로 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 나타난 진리, 즉 예수 그리스도와의 직접적·인격적 만남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매개로 구원,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이며, 그리스도인의 양심의 자유이다. 그럼에도 성령의 은사를 내세워 성경을 입맛대로 악용하는 목회자들이 적지 않다. 최삼경 목사는 가톨릭은 교주가 한명이지만, 개신교는 교주가 몇 명인지를 헤아릴 수 없다고 지적한다.

중세시대 평신도신학자인 허버트 역시 종교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타락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갈등의 원인이 되는데, 그것은 사제들의 제의와 교리 때문이다면서, “계시종교는 거의 예외 없이 시간이 지나면 제도화되고, 그 과정에서 사제들 간에 권력투쟁이 일어나며, 세력을 장악한 자들이 교리를 만들어 반대 세력을 제거함으로써, 사회적, 종교적 갈등이 발생한다고 종교의 타락원리를 정리했다.

신흥종교의 발흥 교회가 원인 제공

이로 인해 많은 교주가 탄생했고 탄생하고 있다. 신흥종교가 등장한다. 신흥 종교의 대부분은 기독교의 성경을 악용하고, 대부분 십자가를 이정표로 세워놓는다. 신흥종교 교주들의 강론은 성경을 신흥 종교의 입맛에 맞도록 개조하여 따르는 신도들에게 강하게 주입해 이탈하지 못하도록 한다. 주로 부녀자들이나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들에게 접근, 기존 교회의 잘못된 점을 부각해 떨어져 나오게 한다. 한마디로 교회가 교회의 역할을 상실하면서, 이단·사이비는 여지없이 그 곳에 참투하고 있다.

신흥종교는 자신들만이 참 진리이며, 옳다고 한다. 신흥종교는 맹종하는 한국교회 교인들에 의해서 만들어졌고,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어느 단체의 대표회장 출신 지도자들은 특정 인사를 극찬하며, 신격화시키는 말을 서슴지 않고 있다. 또 하나의 교주를 만드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오죽했으면, 당사자가 자신을 극찬하는 일을 멈춰달라고 이들에게 요구했겠는가.

그럼에도 맘몬에 길들여진 일부 교회지도자는 가던 길을 멈추지 못하고, 그대로 질주하고 있다. 언제 레일에서 탈선 할지를 모른다. 매우 위험한 상황에 봉착했다. 하나님이 받아야 할 영광을 부자 목사가 독차지하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이런 형태로 이단이 만들어졌다. 이렇게 만들어진 신흥종교, 이단은 교회가 해야 할 일에 가깝게 다가가 기성교회와 다른 점을 부각시킨다. 오죽하면 세상 사람들이 교회다운 교회,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하겠는가.

한마디로 오늘 대부분의 교회가 예수님의 삶의 현장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 나서지 않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신흥종교의 전도꾼들이 교회가 있어야 할 곳에 파고들어가 이들을 미혹시키고 있다는 것에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깨달아야 한다. 한국교회는 교회가 해야 할 일을 이단·사이비에 빼앗기면서, 뒤에서는 교인들 모르게 이들과 교류한다. “목회자 1만여명이 신천지와 말씀교류를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러면서 혹여 교회 안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문제의 원인을 문제의 단체에 뒤집어씌우는 일도 있다. 신흥종교, 특히 이단·사이비에 빠져드는 사람은 대부분 교회가 보살피지 않는 버림받은 사람들이다. 1992년 시한부종말론으로 인해 한국교회가 혼란에 빠졌을 때에도, 버림받은 사람들이 여기에 쉽게 빠져들었다. “19921028일 종말이 온다고 처음 주장한 당시 중학생은 목사가 되어 정통교단의 소속 목사로 교회를 담임하면서, 동성애 반대운동을 비롯한 이단·사이비대책에 적극 나서고 있다.

이 목사는 1992년 한국교회 내놓으라는 유명 목사들의 머리 위에 안수기도를 해 화제가 되기고 했다. 예수님은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가시밭길, 벼랑 끝을 헤매셨다는 사실. 한국교회가 버림받은 사람을 보살피지 않는다면, 이들은 신흥종교에 미혹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일부 신학자와 목회자는 예수님의 삶의 현장인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에 교회를 세우고, 이들과 함께 하나님나라를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실현하라고 주문한다.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