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길을 멈추고

만난 적 없는 시인의 부고를 받았다

컴퓨터 옆에는 
그녀가 남긴 백매도가 펼쳐져 있고
나는 햇볕이 떠나간 시간을
맨발로 밟고 있는데
그 시간 그녀가 죽었다

누구는 죽어라 견디고
누구는 죽도록 사랑하고
누구는 죽음을 껴안고 가던 길을 멈춘다

신의 가호가 당도하기 전에
사람들은
시퍼런 이름을 지운다

어제 꽃을 피운 매화 나무가 
오늘 꽃잎을 떨구고

어제 서 있던 자들이
오늘 꽃잎 속에 눕는다

떠나는 것에 익숙한
아주 잠깐의 우리는
살아서 죽고
죽어서 산다

 

문 현 미 시인
문 현 미 시인

꽃들이 떠나간 길가에 산 사람들의 피눈물이 서린 꽃과 편지들이 쌓여 있다. 먹먹하고 답답하고 안타깝다. 때로는 사람의 말과 글이 슬픔을 담아내기엔 턱없이 못 미친다는 생각이 든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로마서12:15)는 말씀을 묵상하며 함께 울고 있고 함께 견디고 있다. 인생이라는 여정은 반드시 끝이 있다. 세상에 태어났으면 언젠가는 떠나간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영혼이 있기나 한 것일까. 이런 질문이 끝없이 이어진다. 분명한 것은 육신이 한 줌 흙으로 돌아간다는 거다. 그렇다면 죽음 이후 어떻게 되는 것일까. 기독교 신앙이 있는 사람들은 영원한 삶을 믿는다. 영생을 믿기에 그나마 세상적 별리의 한을 견딜 수 있다. 

 요즘 핸드폰을 켜면 온갖 문자가 뜬다. 광고 문자, 안부 문자, 협회나 단체에서 보내는 부고 등등. 많은 문자들을 받다 보니 간혹 부고나 결혼 소식을 삭제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시적 화자는“만난 적 없는 시인의 부고를 받았다”는 의미심장한 내용으로 시의 첫 행을 시작한다. 시의 제목도“꽃은 길을 멈추고”이다. 여기서 꽃이라는 상징이 암시하는 게 무엇일까. 식물의 꽃이면서 꽃 같은 사람의 생명을 가리킨다.“햇볕이 떠나간 시간”에 “그녀가 죽었다”가 절묘하게 오버랩 되면서 죽음이 각인된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삶을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국제구호개발 NGO플랜에 따르면 약 8억 1천 1백만명이 식량을 구하고자 고군분투하고, 4천 5백만명은 생명을 위협 받는 단계라고 한다. 시적 화자는“누구는 죽어라 견디고/누구는 죽도록 사랑하고/누구는 죽음을 껴안고 가던 길을 멈춘다”고 표현한다. 현실은 시에서보다 훨씬 심각하다.‘죽음을 껴안고 가던 길을 멈추는’죽음과 껴안을 새도 없이 날아 가버린 죽음이 있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것은“신의 가호가 당도하기 전에/사람들은/시퍼런 이름을 지운다”는 것이다. 망각이 있어야 살아 남은 자들이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신의 가호’가 있기 전에 금방 잊어버리는 현실이 가혹하다.

익숙해지면 안 되는 것이 있는데 이미 익숙해져 있다.“떠나는 것에 익숙한/아주 잠깐의 우리”들이다. 대개 익숙해지면 습관이 되고 습관이 되면 무감각해진다. 어쩌면 칼과 총보다 무관심, 무감각이 더 무섭다. 한 시인의 부고를 받고 죽음을 진지하게 대하는 시인의 자세가 무척 경건하다. 연과 연, 행과 행이 대구법을 이루면서 시적 긴장미를 살린다.“살아서 죽고/죽어서 산다”는 역설적 표현으로 내적 울림이 인다. 삶과 죽음을 잘 껴안아야겠다. 꽃이 멈춘 길에 붉은 눈물꽃 낭자하다.      
 
백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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