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 성 길 목사
권 성 길 목사

우리는 한때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실존주의를 생각해봐도 좋을 것이다. 실존주의 작가들은 이렇게 말했었다.

인간은 우주의 고아라고, 마치 허공 속에 내던져진 고아와 같은 존재라고, 이렇게 고아처럼 내던져진 인간은 낳을 때부터 혼자 낳아서 결국 자기의 모든 운명을 자기만의 판단으로 결정해 나가야만 할 고독한 운명에 빠진 것이라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자기를 어디에 써먹어야 할지, 인생 직장이 마련되어 있기도 전에 이미 어머니의 자궁으로부터 양수(羊水)를 뒤집어쓰고 나와 자기 운명을 울어야 하는 인간, 이런 인간 존재를 가리켜 “실존(實存)”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런 실존주의를 빌어오지 않아도 우리가 제 자리에 돌아와 곰곰이 자기 자신을 거울에 투영시켜 보았을 때 우리는 모든 인간이 고독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발견하게 될 것이 아닌? 자기와 꼭 같은 얼굴이 이 세상 어디에 단 하나라도 있을 수 있으랴! 사상도 취미도 그리고 어떠한 이해관계도 결국, 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얼굴이 다르고 사상과 취미가 모두 다르듯 자기는 자기 혼자만의 외줄기 나그넷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江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南道 三百里//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朴木月 지음 <나그네>)

이렇게 시인이 노래했듯이 인간은 고독한 나그네다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요 「南道 三百里」의 먼먼 외줄기의 여로(旅路)를 혼자 걸어가는 나그네다. 

구름에 달 가듯이 가고 또 가야 할 인생은 외로움에 지쳐있는 것이요, 이 외로움 때문에 나그네들은 해가 저물면 주막에 들려 자기의 영혼을 달래는 것이 아닐까? 「南道 三百里」는 이 시인이 걸어가는 인생의 시발점과 종착점의 총 이수(里數)를 말하는 것이다. 시인은 강나루를 건너고 밀밭 길을 지나 「외줄기」 자기 혼자만의 여로를 타박타박 걸어가고 있다고 하겠다.

인간은 이처럼 결국은 자기 혼자만의 외줄기 여로를 걸어가는 고독한 존재, 다시 말해서 이러한 고독은 아무도 도피할 수 없는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양식이다. 그런 거를 인간이 인간 자신을 내버릴 수 없을진대 어찌 이같은 본질적 존재양식으로부터의 도망치기가 가능할 것인가? 그러므로 여기서 도망치자는 사람처럼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 그것은 결국 비지땀만 흘리고 자신만 천박한 계급으로 타락시킬 뿐이다. 
따라서 이같은 비극적인 인간 존재에 주어진 숙제― 그것은 비지땀의 도피계획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는냐에 있을 것이다. 사실로 고독은 도피의 대상이 아니라 그것은 먼저 우리 스스로가 사랑할 줄 알아야 되고 사랑함으로써 그것을 극복해 나가야 할 것이다. 
새세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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