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명 환 목사
김 명 환 목사

미국 텍사스 남침례교 빌리지교회에서 교직주임 목회자인 매트 챈들러는 “복음에 대한 이해는 하나님에 말씀의 시작, 흠 없는 창조의 영광, 그 한복판에서 시작 되어야 한다”고 했다. 사도행전 1장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복음은 한마디로 기쁜 소식이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탄생은 인류에게 기쁜 소식이다. 그 옛날 성탄절를 생각해 보면, 기쁨과 즐거움은 현대의 성탄절보다 곱절로 더 기쁘고 즐거웠다. 그것은, 예수님의 탄생을 진심으로 자랑스럽고, 좋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대교회 교인들을 예수쟁이로 불렸다. 그런데, 이 단어엔 비아냥과 함께 일반인과는 뭔가 다른 사람이란 뜻이 내포돼 있다. 농한기 겨울철에도, 노름하지 않는 사람.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 사람. 항상 성경책을 끼고 다니는 사람. 남에게 예수 믿으라고 권하는 사람, 그래서 함께 어울리기에는 뭔가 불편 하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무시할 수도 없는 사람, 이런 의미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어느 신문사 종교부 기자는 한 목회자 모임에서 들은 이야기를 이렇게 전했다. 기독교가 전에 비해 요즘은 뭔가 이 사회와는 다른 면을 보여 주어야 하는데, 기독교가 그런 역할을 못하니 기사화 할 것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거에 교회가 부흥되고 교인들이 성령 충만하고  그럴 때는 그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오늘 한국교회가 위기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그대로 드러낸다. 

결국 위기를 위기로 인식한다는 것이 한국 교회에 ‘희망의 씨앗’이라고도 한다. 오래 전 어느 목사님의 아들이 밥을 먹는데 ‘예수쟁이’에 대하여 물어 보았다고 한다. 다른 종교에서는 안 그러는데 왜 유독 기독교인에 대해서는 ‘예수쟁이’라고, 하느냐는 것이다. 아이들의 눈에도 굳이 이렇게 기독교인에 대해서만 이런 단어가 쓰이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목사님은 이렇게 대답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너무 열정적이기 때문에 주변사람들이 괜히 심술궂은 마음으로 낮게 표현한다고 대답했다.

한국 사람의 성향은 자신과 같이 아니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낮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하나는 초대교회 기독교인들이 실제로 낮은 신분의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초대교회에는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은 교회에 들어와서 위로를 받고 힘을 얻었다. 그리고 예수님를 믿는 것이 열정적이고, 믿지 않은 다른 사람들을 전도하는데, 열심이 하는 모습에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기독교인을 예수쟁이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요즘은 복음을 전하기 어려운 시대이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기 쉬운 시대는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다. 내 속에 주님에 대한, 믿음과 열정이 있느냐가 문제이다.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은 주님을 부끄러워해서, 자랑하지 못하는 것이다. 즉 믿음이 없다는 증거이다. 세상 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라 하나님을 뒷전으로 놓고 살기 때문에 복음을 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진정한 '예수쟁이'가 아니다.

우리는 2022년 성탄절, 다시 오시는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 복음을 전하는 진정한, ‘예수쟁이’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믿는데, 억척부리고 바르게 사는 ‘예수쟁이’의 소리를 들으며, 이 땅에 다시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인천 갈릴리교회 담임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