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는 분열과 갈등 등의 죄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
, 새 인간이 되기 위해 결단 하자

계묘년 새해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이제 한국교회는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야 한다. 모두가 물질로 풍성한 사람이 아니라, 영적으로 풍성한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이제 한국교회는 분열과 갈등, 로마팍스 등의 죄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 새 인간이 되기 위해 결단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성경 마태복음 25장은 하나님의 마지막 날 심판 할 때의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이 성경말씀에 의하면, “지극히 작은 자를 돕는 것을 심판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마태복음 2531-41)

성경은 지극히 작은 자를 예수님과 동일시하고 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물 한잔을 대접한 것이 예수님에게 한 것과 같다고 했다. 물 한잔 정도 대접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물 한잔의 대접은 파괴된 인간관계를 회복시켜 주고, 생명을 하찮게 여기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죄를 단절하게 한다. 이 물 한잔을 대접하지 못해 인간사회는 서로 갈등하며, 전쟁을 일으키고, 탐욕의 죄에 갇히게 한다.

이웃에 대한 믿음 깨진 사회, 생명의 소중함도 상실
그리스도인 모두 영적 풍성함으로 공동체성 회복하자

슬피 우는 자가 지극히 작은 자이다

오늘 인간 사회는 이웃에 대한 믿음이 깨졌다.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서 지배욕과 소유욕이 강한 인간에게는 물 한잔이 하찮게 보이지만, 물 한잔은 죽어가는 생명을 살린다. 이 한잔을 나누지 못해 생명의 가치도 잃어버렸다, 굶주림 속에 있는 이웃을 외면하며, 탐욕에 길들여져 가난한 자의 마지막 남은 속옷까지 빼앗는 사회가 됐다. 교회도 자신이 섬기는 교회만 부흥되면 된다고 생각한다.

부자교회는 떠난 교인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이웃 작은 교회 교인을 빼앗아 온다. 이렇게 해서 매년 수천 개의 작은 교회가 문을 닫고 있다. 신종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던 1만교회가 문을 닫았다. 교인의 수도 30% 줄어들었다. 작은 교회 목회자와 목회자 부인들은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노동현장으로 나가는 경우가 다반사다.

일부 목회자는 이들을 향해 비판의 목소리를 쏟아낸다. 이들의 희생 위에서 성장한 일부교회의 목회자들은 갈등을 일으키면서, 분열의 늪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일부 중대형교회는 작은 교회와 가난한 사람에게 몇 푼 나누어주고, 하나님의 참사랑을 실현했다고 자랑한다. 언론은 이들의 자랑을 홍보하기에 바쁘다.

한마디로 인간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정신을 몰각했다. 대신 축복만을 강조한 나머지 영적 풍성함도 상실했다. 일부 목회자는 물질적 풍성함이 축복이라고 거침없이 말한다. 이들은 부자들의 눈물을 닥아 주기에 바쁘다. 모두가 혼자만 살겠다고 아우성친다.

한국교회는 초대교회, 한국선교 초기의 공동체성을 상실했다. 나만, 내가 섬기는 교회만, 내 교회가 가입하고 있는 단체만이 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이기적인 종교집단으로 취급을 받고 있다. 그러면서도 한국교회는 교인이 12백만명이라고 자랑만 늘어놓는다. 여기에 교회언론도 춤을 춘다. 이들 속에 참교인은 몇 명이나 될까(?) 의문을 갖게 한다.

생명의 존엄성은 지켜져야 한다

모두가 내 교회, 내 교단, 내 단체만을 주장하다보니, 오늘 한국교회는 썩은 냄새만 진동한다. 교회이기주의만 난무하고 있다. 흐르지 않고 웅덩이에 고여 있는 물과 같이 썩고 있다. 성령도 마찬가지이다. 내 마음에서 너와 그의 마음으로 흐르지 않는 성령은 문제가 있다. 이웃에게 전혀 감동을 주지 못한다.

그렇다보니 탐욕에 갇힌 사이비들에 의해 교회는 타락하고, 분열과 갈등만 난무하다. 교인들은 열심히 교회에 다니지만, 전혀 감동을 받지 못하고, 감동을 주지도 못하고 있다. 한국교회 교인들이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는 이유이다. 돌로 만든 떡을 먹은 한국교회 교인들은 마음이 굳어져 158명의 젊은 청년들이 죽었는데도 전혀 놀라지 않는다.

오히려 이웃나라 국가의 국민들이 걱정하며, 이들을 위로한다. 대한민국은 국민을 보호하겠다는 의지를 상실했다. 국민을 존중하는 마음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모두가 책임회피하기에 급급하다. 교회 역시 젊은이 158명의 희생자와 유가족들의 아픔에 함께하지를 못하고 있다. 이들이 참석한 축제를 서양무당이라며, 비판하는데 열을 낸다.

이는 모두가 생명의 소중함을 잃어버린 결과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면서, 자신의 모습대로 창조했다고 했다. 하나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의 생명을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고, 생명의 존엄성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대로 말해준다. 모두가 이를 망각하고 살아가고 있다는데 안타깝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을 향해 새 인간이 되라고 한다.

오늘 이 시대는 슬피 우는 자가 지극히 작은 자이다. 오늘 인간사회는 지극히 자를 돕겠다는 의지가 전혀 보이지를 않는다. 자식을 가슴에 묻고 슬피 우는 자에게는 물 한잔이 필요하다. 도움을 받고도, 고맙다는 말 한마디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지극히 작은 자는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내가 작은 자이기도 하지만, 지극히 작은 자를 도와야 할 소망도 함께 있다.

이것이 분열과 갈등을 일삼는 한국교회가 해야 할 일이다. 슬피 우는 자들을 위로하지 않고서는 하나님나라에 참여할 수 없다. 이들에게 물 한잔을 대접하는 것이 하나님나라의 심판의 기준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었고, 하나님의 은총으로 살아간다. 나보다도 어려운 사람이 있다면, 이웃들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인간은 도적질, 강도질, 사기를 쳐서 죄인이 아니다.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죄인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 거짓믿음

오늘날의 세상은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다. 너와 나, 그리고 그가 함께 하나님의 은총 속에서 살아가는 세상이다. 가난한 자와 부자가 함께 예수님의 샬롬(평화) 속에서 나의 마음을 주고, 너의 마음을 받으면서,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문제는 현대를 살고 있는 인간 모두가 자신이 잘라서 사는 줄 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망각했다.

성경은 모든 인간은 나보다도, 못한 사람을 도와주며, 함께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라고 교육한다. 하나님 앞에서 가장 큰 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총의 선물을 가난한 자들과 나누고, 더불어 사는 자가 가장 큰 부자이며, 행복하다. 세상은 사회적 지위로 평가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흔적이 없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평가한다. 즉 하나님의 분별의 심판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인간사회는 누가 양이고, 누가 염소인지 구별하기 힘들다. 때에 따라서 사람은 늑대로도 보이고, 염소로도 보이고, 양으로도 보인다. 나를 상대로 속이고, 사기 치는 자들을 보면, 모두가 선하고, 양과 같이 보인다. 오늘날 교회의 목회자들이 그렇다. 목회자 모두는 선하고, 양같이 행동한다. 하지만 일부 목회자는 양의 가면을 쓰고, 늑대와 같은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어떤 목사는 성령의 이름아래 여성교인을 성폭력의 대상으로 삼는다. 어떤 목사는 양의 탈을 쓰고, 교인과 동역자들을 대상으로 사기를 친다. 어떤 목사는 늑대가 되어 분열과 갈등을 일삼으며, 교회를 무너트리는 주범이 되고 있다. 어떤 목사는 교인과의 부적절한 관계로 아들을 낳고, 모든 것이 드러나자 자신은 안수해준 죄 밖에 없다고 항변한다.

모두가 내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범죄 한다. 예수님은 이들을 향해 발과 손을 찍어내라고 하셨다. 눈을 빼라고 한다. 이들은 지극히 작은 자들의 아픔을 모르는 양의 탈을 쓴 늑대 목회자이다. 그렇다보니 이들의 입에서는 거짓 평화를 외칠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참사랑(기쁜소식=복음)을 말로만 크게 외친다. 이들은 양의 가면을 쓰고, 양을 잡아먹는 늑대와도 같다.

이들은 우는 자들의 눈물을 닦아줄 줄을 모른다. 모두 돌로 만든 떡을 먹고 마음이 굳어져 버렸다. 이들은 자신들이 외친 성경말씀을 실천하는 목회자가 아니다. 행동하는 목회자가 아니다. 목회자는 양이 어려움에 처하면, 양을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도와주고, 피난처를 제공해야 한다. 이것이 목회자가 해야 할 일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거짓믿음이라고 성경은 단호하게 교육한다.

성경 야고보서 212-15은 행함을 강조하고 있다. 초대교회는 로마의 박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로마가 갖지 않은 힘이 있어야 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참사랑이었다. 예수님도 사랑을 몸소 실천했다. 예수님의 삶의 현장은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이었다. 이 곳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하나님나라를 선포했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였다. 이들과 함께 하나님의 참사랑을 실현했다.

그렇다. 오늘 한국교회는 예수님의 역사의 현장, 삶의 현장인 분단의 현장에 교회를 세우고, 한반도의 평화와 남북한 민족의 화해, 평화적인 민족통일을 노래하며, 행동해야 한다. 적대적 관계에 있는 남북한의 중심에 교회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로마팍스가 아닌 예수님의 살롬을 강력하게 말해야 한다. 헌데 한국교회 역시 맘몬과 탐욕, 다윗문화에 길들여져 힘의 의한 평화(팍스)를 외치며, 국민간의 갈등을 부추긴다.

영적으로 풍성한 그리스도인이 되라

때문에 우리민족은 미래로 나가 못하고 있다. 초대교회가 로마의 박해 속에서도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미래도 나갈 수 있는 상상력이 풍부했기 때문이다. 사랑의 힘이 있었다. 초대교회는 로마의 어려운 사람,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었다. 박해를 받으면서도 지극히 작은 자를 섬기며, 함께 사는, 더불어 사는 생활공동체를 실현했다. 이는 결국 로마의 폭력을 무력화시켰다. 예수님은 약함 가운데서도 강한 힘을 드러냈다.

사랑은 폭력을 무력하게 만든다. 오늘 폭력이 난무하는 시대에 어머니의 아가페가 절실하다. 조건 없는 사랑이 필요하다. 미래로 나가기 위한 새로운 눈, 상상력이 필요하다. 복음을 보고 들을 수 있는 맑은 눈과 청아한 귀가 필요하다. 이는 매우 고독하고 힘들다. 평생 쌓은 소유욕과 지배욕을 버린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

야고보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과 다르지 않다고 교육하고 있다. 그런데 성경을 매일 읽으면서 한국교회의 교인들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다. 초대교회와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말하면서도, 하나님의 참사랑과 복음을 상실했다. 이웃의 아픔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 우 는 자들의 눈물을 닦아줄 줄을 모른다.

대한민국 한복판에서 158명의 젊은이들이 죽었는데도, 모두가 책임을 회피한다. 오히려 서양 귀신문화축제에 참석해서 죽은 자들을 누가(?) (?) 책임을 져야 하냐(?)”고 항변한다. 우리는 우는 자, 물 한 모금이 필요한 자의 손을 잡지 않고서는 하나님나라에 참여할 수 없다. 교회는 가난하고 소외된 자 등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신앙공동체이다

3세기부터 교회는 호화로운 교회당을 건축했다. 거대한 교회당을 건축했다. 한국교회도 호화로운 교회당, 십자가 탑을 높이는데 경쟁을 벌였다. 헤롯도 솔로몬이 건축한 교회당보다도 2배 크게 건축했다. 이런 교회당은 교인들의 피와 땀과 눈물의 결정체이다. 솔로몬과 헤롯이 건축한 예루살렘 성전은 돌 하나 남지 않고 파괴되었다는 사실.

거대한 유럽교회 역시 박물관 또는 술집으로 변했다. 또 일부 교회는 이슬람 사원으로 변했다. 하나님의 참사랑을 잃어버린 한국교회도 언제 돌 하나 남지 않는 교회당으로 변할지 모르는 상황에 처해 있다. 성경은 분명하게 경고 한다.

우는 자에게 물 한 모금을 대접하라

70-80년대 한국교회가 외쳤던 교회성장론은 교회의 정통과 문화를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가난한 자, 우는 자들과 함께 성장했던 교회는 부자들을 위한 교회로 변질됐다. 이제 한국교회는 밑바닥 인간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렇다보니 고난당하는 노동자들을 위한 교회는 보이지 않는다. 노동자들은 절망한다.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은 하늘을 향해 소리친다. 모두가 보수보수 외치다가 보수주의에 떨어졌다.

오늘날 보수적인 한국교회는 선교초기 공동체의 끈끈한 연대가 무너졌다. 교회는 거대한 조직이 되었다. 소외된 자, 작은 교회를 돕겠다고 하는 교회는 전혀 보이지 않고, 부자들의 눈물을 닫아주는 교회만 보인다. 남은 재정의 일부를 작은교회 목회자들을 위해서 지출하고, 교회의 소임을 다했다고 말하는 목회자는 한마디로 이중적이다.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서는 수십억원을 사용하면서, 작은 돈을 가난한 이웃과 작은 교회를 위해서 지출하고, 자신을 드러내는 목회자를 보면 안타깝다. 이런 상태로는 고도로 발달된 산업사회에서 인간을 변화시킬 수 없다. 가던 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아야 한다. 특히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자본주의적 주술사를 청산하고, 더러워진 영혼을 정화시켜야 한다.

그리고 초대교회의 공동체성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는 전위대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결실로 가난한 사람, 슬피 우는 자들을 없게 해야 한다. 한마디로 물질을 영적으로 성화시켜야 한다. 제도적으로 교인들을 옭아매는 것이 있다면, 과감하게 버리고 청산해야 한다.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그리스도인들은 결단해야 한다. 청산 할 것은 청산하고, 새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모두 물질로 풍성한 사람이 아니라, 영적으로 풍성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교육하는 진리이다. 또한 이 길이 기독교인들이 가야 할 길이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의 산물인 돈에 길들여진 한국교회가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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