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 성 길 목사
권 성 길 목사

애정의 고백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언어가 의미를 전달하는 수단이라고 해서 무슨 말을 하든 말만 했으면 끝나게 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말 제주가 아무리 많더라도 아무 데나 남용하면 오히려 역효과를 볼 때도 있다. 특히 애정 문제에 있어서 그렇다. 사랑은 사실은 말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고백하고 행동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그것이 훨씬 더 말보다도 더 많은 진실성을 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눈동자를 가리켜서 내 마음의 호수라고 부른다. 검은 눈동자는 푸르다 못해 파랗게 빛나고, 조용히 맑은 정서가 흐르는 눈동자는 마치 물고기의 안식처인 잔잔한 호수처럼 빛난다. 그래서 사랑하는 이의 눈동자를 본 사람은 마치 그 호수 위로 흰 돛단배를 타고 가며 그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들을 줍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누구나 사랑에 수줍음이 있다. 진실한 사랑일수록 수줍음이 많고 육체적인 엔죠이로 싫증이 난 사랑일수록 수줍음이 없이 대담하기만 하다. 마치 용감한 대장부들끼리 만나서 시합이나 하듯 이미 욕망에 싫증이 난 야인들은 대담하기만 하다. 그렇지만 아직도 순수하고 아직도 참되기만 하려는 두 남녀 관계에서는 어느 쪽도 대담하게 말을 꺼내지 못한다. 사실로 서양사람들처럼 대번에 「나는 너를 사랑해」나 나을 수는 없는 것이 진실한 애인들의 공통적인 수줍음이다. 그렇다면 이때 굳이 그렇게 어색한 고백으로 고통받을 이유가 무엇이랴. 진실로 존경하고 아끼고 애무해주고 싶은 상대라면 이미 그 눈동자가 웅변가가 되는 걸 어찌 긴 설명이 필요하랴!

또 사랑은 말보다 행동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행동의 고백이라고 해서 포옹과 키스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애정을 고백하는 행동이란 그런 육체적인 접근보다도 생활을 통한 행동표현을 의미한다. 살림을 미리 차려버린 부부도 아닌 바에야 무슨 생활이 따로 있으랴 만은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다. 만나고 헤어지고 의견을 나누고 멀리 산과 들을 찾아가는 것이 모두 생활이다. 그리고 이밖에 좀 더 생활다운 생활을 애인인들 미리 마련해 볼 수도 있다. 

젊은 대학생들은 학문에 바쁘다. 책을 읽고 연구하고 리포트를 작성하는 것이 모두 중요한 생활인데 이런 생활에서 자기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작업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겠는가? 또 그런 생활을 함께 나누어본다고 하자. 장래를 위해서 노력해 나가는 진리탐구의 작업장은 자신들을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자리다. 여기는 큰 노력이 필요하므로 사랑하는 사람의 도움도 필요하다.

사랑이란 무엇보다도 상대방을 돕고 함께 고생하고 함께 장래를 약속해 나가자는 행동의 구체적인 증거에서만 드러나는 것이요, 그렇다면 말보다 먼저 이런 생활의 언어, 더 진실한 애정 표현의 언어가 필요하지 않을까?

사랑의 고백은 사실로 말이 필요 없는 것, 말로써 천 냥 빚을 갚자는 흥정판이 아니요, 브로커들을 내세운 암거래 장바닥이 아닌 바에야 말이 필요치 않다. 사랑의 고백을 수작(酬酌)으로 지껄여 끝내보자는 것처럼 어리석은 수작은 없다. 

사랑의 고백은 눈으로 하고 행동으로 하는 것, 눈동자가 사랑을 고백할 때 그 눈동자의 언어는 곧 「사랑의 시(詩)」요, 행동이 그렇게 표현할 때, 그 언어는 곧 「사랑의 원무(圓舞)」일 것이다. 그리고 참된 사랑의 기쁨은 이 시와 춤의 언어를 읽을 수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새세움교회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