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 성 길 목사
권 성 길 목사

죽음도 여러 가지지만 그중에는 장사(情死)라는 것도 있다. 너무도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사랑의 지속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그 뒤에 올 괴로움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는 것, 기처럼 정에 겨워 함께 수면제를 마시거나 배를 타고 멀리 나가 돌아오지 않거나 한강 물에 투신하거나 하는 것을 정사라고 한다. 사랑에다 죽음을 건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생명까지 건다는 것은 자기의 모든 것을 거는 것이다. 남김없이 모든 것을 거는 까닭은 사람이 사랑에 있어서 그만큼 진실의 극한치(極限値)에 이를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형태는 사람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프리카의 사막에서 가장 무서운 독침을 지니고 있는 전갈(全竭)은 때때로 그 독침처럼 무서운 사랑을 한다. 한낮에는 뜨거운 태양 아래서 모두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어버리고 말지만 해가 지고 달과 별이 빛나는 밤이 되면 그들은 모래위를 기어 나온다. 작열하는 사망의 태양은 그들에게 말할 수 없는 고독을 주었을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밤이 되면 모두 모래 위를 그어 나와 한자리에 모이게 된다. 

그렇지만 한자리에 모여 한 낮의 고독감을 풀며 이야기를 나누는 이들은 서서히 살벌한 살룩전(殺戮戰)을 버리기 시작한다. 서로서로 물어뜯고 상대방의 숨통을 끊어 놓는 것이다. 수백 마리의 시체가 쌓이기도 한다. 죽은 놈들은 모두 수놈이다. 그리고 남은 놈 두 마리가 있다. 한 놈은 수백 마리 중에서 마지막까지 자기 실력으로 살아남은 숫놈 승리자요, 나머지 한 놈은 그것을 구경만 하던 암놈이다. 이들 사회에는 일처다부제(一妻多夫制)도 없고, 일부다처제(一夫多妻制)도 없다. 오직 한 마리의 암놈과 한 마리의 수놈만이 부부가 될 수 있는 것, 그렇기 때문에 수놈들은 혼자서 여왕을 독점하기 위하여 나머지의 모든 수놈을 죽여버리는 것이다. 

살육전이 끝나면 이 두 마리의 부부는 함께 달밤의 데이트를 시작한다. 서로서로 앞발을 붙들고 사막을 거니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흥분 속에 말려 들어가 드디어 교미를 시작한다. 그리고 이 마지막의 흥분이 사라지면 이때는 전보다 더욱더 무서운 장면이 벌어진다. 암놈이 수놈을 잡아먹어 버리는 것이다. 그것으로 하룻밤의 역사는 끝난다. 전쟁, 사랑, 죽음, 그리하여 이튿날 다시 뜨거운 태양이 떠오르면 사막에는 어제와 다른 역사의 페이지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세상에 정사하는 애인들이 없나 보다. 그토록 열심히 연애를 잘하고 울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야단들이지만 그러한 연애건수(戀愛件數)는 거의 없는 셈이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침착해지고 건전해진 탓일까?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정사를 장려할 필요는 조금도 없지만 그런 정사 건수가 거의 사라져 간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무서운 사실을 일러주는 것임이 틀림없다. 그것은 사람의 종말이 끝난 시대, 쉽게 만나고, 쉽게 해어지고, 남들이 비방하는 성가신 연애는 굳이 할 필요가 없고, 또 굳이 한 여자, 한 남자만을 찾을 이유도 없고, 그만한 여자, 그만한 남자가 또 얼마든지 있는 걸, 육체관계를 했었다느냐 그것까지 식은 죽 떠먹은 자리요, 한강 내 지나간 자리요, 누가 알길 허느냐, 또 그렇다고 아무리 성실함을 자부한들 요즈음 남자들이 여자의 「아다라시(숫처녀)」를 믿어주길 하나, 

그렇다면 차라리 남들이 방해하는 상대는 그만 떼어버리면 고만 아니냐. 이런 사고방식 속에서 무슨 참된 사랑이 있을 수 있으랴! 정사가 없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랑의 종말 시대가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랑의 종말이 왔다는 것은 그만큼 현대인들이 정서적인 가치를 부정하고 순간의 값싼 환각제(幻覺劑)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 그런 의미에서 이것이 현대 정신문명, 한국 정신문명이 도산(倒産)해 버릴 징조가 아닐까? 

새세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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