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 성 길 목사
권 성 길 목사

대중가요에서 「사랑」을 뺀다면 대중가요가 망해버릴 것이다. 그만큼 대중가요는 그 가사의 소재 반 이상이 사랑 타령으로 되어 있다. 그 사랑이 어쩌면 모두 그토록 이유 없는 한숨과 눈물로만 가득 차 있고 자존심이 다 빠져버린 굴욕적인 사상으로 되어버렸는지는 알 수가 없다. 가버린 님을 원망하는 노래, 다시 돌아오라고 애원하는 등 대단히 굴욕적이다. 대중들은 그처럼 자존심도 없이 서로 짝만 이루어진다면 만족하다는 사랑의 사상을 갖고 사는 것일까?

이 같은 정신은 옛날의 민요에도 흔했다.

시(詩)라는 것은 어떤 사상 또는 감정의 압축적인 표현이다. 지극히 많은 말을 생략하고 아주 적은 말로써 나머지를 대변하는 것이 시의 특질이다. 그런데 여기에 무슨 시적인 표현이 있겠는가? 「가십니까? 가십니까? 나는 어찌 살라 하고 버리고 가십니까? 당신을 잡아 매어두고 싶지만, 서운하면 다시 아니 오실까 봐 서러운 님 보내옵나니 가시는 듯 그렇게 또 돌아와 주소서」…….

그런데 이 시가 더욱 시답지 않고 매력이 깎기고 점수가 깎여버린 것은 그 시정신(詩精神)의 천박성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랴! 떠나 버리겠다는 님을 그토록 굳이 붙들고 싶어 할 이유가 무엇이며 또 붙들고 싶으면 그대로 붙잡아 매어 둘 것이지 다음의 기회를 위하여 놔주며 아양을 떤다는 것이 무엇인가?

사랑이란 이런 천박한 기교나 쑥스러운 몸부림일까? 이것은 사랑의 사촌 벌은 되지만 사랑 자체는 아니다. 이 같은 자기 인격의 경멸 속에 무슨 진실한 애정의 형태가 이루어질 수 있단 말인가?

사랑이란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고 있는 그것처럼 어떤 재주를 부려가며 마지막 키스와 성교만 하면 그만인 그런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선 전인격(全人格)의 결합이어야 한다.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며 서로 이해하며 스스로 조금도 자기 인격을 지킴에 있어서 양보가 없을 때 진실한 사랑이 가능한 것이 아닐까?

100%의 믿음 속에나 참된 애정은 깃들 수 있는 법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자신의 자존심을 꺾어가며 어떤 감춰진 비밀을 가지고 계획적으로 나선다는 것인 있을 수 없다. 있는 인격은 인격대로 그 전부를 가지고 교환해야 한다. 그 인격은 지식수준도 아니고 사회적 지위도 아니고, 자기 집에서 가보(家寶)처럼 고이 간직해오는 양반족보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과학적 진실을 추구해 나가는 노력, 양심을 생명으로 삼고 사수해나가는 노력, 아름다움을 추구해 나가는 고매한 창조적인 노력, 이런 노력으로 가꾸어진 그의 사랑과 성격을 말한다. 

그러므로 사랑은 믿을 수 있어야 하고 존경할 수 있어야 하며 여기서 만일 자존심도 버리고 흥정하려 나선다면 그것은 천박한 인간들이 사랑이란 가명(假名)을 빌려 저지르는 가장 우스꽝스러운 통속극(通俗劇)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새세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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