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순간에 불과한 인간의 생명

인간 모두는 부활의 계절, 생명의 계절에 생명은 죽음을 거부하고, 생명은 생명을 낳고, 생명에 응답한다는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창조 이후부터 영원한 삶,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죽음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해 왔다. 분명한 것은 인간은 누구나 한세상을 살고, 죽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창조적 섭리이다. 무한하고 광대한 우주에 비교하면, 인생은 왜소하다. 수십억년의 우주적 시간에 비교하면, 인생은 한 순간이다. 인간은 그것에 대하여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인간 모두는 인생의 한 순간을 보다 아름답고, 보람되게 살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그러나 오늘을 살아가는 인간은 돌로 만든 떡을 먹고 마음이 굳어져, 희황 찬란한 빛깔에 눈이 어두워, 기계문명에 얽매여 그저 눈앞에 주어진 것, 틀에 박힌 것만을 보고, 그것에 몰두한 나머지 예수님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망각한채 살아가고 있다. 틀에 박힌 삶을 살면서, 지배욕과 소유욕으로 가득차 영생의 길을 스스로 저버리고 있다.

이것이 오늘날 인간의 삶이며, 마음에 내재된 탐욕이다.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부터 자신의 신분과 세력, 세상권력을 개똥같이 알았다(고린도전서 126-12). 각박한 세상, 박스 속에 갇혀 사는 인간들이 영원한 생명의 길에 이르는 것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라고 힘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며, 또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태복음 2237-39)는 예수님의 말씀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2237-39절은 한 율법학자가 예수님에게 무엇을 행해야 영생에 이르는가에 대해서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 율법학자에게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고 반문한 것에 대한 율법학자의 대답이다. 예수님은 율법학자의 대답을 듣고 칭찬해 주었다. 율법학자의 대답은 옳았다. 그러나 율법학자의 대답 속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내포되어 있다. 율법학자는 생명을 얻게하는 율법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율법학자의 태도는 잘난 지식인, 특히 종교지도자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냈다. 이 율법학자의 행위는 오늘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한국교회 지도자의 모습이라는데 안타깝다. 율법학자는 구체적인 의미와 어떻게 해야만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다.

그의 질문 속에는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의도가 짙게 깔려 있다. 또한 자신을 과시하려는 질문이었다.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에 대해서 예수님으로부터 들으려는 진지하고 겸허한 자세가 아니었다. 자신의 얄팍한 지식을 예수님과 토론을 벌이려고 했다. 오늘을 살아가는 바리새적인 교인들의 모습을 이 율법학자에게서 그대로 본다. 탐용에 가득찬 인간의 모습을 본다.

인간 모두는 부활의 계절, 생명의 계절에 “생명은 죽음을 거부하고, 생명은 생명을 낳고, 생명에 응답한다”는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인간 모두는 부활의 계절, 생명의 계절에 “생명은 죽음을 거부하고, 생명은 생명을 낳고, 생명에 응답한다”는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너와 그를 죽여 내가 사는 그리스도인의 변화중요
자신에게 중심 둔 인간 예수님으로부터의 생명 상실

어린아이 마음을 지녀야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감지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행동은 그리스도인답지 않으면서, 자신의 성경지식을 드러내며, 믿음이 강한 사람처럼 보이는 가식적인 이 율법학자와 전혀 다르지 않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기도는 쉬지 않고 하는데, 행동은 없다. 그렇다보니 얄팍한 성경지식으로 예수님을 교리화시키고, 제도화시켜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업신여기며, 정죄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이로 인해 곳곳에서 이단·사이비가 출현하고 있다, 마음이 정화되지 못한 목회자들은 예수님을 팔아 먹고사는 가롯 유다가 되어가고 있다.

어린아이같이 마음 열어야 생명의 말씀을

토론을 좋아하고, 법을 내세우는 사람치고 생명을 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거나, 자신을 옳게 보이려고 하는 자는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다. 이들은 위선자들이다. 정화되지 않은 사람들이다. 마음이 닫혀 이웃을 받아드리지 못한다. 성령이 나에게서 너와 그에게로 흐르지 않는다. 고인 물과도 같이 마음이 썩어 이웃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받아드리지 못한다. 예수님은 어린아이같이 마음을 열어야만 생명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오늘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이 말씀으로 교인들을 교육한다. 율법학자의 자세와 대답은 일치하지 않는 상반된 대답의 내용이다. 그의 자세는 남을 시험하려는 오만한 자세로 가득 차 있다. 자기를 옳게 보이려는 자기중심적 자세였다. 위로 하나님에게 중심을 두고, 좌우로 이웃에게 중심을 두고 살아가는 인간의 자세는 아니다. 분명 인간은 자신에게 중심을 두고 살아가도록 창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십계명 1-4계명을 보면, 나의 중심은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옮겨진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 향해 있다. 성경 마태복음 2237-39절에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라고 힘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했다. 이 말씀은 나의 마음을 열어 하나님에게 옮겨 놓으라는 것이다. 문제는 인간 모두가 하나님을 믿는다면서도, 모두가 하나님의 참사랑을 잃어 버렸다.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파괴되고 있다.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간다. 소유욕과 지배욕에 가득 차 인간사회를 혼한에 빠트리고 있다.

그렇다보니 하나님을 향해 막말을 쏟아내고, 인간을 신으로 만들어 버린다. 오죽했으면 개신교에 교주가 몇 명인지를 모른다는 말까지 나왔겠는가. 그렇다 신자유주의경제체제에 오염된 오늘 한국교회는 신의 자리를 돈으로 대치시키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오늘 한국교회 안에서 돈이면 안되는 것이 없다는 말까지 나온다. 사실 모 단체에 소속된 목사들, 아니 정화되지 않은 한국교회 목사들은 돈이 보이는 곳이면 어디든지 몰려간다. 신의 자리가 돈으로 대치됐다.

모 단체의 대표회장을 지낸 교회지도자들은 모 단체 초청강사로 참석, 한 개인을 이상의 교주로 만들어버리는 잘못을 범했다. 그것은 신학대학의 일부 교수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영원을 팔아먹는 교회지도자이며, 신학자들이다. 이들에게는 생명이 없다. 사랑도 없다. 생명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영원한 생명의 길을 상실했다. 그러면서 이들은 이단삼단을 논한다. 그래서 어느 목회자는 이들을 향해 신천지보다도 못한 이단자·독사이다고 말하며, “한국교회의 앞날이 걱정스럽다고 비판했다.

그렇다 이 목사의 말대로 한국교회는 이웃교회, 이웃교단, 이웃단체, 이웃교파, 이웃종교, 동역자에 대해서 비난하고, 정죄할 자유와 자격이 없다. “똥 묻은 돼지가 겨 묻은 돼지를 나무라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오늘 한국교회는 생명을 잃어버렸다. 예수님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도 없다. 하나님의 참사랑을 잃어버려 복음의 빛도 상실했다. 이제라도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지 않으면, 예수님으로부터의 영생의 길은 없다. 이들에게 있어서의 삶은 공허하다.

나를 개방해 중심을 이웃에게 두자

하나님의 사랑 계명에서 나의 중심을 하나님에게로 옮겨져야 한다. 그것은 이웃사랑의 계명도 마찬가지이다. 9계명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도 나의 마음을 열어 나의 중심을 이웃에게 옮기라는 말이다. 내가 내 몸을 아끼고 사랑하듯이, 내 이웃을 인 것처럼 아끼고 사랑하라고 교육하는 것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나의 중심을 옮겨놓는 행위, 이웃과 더불어 인정이 흘러넘치는 생명공동체를 이루라는 말이다.

사실 중심이 나에게 나만 있을 때에는 이웃을 사랑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한다. 무게의 중심이 나에게만 있는 사회는 삭막하다. 삭막한 사회는 언젠가는 무너지고 파괴된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개인이기주의와 자기중심적인 생활로 인해 이웃의 하나 남은 속옷까지 빼앗고, 살인하며 공포의 분위기가 조성된다. 그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혼자만 살겠다는 교회와 교인들이 넘쳐나면서,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세태가 됐다. 세상 속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민중들의 속에서, 강도만나 신음하는 사람들 속에서 빛과 소금의 맛을 잃어버렸다.

일부 교회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교회가 혼자만 살겠다고 아우성친다. 사실 한국교회는 이웃교회, 이웃교단, 이웃단체, 이웃종파, 이웃종교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이웃교회의 다름, 이웃교단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이단·사이비논쟁만 만연하고 있다. 이제 한국교회도 너를 죽여야 내가 사는 교회가 됐다. 이제 교회는 질서도 없다. 혼란만 가중되고 있다.

힘을 가진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교리로 만들어 힘없는 동역자를 이단으로 만드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한 이단연구가는 해마다 여성목회자 한명씩을 이단으로 만든다. 여기에 걸려든 여성목회자는 이단·사이비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친다. 이웃종교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종교전쟁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생명과 사랑을 몰각한 종교 간의 싸움을 일부 목회자와 종교인은 진리의 싸움이라고 종교전쟁을 정당화 시킨다.

이웃단체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진보와 보수가 성령 안에서 하나 되었던 부활절연합예배마저도 금년도에는 5개로 분열되어 드렸다. 또한 부활절연합예배를 드리는 장소 앞서 부활절퍼레이드를 벌이다가 쌍욕이 오고가는 장면도 연출했다. 한마디로 한국교회 보수연합단체의 분열된 악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냈다. 이는 하나님의 참사랑(기쁜소식=복음)을 잃어버린 결과이다. 한국교회에서 종교적 관용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무게의 중심을 나에게 둔 결과이다.

예수님께서 어린아이와 같아야 한다고 말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어린아이는 사심이 없다. 위선도 없다. 마음을 통째로 주고받는다. 속과 겉이 전혀 다르지 않다. 위선자는 자기 위주로 산다. 이중적으로 살기 때문에 자신을 폐쇄시킨다. 위선자는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아량이 없다. 인간은 자기 안에 중심을 두고 살도록 창조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인간은 하나님에게 중심을 두고 또 이웃과 더불어 살도록 창조되었다. 또한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창조세계에 기대어 살도록 창조했다.

참된 생명을 잃어버린 인간

인간이 자기 자신 안에만 중심을 두고 살면, 인간은 참된 생명을 누릴 수 없다. 이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 이웃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참된 생명을 누릴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에 대한 계명을 잘 알고 있다. 아는 것만으로는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 성경 속의 진리이다. 문제는 인간의 앎과 행함 사이에 단절이 크다. 인간의 행동하지 않는 지식과 말은 한마디로 공허하다.

이것은 인간이 타락했다는 것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계를 창조했고, 말씀으로 인간을 구원한다. 지식과 행함 사이의 깊은 단절을 지니고 있는 인간은 실제로 행동함으로써 생명에 이를 수 있다. 성서는 강력하게 행하라고 강권하고 있다. 이 말속에는 이웃사랑이 인간의 삶 속에서 문제되고 있음을 그대로 내포하고 있다. 하나님 사랑에 대한 계명은 인간들 사이에서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웃사랑에 대한 계명은 논의의 대상이 되어왔고 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인간의 마음속에 내재된 소유욕과 지배욕을 버리지 않는 한 계속될 것이다.

창조이후 하나님 사랑은 자명하다. 헌데 이웃사랑에 있어서 이웃이 누구냐라는 것이며, “어떤 방식으로 이웃을 사랑하느냐의 문제는 항상 논란이 되어 왔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내 놓는다. 이 이야기 속에서 강도를 만나 죽게 된 사람을 보고, 레위인과 제사장은 피해서 그대로 지나갔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만난 자를 측은히 여기고 구해 주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종교인을 대표한다. 이들은 율법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신앙인임을 자부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율법지식과 신앙은 강도만난 사람을 외면해 생명력을 잃어버렸다. 이들의 율법과 지식은 성전에서만 쓰이는 것이 되었다. 그들은 지식과 신앙을 마음의 서랍 속에 가두어 필요한 때만 끄집어 내 쓰는 물건과 다르지 않다. 이들의 율법지식은 죽은 것이며, 생명을 잃어버린 신앙을 소유한 자들이다. 이들의 지식과 신앙은 하나님의 참사랑과 생명을 가리는 결과를 가져다가 주었다.

이들은 하나님의 참사랑과 생명을 떠난 삶을 영위함으로써,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 예수님의 삶의 현장에 있었던 가난한 민중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이 되었다. 이들은 죄 많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처절한 예수님을 알아보지를 못한다. 오늘날 흔히 목회자와 교인들을 향해 행함이 없다고 말한다. 한국교회 목회자와 교인들은 새벽마다 성경을 읽고, 지식을 쌓으면서, 신앙생활을 한다. 눈물을 흘리며 기도도 한다.

이들을 향해 믿음이 좋다고 말한다. 이들에게서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이는 분명 행동하지 않는 믿음이며, 생명을 잃어버린 신앙이다. 인간사회,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혼란과 고통만을 안긴다. 공동체는 깨지고 인간사회는 반목과 갈등이 끊이지를 않는다. 교회 안에서는 분쟁만 일어난다. 강도만나 신음하는 이웃을 위해서 사용해야 할 하나님의 헌금은 변호사비용으로 새어 나가고 있다.

생명은 생명을 낳고 생명에 응답한다

갈릴리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업신여겼다. 원수처럼 여겼다. 예수님께서 이런 사마리아인을 모법적인 이웃으로 설정한 것은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큰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사마리아인들은 종교와 거리가 멀었다. 율법지식도 없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마음을 열어 이웃을 받아드리는 생명이 살아 움직였다. 생명은 죽음을 거부한다. 생명은 생명에 응답한다. 생명은 생명을 낳고 생명을 지킨다.

내 속에 생명이 있다면, 죽어가는 생명을 보고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사마리아인은 강도만난 사람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다. 측은히 여기는 사마리아인의 마음은 죽어가는 생명을 구해주었다. 측은한 마음을 쉽사리 누를 수 있었던 제사장과 레위인은 몸은 살아 있었어도, 생명을 잃어버린 죽은 인간이다. 이들에게는 하나님과 잇닿는 영원한 생명이 없다. 어디까지나 이들은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종교지도자이다.

인간은 혼자 살수 없다. 모든 범죄와 모든 소외는 혼자 살려고 한데서 비롯되었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전쟁과 기아, 갈등, 살인은 나를 중심으로 살려고 하는데서 일어났다. 이렇듯 나와 너를 위해서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제3자가 얼마나 희생되고 소외되고 있는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나와 너를 위해 제3자인 를 희생시키며 사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인정이 메말라버렸다.

나를 개방해 이웃을 받아드리는 최소한의 양심마저도 팔아버렸다. 이들에게는 영혼도 없다. 이웃나라에서 전쟁과 전쟁으로 사람이 죽어가는 데도, 힘겹게 아리랑고개를 넘었던 강제징용 피해자,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가 시궁창생활보다도 못한 삶을 산 이 땅의 소녀들의 한의 소리가 하늘에 사무치고 있는데도, 아무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이 땅의 정치지도자와 그리스도인을 보면, 하나님의 참사랑과 생명을 잃어버린 대제사장과 레위인을 보는 것 같다.

오늘 곤궁한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우리의 참 이웃이 누구인가를 고민하게 한다. 언론에 보도되는 일본의 행동, 미국의 우리 대통령실 도청 소식을 들으면서, 일본과 미국이 우리의 진정한 이웃인가. 나를 중심으로 사는 이와 국가는 나와 너를 죽음으로 이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강도만난 이웃을 통해 내가 구원받는다는 진리를 잊지 말자.

이 세상은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나의 중심을 하나님에게 두고, 나의 중심을 이웃과 함께 나누자. 이 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예수님으로부터의 생명에로 이끌리며, 생명이 지배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진리를 삶으로써,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남을 위한 존재가 됨으로써, 친히 생명이 되고 생명에 이르는 길이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의 삶을 열고, 가정을 개방해서 상처투성이인 강도만난 이웃을 맞이하자.

하나님의 참사랑을 실현을 소명 받은 목회자들은 최소한 신천지 교인보다도 못한 먹사, 독사는 되지 말아야 한다. 인간을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생명에게로 이끄는 목회자가 되자. 그리스도인이 되자. 또한 영생을 교육하는 목회자, 생명을 이어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거부하고, 생명에 응답하며, 생명을 잉태하자. 그리고 무게의 중심을 하나님에게 두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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