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보 연 교수
장 보 연 교수

부모에 의해서 버림받은 아이, 또 조국에 의해서 버림받은 아이들에 대한 가슴 아픈 이야기들이 종종 SNS와 각종 언론을 통해 국민들에게 알려진다. 오늘은 <프레시안>에 ‘372명 해외입양인들의 진실 찾기“ 가족 모르게 노르웨이로 입양돼 학대 받으며 자랐다는 내용이 보도됐다. 글의 내용은 70년대 위탁가정에 맡겨진 것으로 알았던 ”막내딸을 찾아달라“는 아버지의 유언으로 시작된다. 해외입양인 정경숙씨(노르웨이)의 이야기이다.   

보도에 따르면, 아버지는 70년대 위탁가정에 맡겨진 것으로 알았던 막내딸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의 노력은 입양인 정씨의 말대로 헛된 노력이었다. 그녀는 1989년 시골에서 태어났다. 입양서류는 다르게 기재되어 있었다.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다. 어린 아기와 여자 형제들은 엄마를 잃었다. 아버지는 글로 읽지 못하고, 쓰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이웃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만큼은 알고 있었다. 

결국 정씨의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한 명은 겨우 12살의 나이에 다른 집에서 일을 시작하여 매달 가족에게 돈을 보내야 했다. 두 명은 위탁가정에 맡겨졌다. 정씨는 병원에 가야 하는 몹시 아픈 아기였다. 그래서 정씨는 어느 기관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병원으로 이송되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정씨도 병원에서 회복된 뒤 위탁가정에 가는 걸로 생각했다. 그래서 세 딸이 일시적으로 위탁가정에 맡겨졌다가 나중에 안동에 있는 농장으로 다시 데려오길 고대했다.

가정에 위탁된 둘은 찾았다. 하지만 셋째는 영원히 사라졌다. 아버지는 1974년에 돌아가실 때까지 정씨를 찾아 헤맸다. 경숙씨는 1970년에 이미 아무도 모르게 노르웨이 해안에 도착했다. 하지만, 가족과 친척들은 제가 아직 살아 있다면, 한국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1986년 입양 후 처음 만난 가족과 친척들은 제가 해외로 입양되었다는 사실에 모두 충격에 빠졌다. 아버지는 임종하실 때 큰 언니에게 이렇게 유언했다. 

"네 여동생, 경숙이를 꼭 찾아줘."

아버지는 우리 자매가 함께 있기를 바라며, 큰 언니에게 자신의 임무를 넘겨주었다. 아버지는 마지막 남은 가족들이 유대를 키워가며, 가문의 명맥을 잘 이어가길 원하셨다. 우리를 통해 그가 살아있고, 그의 이름도 살아있으며, 정 씨 가족은 모든 역경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다. 아버지 역시 위탁가정의 아들이었다. 먼 친척들과 함께 지냈다. 때문에 아버지는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자신의 자녀들을 위해 다른 것을 원했던 것 같다. 경숙씨는 노르웨이 외딴 섬에 도착해 평생 방치와 심한 학대를 받으면서 살았다. 그 결과 정씨는 삶의 고난으로 인한 복합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진단을 받았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경숙씨가 후천적으로 받은 것이지 타고난 것이 아니었다. 경숙씨는 대한민국이 지금이라도 이런 인신매매를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경숙씨는 “인신매매에 가까운 이런 입양은 아이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서, “잘못된 입양은 아이들의 영혼에 상처를 줄 뿐이다. 제 조국이 여전히 '서방에 아동을 수출하는 국가'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자랑스럽지 않다”고 꼬집었다. “한국인으로서 부끄러움을 느낀다”고도 했다. 

그리고 경숙씨는 “미래의 한국 어린이들이 저처럼 더 이상 돈 때문에 서방으로 보내지는 경험을 하지 않게 해달라”고 주문했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부유한 나라이다. G10개국 중 하나이다. 이제라도 대한민국은 부모에 의해 버려진 아이들이, 또 다시 조국에 의해 버려진 지난날을 되돌아보고, 전 세계에 입양된 아이들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는 건네야 하지 않을까. 

경숙씨는 “한국은 앞으로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는 말에 담겨 있는 화합의 의미를 진정성 있게 실천해야 한다”면서, 자신의 말을 끝냈다. 

굿-패밀리 대표•개신대 상담학교수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