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은 시집이다

천천히 걷는 들길은 읽을 것이 많이 남은 시집이다
발에 밟히는 풀과 꽃들은 모두 시어다
오전의 햇살에z 일찍 데워진 돌들
미리 따뜻해진 구름은 잊혀지지 않는 시행이다
잎을 흔드는 버드나무는 읽을수록 새로워지는 구절
뻐꾸기 울음은 무심코 떠오르는 명구다

벌들의 날개 소리는 시의 첫 행이다
씀바귀 잎을 적시는 물소리는 아름다운 끝줄
넝쿨풀은 쪽을 넘기면서 읽는 행이 긴 구절
나비 날개 짓은 오래가는 여운이다
바람이 지나가고 나면 혼자 남는 파밭
종달새 날아오르면 아까 읽은 구절이 되살아나는
보리밭은 표지가 푸른 시집이다
갓 봉지 맺은 제비꽃은
초등학교 국어 책에 나오는 동시다

벅찬 약속도 아픈 이별도 해본 적 없는 논밭
물소리가 다 읽고 간 들판의 시집을
풀잎과 내가 다시 읽는다

문현미 시인
문현미 시인

온갖 말들이 난분분한 시대다. TV를 켜도, 유튜브를 틀어도 말 잔치로 떠들썩하다. 어찌 귀를 막고 살 수 있으랴. 사람과 사람이 모여서 사는 곳인 만큼 말도 많고 탈도 많을 수 밖에 없다. 중국 고대 요임금 시절 은사隱士 허유가 귀를 씻었다는 고사가 생각난다. 관직을 맡아 달라는 임금의 요청을 듣고 거절한 그는 안 듣는 것만 못하다 하여 귀를 씻었다고 한다. 그런 절개와 지조를 지닌 사람이 요즘 있기는 할까. 그만큼 드물기 때문에 고사로 전해져 오리라. 귀를 씻을 수도 막을 수도 없는 작금의 상황에서 어떤 자세를 견지해야 할까. 이편과 저편의 이분법적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야 할텐데...... 다만 사리를 잘 분별할 수 있는 눈이 필요한 때다. 마음 거울을 갈고 닦으면 밝은 눈을 지닐 수 있을까. 무릎의 기도로 믿음의 지경을 넓히면 가능할 것 같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숨이 턱턱 막히던 한여름의 때는 곧 지나가리라. 너무 덥거나 추우면 종종 생각조차 멈추게 된다. 이제 서서히 찬 바람이 불어올 테고, 풀벌레 소리가 간간이 들릴 것이다. 그러면 생각의 바퀴가 스르르 굴러 갈 것이다. 들녘에 있는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가슴에 알알이 박히는 순간이 찾아올 거다. 물론 누구나 그런 경험을 할 수는 없다. 아무리 귀한 것이 눈 앞에 있어도 그 가치를 모르면 소용이 없지 않은가. 이기철 시인의 눈에는 들판에 있는 모든 게 시가 된다. 그래서“들판은 시집이다”라는 제목이 탄생한다. 

“발에 밟히는 풀과 꽃들은 모두 시어”이니 들판이 시집이 될 수 밖에 없다. 돌과 구름, 버드나무와 뻐꾸기 울음도 모두 멋진 시구가 된다. 시를 읽을수록 구구절절 시가 아닌 게 없으니 절로 감탄하게 된다. 시인의 눈으로 바라보면 이리도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언제 한 번이라도 벌들의 날개 소리를 시로 생각한 적 있었던가.“오전의 햇살에 일찍 데워진 돌들, 씀바귀 잎을 적시는 물소리, 갓 봉지 맺은 제비꽃”등등. 그냥 스쳐지났던 것들이 그의 눈을 통과하면 시가 된다. 이런 게 살면서 느끼는 상큼하고 다정한 기적이 아닐까. 바람이 다 읽고 가기 전에 서둘러 들녘의 시어들을 담아야겠다. 단풍으로 물든 시집 한 권 미리 읽는 초가을 무렵이다.
     
백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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