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보 연 교수
장 보 연 교수

우리는 살아가면서 운명이란 말과 숙명이란 말을 자주 듣고, 자주 한다. 운명은 앞에서 보이는 것들을 피하려고 노력하고, 피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숙명은 예견치 못한 것들이 자신에게 덮쳐 피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운명보다 힘들고 어렵고 피할 수 없는 것이 숙명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예견치 못한 일들에 부딪친다. 그대로 덮쳐오는 고난을 당하면서, 하늘을 원망한다.  

우리는 일제 36년과 6.25사변을 거치면서, 매우 어렵게 살았다. 당시 부모들은 남의 집에 가서라도 따뜻한 밥 세끼를 먹고 살라고 해외로 입양을 보내거나, 부잣집에 양자로 보냈다. 이렇게 입양, 양자로 간 아이들을 운명이라고 했다. 이 운명은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의 결정이 아니라, 부모의 결정과 사회의 구조 악에 의해서 시련을 겪을 수밖에 없었고, 겪고 있다. 이는 분명 숙명이다.

요즘 어린 나이에 여러 가지 사건으로 인해 부모를 여의는 일을 주변에서 자주 본다. 아이들에게 시련이 아닐 수 없다. 시련은 숙명이다. 인간은 숙명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서 자신의 삶,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아이, 사회의 구조 악에 의해 부모와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아이들 중에는 성실과 노력으로 어려움과 시련을 극복하며, 미래를 열어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삶을 비관하는 등 환경을 탓하며,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는 사람을 대할 때가 있다.

사람은 누구나 앞날을 궁금해 하고, 걱정하며 미래를 개척한다. 우리가 앞날을 안다면, 하나님의 징계를 안다면, 허랑방탕한 생활은 하지 않을 것이다. 중세시대의 평신도신학자들과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한 이후 인류세계가 시계바늘이 돌아가듯이 자연스럽게 돌아간다고 했다. 때문에 정화된 마음으로 하나님의 온기를 감지하며, 살아야 한다. 그럼에도 인간은 앞날을 궁금해 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 보니 인간은 자신의 길흉화복을 위해,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인가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토정비결을 보는가 하면, 미아리 고개 점집들을 찾아다닌다. 어떤 인간은 풍수지리를 믿고, 점집 무당의 말에 따라 인테리어를 바꾸거나, 조상 묘를 좋은 곳으로 옮기기도 한다. 집안에 부적을 붙여 놓기도 한다. 굿도 한다. 분명한 것은 무당굿이나, 토정비결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인간의 운명이나, 숙명은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고, 세상이 변했어도 해답을 주지 못한다. 인간의 삶과 운명은 하나님의 창조적 목적에 따라 기계적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을 향해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했다. 서로 마음을 주고받으면서, 성실하고, 근면하게 살라는 것이다. 그렇다 성실과 근면으로 자신의 앞날을 개척하는 사람은 미래가 보인다. 새로운 세상으로 나갈 수 있다.

모두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기 위해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해야 한다.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며, 근면과 성실한 삶을 살고 있는가. 모두가 욕심쟁이가 되어 자신만 살겠다고 아우성치지는 않는지. 예수 그리스도는 혼자 살려고 하지 않았다. 버림받은 자, 보잘 것 없는 자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였다. 예수그리스도는 이들 속에서 우리를 부르고 계시다. 정화된 사람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토정비결이, 무당굿이 우리의 앞날을 열어주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앞날은 나의 마음을 열어 너와 그의 고통과 고난을 받아드릴 때 비로소 열린다. 이 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건강하고 아름답게 된다. 혼자 살겠다고 아우성치며, 엄마찬스, 아빠찬스를 쓰면서, 출세의 가도를 달리며, 자신들만을 위한 세상을 구축하는 오늘의 세상에서는 새로운 세상이 열리지 않는다.     
         
굿-패밀리 대표•개신대 상담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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