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학채목사
세계 대부분 민주국가의 헌법은 장로교회의 헌법에 기초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다. 그만큼 장로교회의 헌법이 민주적이라는 것이다. 장로교단의 총회를 비롯한 노회, 시찰회, 교회 당회 및 제직회 등 각종회의를 보면, 서로 다투고, 논쟁을 벌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교인간, 회원간 대화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는데 이의가 없다. 대화가 없는 교단은 일인 독제체제와 다름없다. 한국의 일부교단은 돈과 힘이 있는 한사람의 말에 의해 움직이고, 모든 사안을 결정짓는데 익숙해져 있다. 영향력이 있는 한 개인의 입김이 크게 작용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한마디로 자조적이며, 자주적인 모습이 아니다.

헌데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의 교인들은 여기에 익숙해져 있으며, 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목사의 말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교회의 모습만 봐도 그렇다. 담임목사의 후임자를 결정짓는데도, 담임목사와 일부 영향력 있는 장로의 입김이 작용하고, 모든 회의가 이들의 생각대로 끌려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오늘 한국교회의 내분도 여기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다.

담임목사 세습을 이룬 대부분의 교회가 여기에 속한다. 누구도 교회 내에서 세습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거나, 토를 다는 교인이 없다는데 문제가 있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목회자와 교인, 교인과 교인 간에 대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도 성서에서 가난한 사람과 병든 사람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벌이면서, 많은 대화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병든자를 고쳐주면 될 일인데, 예수는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소외된 사람들의 집에 거하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한마디로 예수는 대화를 통해 인간관계를 형성했고, 자신의 권위를 세웠다..

한국 장로교회가 많은 다툼을 겪으면서, 분열되었다. 그것은 서로를 이해하지를 못하고, 양보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대화를 하되, 토론은 하되, 서로를 증오하거나, 분열의 불씨를 남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오늘 한국장로교회는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교단과 교회가 나갈 방향을 정한다는 것이다.

감독제도 하에 있는 대부분의 교단과 일인 천하의 교단은 감독이 바로 법이며, 교단의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개인의 말이 법이다. 이로인해 많은 교단이 무너졌으며, 지금도 법정에서 다툼을 벌이고 있다. 분명한 것은 오늘 한국교회 몇몇 교단이 일인 천하라는 것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 교단이 총회 때마다 다툼을 벌이는 것 같이 보이지만, 그 내면은 대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또한 목회자들이 정치적인 색깔을 드러내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내놓기 때문에 총회, 노회, 시찰회가 시끄러운 것이다.

이 시끄러움은 노회원, 총회원이 자신의 의견에 대한 톤을 조금 낮추고, 10%정도 양보하면 해결되는 문제이다. 하지만 한국교회의 목회자와 교인들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은혜’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문제의 본질을 그르칠 때가 종종 있다.

분명한 것은 모든 의제가 한국교회와 교인들에게 유익을 주는 쪽으로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 의제를 해결함에 있어 다수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영향력을 가진 한사람의 의견을 따르는 경향이 짙다. 그렇다 보니 일부 교단은 목회자의 세습을 정당화해 주고, 목회자의 정년을 없애고, 교단의 재산이 새어 나가도 말을 못하는 것이다.

이제 한국교회도 변화되어야 한다.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본질을 찾아야 한다. 어떠한 것이 교회와 교인들에게 유익을 주고, 하나님의 세상을 만들 수 있는지 말이다. 하나님의 세상은 낮은 자도, 높은 자도 없다. 대화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양보하면 해결되는 문제이다. 이를 위해 모두가 노력하는 마음의 자세를 지녀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예장 개혁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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