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탁기목사
예수님께서 열매를 맺지 않고,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해 말라버리게 한 사건은, 열매가 없는 허례허식에 가득한 종교, 가난한 사람들의 것을 빼앗는 지배기구의 본산인 성전에 대한 저주이며, 경고이다. 무엇보다도 이 경고는 내실은 없고, 허례허식으로 가득한 한국교회를 향해 있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실 한국개신교는 ‘성장주의’와 ‘복음’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내세운 나머지 기독교의 본질을 상실한지 이미 오래되었으며, 나뭇가지는 말라 죽어가고 있다. 그것은 한국개신교회의 십자가는 계속해서 높아지고 있는데, 교회의 사이즈는 계속해서 커지고 있는데, 교회의 강단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는 천박하기 이를 데 없으며, 한국교회의 목회자와 교인들은 바리새적이라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마디로 알맹이 없는 쭉정이와 다를 바 없다.

그것은 신학도 마찬가지이다. 오늘 신학자들이 떠들어대는 ‘복음주의신학’, ‘보수신학’ 하는 것들은 한마디로 제1세계 지배자의 신학이며, 지배자들의 눈치를 보며 만들어낸 신학이라는데 문제가 있으며, 한국의 역사성과 정치성, 사회성을 무시한 지배이데올로기에서 크게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오늘 한국교회가 사회적 약자들과 국민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예수께서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곳은 제자들과 함께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던 도상이었다. 예수께서는 시장하던 참에 잠시 쉬면서, 멀리 열매는 없고,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저주를 하신 것이다. 다음날 예수님과 함께했던 제자들이 다시 그 길을 지날 때 보니, 무화과나무는 뿌리 채 말라 버렸다(마가복음 11장).

이것은 분명 허례허식과 장사꾼들의 소굴로 변질된 예루살렘성전에 대한 저주이며, 오늘 알맹이는 없고, 부자들의 눈물을 닦아주기에 급급하고 있는 한국교회를 향한 경고의 메시지가 담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부 한국교회는 장사꾼들의 소굴이 되었으며, 교회의 조직이 대기업에 비교하고 있다. 최근 수난을 겪고 있는 영화 <쿼바디스>는, 장사꾼들의 소굴로 변질된 일부 대형교회와 바리새적인 모습을 보이는 대형교회의 목회자, 영적성폭력을 일삼는 대형교화 목회자를 고발하고 있다.“기독교는 유럽에 가서 문화가 되었고, 미국으로 건너가 기업이 되었다. 마침내 한국으로 건너와 대기업이 되었다”

얼마나 창피한 일인가. 상당수의 교인들이 스스로 교인이기를 포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제 더 이상 한국개신교회는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이웃의 눈물, 분단의 아픔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이산가족의 눈물, 세월호 참사로 인해 희생당한 가족들의 슬픔, 노동현장에서 쫓겨난 노동자의 아픔을 치유해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지 오래 되었다. 대신 교회당은 장사꾼들의 소굴로 변질되었으며, 새벽마다 교회당에 나와 눈물을 흘리는 부자들의 눈물을 닦아주기에 급급하고 있다.  

이미 시사회를 마친 김재환감독의 <쿼바디스>는 한국교회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이 두려워, 이를 반대하는 대형교회의 목회자와 교인들의 방해로 상영관이 취소되는 수난을 겪었다. 한마디로 대형교회의 목회자와 교인들은 자신의 티는 보지 못하고, <쿼바디스>를 반기독교세력으로 몰아가고 있다는데 한국교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행히 <쿼바디스>는 국민들과 깨어난 교인들의 힘으로 롯데시네마에서 시사회를 가졌으며, 12월10일 첫 상영을 한다. <쿼바디스>는 바리새적인 교인들의 방해 때문에 개봉관이 철저하게 비밀에 붙여져 있다.

한국개신교회는 한국교회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에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치부를 도려내는 대수술의 방법을 모색, 예수님께서 교회를 정화하시기 전에, 스스로 교회를 정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스도의 교회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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