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 성 택 목사
최근 조희연 교육감의 선거법 위반 관련 소송에서 패소하면서 선출직 교육감에 대한 국민적 무기력감이 극도에 이르고 있다. 교육백년대계의 수장을 뽑는 것이야 선출 이외에 더 좋은 방법이 있을까만은, 그 선출과정이 지극히 비교육적이고 비상식적일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 벌어지는 일련의 과정들을 살펴보면 과연 이대로 교육의 수장을 뽑는 일이 괜찮은지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작금에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의 배후에는 교육부재와 무능의 폐해들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독립투쟁은 신에 대한 투쟁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이 투쟁은 인간이 스스로 서기위한 투쟁이었으며 그 투쟁의 최선의 방법이 교육이었다. 이 교육적 가치를 통해 인간은 신중심적 사고인 헤브라이즘을 꺾고 결국 ‘인본주의’를 쟁취하였다.

이것을 기독교에서는 인간의 타락이라고도 말하지만, 어쨌든 이것은 인간에게서 소중한 자신이 되었다. 그리고 그 인본주의는 우리 교육의 사상적 기조가 되었다. 이 인본주의는 또 다시 왕권과 대결하여 민주주의를 쟁취하였고, 그 민주주의 영원한 결속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끝내 “자본주의”라는 경제 원리를 창출하였다.

그리고 이 인본주의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한 개인에게 현실적 가치와 존재이유를 제공하며 개인의 가치를 극대화하는 개인주의의 충실한 보루가 되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만연하는 개인주의, 개인중심주의, 개인승자독식주의에 완전히 침몰하고 말았다. 연이은 선출직 교육감의 실패가 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솔직히 말하면 기독교적 가치관은 위와 같은 ‘인본주의’라는 가치에 기초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라는 현실적 가치에 도전하고 있고, 개인 중심의 윤리에 호응하기 힘들어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교회는 음양으로 이러한 세속적 가치의 성장과 확장에, 즉 자본주의 형성과 민주주의 건설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기독교의 개인 구원 사상 역시 서양의 개인주의 형성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굳이 교회가 세속적 인본주의적 가치를 추구하지 않는다할지도 기독교만큼 인본주의적 인본주의가 어디있는가? 기독교가 인간에게 부여하는 가치만큼 인간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부여하는 사상이 역사속에 있었는가?

적어도 기독교 세계관의 중심에는 가장 존귀한 존재로 여김받는 인간의 자리가 있다. 이것이 헤브라이즘에 의해 선도된 기독교적 세계관이며, 이러한 세계관에 기초한 교회의 투쟁은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들고, 가장 인간다운 자리로 인간을 인도하는 윤리 투쟁이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필요한 새로운 기독교교육운동은 세계정신의 투쟁사의 연장선상에 서있는 운동으로 자리잡도록 해야 한다. 진정한 교육적 가치를 이해하는 못하는 편협한 인본주의자들의 교육권력 추구가 가져온, 그런 사람들에게 권력을 맡긴 결과가 얼마나 엄청난 지, 인간을 인간답게 못하는 권력이 얼마나 위험한 지 우리는 지금의 역사속에서 보고 있다. 부당한 권력에 대한 투쟁 자체를 세계 정신사는 의롭게 여겼다. 부패하고 무능한 권력자는 추방되어야 한다.

어차피 우리의 현실이 되어버린 인본주의, 민주주의, 자본주의, 개인주의가 결코 기독교의 틀을 벗어날 수 없음을 상기하면서, 이것들이 교회의 감시아래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가장 반듯한 제도로 정착되어 갈 수 있도록 교회는 교육적 가치에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앞으로 있게 될 교육감 선출에 관한 새로운 논쟁에 교회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살펴야 할 것이며, 다시는 국가의 백년대계가 섣부른 정치꾼들의 협잡판이 되지 않도록 사명을 가지고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대학 전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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