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따로 떼어놓고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을 말함으로써 인간을 말하고, 인간을 말함으로써 하나님을 말해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과 더불어 사는 존재로 창조했다.

하나님 안에서 산다는 말은 이웃과 더불어 자연과 더불어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문제는 아담과 이브가 범죄를 저질렀듯이, 인간 모두는 탐욕에 길들여진 나머지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한마디로 인간 모두는 이웃의 존재를 거부하고, 자기중심에 빠져 범죄에 빠져들고 있다. 그것은 또 하나님의 존재를 거부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의 말씀에서 벗어나 욕망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하고,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며, 범죄하는 행위는 분명, 아담과 이브처럼, 하나님처럼 되려고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지를 않고, 하나님의 진리, 성서의 말씀을 거역하는 자(이단 및 사이비)들을 옹호하고, 여기에 빨대를 꽂고 살아가는 목사가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은 크다.

카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이웃 없이 혼자 살겠다는 탐욕에서 비롯되었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부인하는 결과를 가져다가 주었다. 오늘 한국교회 교인들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한국교회의 교인들 역시 카인과 마찬가지로 고난당하는 이웃을 외면하고, 자기중심적인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웃 속에 계시다는 사실을 망각한 것이다. 이웃을 외면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하나님을 외면하는 동시에 부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가난하고 소외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아파하고, 신음하고 절규하고 계시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서 역사하셨다. 예수님도 이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펼쳤다.

문제는 한국교회가 소외된 자와 가난한 자 그리고 고난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펼치지 못하고, 권력과 부자들의 주변을 맴돌며, 온갖 혜택을 누리며, 맘몬과 바벨의 상징인 돈을 외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많은 목회자와 교인들이 교회를 넘어 사회 곳곳에서 범죄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한국교회가 누구에게든지 희망이 되지를 못하고, 교회공동체는 해체위기를 맞고 있다.

때문에 깨어난 목회자 및 신학자들은 광야로 돌아가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광야는 모든 것을 정화하고, 역사창조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40년 동안 떠돌이 생활을 하게 한 것도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고, 야훼 하나님과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자는 의미에서였다. 예수님도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고, 하나님나라운동을 시작했다. 세례 요한도 광야에서 오랜 침묵을 깨고, 새 시대를 열었다. 사실 광야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욕심 부릴 일도, 빼앗을 것도, 빼앗길 것도 없었다. 인간의 끝없는 탐욕이 허망하다는 것을 실감하는 곳이 바로 광야이다.

그렇다 광야는 뒤틀린 한국교회의 역사를 바로잡고, 부패한 교회, 아니 사회를 정화할 수 있는 곳이다.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고 변혁의 힘이 생기는 곳이기도 하다. 과거 한국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 역시 광야에 교회를 세우고, 가난하고 소외되고 고난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펼쳤기 때문에 가능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교회의 재정을 떼어 이웃과 함께 나누었고, 고난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다.

그렇다 하나님이 살아 있는 한 이 땅의 모든 사람은 좌절할 수 없다. 어떤 강도 건널 수 있고, 험준한 산도 넘을 수 있다. 여기에 하나님이 함께 계시고, 우리의 입장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쓰러지더라도 죽지 않으면 일어서야 한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다. 산자의 하나님이다. 그때 비로써 한국교회가 힘 있게 일어나 새 교회, 새 나라를 향한 하나님의 광야행진을 가열 차게 벌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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