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명 환 목사
양 100마리 중 한 마리를 잃으면,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아 나선다고 했다. 양을 치는 목자에게 당연한 일이다. 이 비유는 잃어버린 하나가 다른 아흔아홉 보다 크고 소중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즉 하나가 아흔아홉보다 크다.

인간적인 생각에서 일은 하나를 위해서 아흔아홉을 위험 속에 빠뜨리는 행동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를 않는다. 정치, 사회적인 기본원칙은 공자의 말대로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다수를 위하는 원칙을 내세운 것이다. 사실 역사는 소수를 위하여 다수를 희생시키면서도, 명분은 다수를 위하여 소수를 희생시켰다. 오늘날 사회의 모든 원천 그렇다.

모든 국가는 법은 이 원칙을 따르고 있다. 다수의 안전한 삶을 위해서 소수를 교도소에 보내야 한다. 다수의 행복을 보장하기 위해서 소수의 자유를 박탈하는 강제적 장치가 곧 법이다. 과거 왕정시대를 보면, 소수를 위해서 다수가 억압과 수탈을 당했다.

그런데 잃은 양 한 마리의 비유는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시켜야 한다는 원칙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다. 잃은 양의 비유는 적은 사람이라도 희생시키면, 남은 사람들도 온전한 삶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을 교훈하는 내용이다.

한 인간이라도 소외된채 방치해 둔다면, 이미 인간에 대한 현제적 유대를 상실한 것이다. 이것은 영적 생명을 일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궁지에 빠지 한 인간의 호소를 외면하면 인간의 정신은 이미 닫혔고, 닫힌 정신은 사랑과 자유를 모르고, 사랑과 자유를 모르면 진정한 삶을 모르게 된다. 형제애를 잃은 사람들 끼리 사는 생활은 행복하지 않다. 진정한 자유와 사랑을 생각한다면, 아흔아홉을 지키기 위해 잃어버린 하나를 버려 둘 수 없다.

잃어버린 하나를 버려둔다면, 나은 아흔아홉 마리도 온전하지 않다. 앞으로 양을 잃어버릴 때마다 남은 양떼만 지킨다면,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도 잃어버릴 위험을 안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아흔아홉 마리의 양은 80, 60 마리가 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 마리의 양을 찾는 것은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포함한 전체를 생명의 길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법과 복음의 변증법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법은 국가와 사회의 기본 원리이다. 법은 국가와 사회의 존재를 정당화 해 준다. 그리고 국가와 사회를 유지하고, 가능하게 하는 제도적 장치이다. 법은 또한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하지만 법이 인간의 죄에 사로잡히게 되면, 권력욕과 소유욕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것은 때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삶과 재산을 유린하기 위한 흉기로 변해 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복음은 예수가 실현한 하나님 나라 운동의 기쁜소식이다. 복음은 가난하고 소외된 민중을 주인으로 삼는 다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아카페 사랑이 지배하는 나라에 대한 기쁜 소식이다. 결국 복음의 핵심은 아카페 사랑이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과 갈등으로 가득찬 역사가 존재하는 한, 복음의 사랑이 법을 대신할 수 없다. 사회와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법적인 강제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법만으로 건강한 사회와 국가를 유지할 수 없다. 법은 악의 도구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법만으로 인간에게 자유의 기쁨, 삶의 주체성을 가져다가 줄 수 없다. 법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아카페 사랑을 실현하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법의 목표는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인간 해방에 있다.

법은 그 자체를 위해서 있지 않고, 하나님의 아카페 사랑, 하나님의 나라, 자유와 사랑, 그리고 평등이 넘치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나라를 위해서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사회와 역사의 변천에 따라 변화되고 개혁될 수 있다.

인천 갈릴리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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