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 수 강 목사

기독교와 세상 종교와 다른 점은 기독교는 보이지 않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세상 종교는 눈에 보이는 것들을 믿는다는 점이 다르다. 따라서 기독교는 만물이 하나님의 창조물이며 나무 하나, 돌 하나, 이름 모를 작은 꽃송이 하나에도 창조주의 섭리로 이루어졌음을 믿는다. 너무 오랜 세월 기독교는 보이지 않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다보니 세상 종교의 화려한 그림과 조각한 우상들에 관심을 가지는 일들이 심심찮게 나타나기도 했다. 기독교는 500년 전 1517년 말틴 루터의 종교 개혁 당시 천주교회가 외관상 12사도와 성모마리아 상과 기타 성인들의 초상화를 화려하게 그리거나 조각해 교회 내 외 벽에 설치해 건물 내 외부의 모습을 인간의 눈에 보기에 장엄한 모습으로 꾸몄다.

대표적인 예로 로마 바티칸시에 건축된 성 베드로 성당은 당시 유명한 건축가와 예술가들에 의해 하나의 예술적 가치를 지닌 작품으로 만들어졌다. 여기에는 천문학적인 건축비가 들어가야 하는데 그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교권을 남용해 성직을 매매하거나 일반 신자들에게 속죄 권을 판매하여 거금을 모았다. 이처럼 거룩한 교회의 성품을 버리고 인간이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에 분개한 이들로 인해 뜻이 있는 자들이 모여 종교 개혁의 불씨를 지피는 계기가 되게 했다.

개혁 이후 개신교는 외견상의 교회보다는 성도 내적인 영혼구원에 중점을 두다보니 예배드리는 장소는 단순한 예배드리기 위해 마련해야 하는 처소요 즉 장소 개념에 불과했다. 성당이나 성전의 개념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살고 있는 가정이 예배당이 되기도 하였고, 카타콤 이라는 지하 무덤 속이나 인적이 드문 산이나 골짜기 나무 밑에도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비밀예배 처소로 이용하였으며, 당시 유대교의 엄격한 감시 하에서도 모임은 활발하게 이루어졌었다.

세월이 흐르다 보니 개신교회에도 내적인 영혼 구원과 거듭남의 중요성의 진리가 빛바래지는 느낌이 들자 목회자들과 이를 만회하는데 뜻을 같이하는 그리스도인들이 합세하여 성도들의 내적인 신앙보다도 성도들이 모이는 예배당의 변화를 꽤하였다. 사회 경제 사정이 좋아지게 되자 따라서 교회도 늘어나는 헌금으로 재정이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풍부한 재정을 근거로 새로운 예배당의 건물에 관심을 가지며 일부 중대형 교회들은 건축에 올인 하기 시작했다. 지금 지나온 경험을 반추해 보면 너무 지나친 교회건물 규모로 인해 교회가 본래 해야 하는 일에는 등한시 하거나 보류하게 되고 교회는 자체 운영에 더 신경을 써야 했다. 그러다보니 자연 교회 재정 거의를 운영비와 건축비에 충당하다 보니 본래 교회가 해야 하는 일은 뒷전으로 밀리게 되었다. 교회 주변에는 어렵고 가난한 자들이 있어도 외면해 버렸다.

교회 지도자인 목회자들은 교회는 이미 상당수 성장했다고 자부를 느끼나 계속해서 유지하기 위해선 새로운 방법을 구현해야만 했다. 구태의연한 신앙과 믿음 강조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해 눈을 사교나 이교 세력의 다양한 방법과 술수를 도입해 성경과 적당히 섞어 사용하다보니 도가 지나쳐 교주의 형태로 까지 변질 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러나 꿩 잡는 게 매라는 식으로 교회 첨단 건물을 세우고 성도들만 차면 그만이라는 자만심으로 성장한 교회를 목회자 전횡으로 독단적인 운영에 몰입하는 자들도 등장했다. 스펀지에 습기가 먹히듯이 한국교회는 성경적인 믿음과 신앙의 영적인 방법은 제쳐두고 이교적인 청중을 이끄는 술법이 강단을 점령해 성도들을 미혹하기 시작했다.

목회자는 갈멜 산상에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승리를 이룩한 엘리야의 신앙은 뒤로 하고, 이미 실패한 바알 선지자나 아세라 목상의 제사장들의 흉내와 흡사한 독특한 이교나 사교 교주들의 신 내림 비슷한 목회 기술을 도입하는데 앞장서고 이를 성도들에게 나타내려고 애쓰는 어리석음을 가책 없이 활용한다. 이제 기독교는 자칫하면 본 말은 전도 되고 인간의 기복의 비위에 아첨하는 유사종교로 전락할 위기다.

한국교회의 추락을 멈추게 할 중요한 대책 중에 하나는 교회 속에 침투한 이교와 사교 그리고 유사종교의 허상을 몰아내야 한다. 하나님의 진리와 생명의 말씀이 이교의 기복신앙을 전달하는 수단과 그릇에 불과 하다면 하나님의 진노는 피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심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이후 이천년을 기다려 오셨다. 이제 자신이 친히 마련한 구원의 방주인 교회가 겉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장식하고 속은 이교의 강 신술과 축사와 미신적인 요소라면 심판을 피할 수 없다. 혹 목회자들의 이마에 피땀 나는 회개의 기도가 더 늦기 전에 일어난다면 멸망의 심판이 넘어갈지도 모른다.

필운그리스도의교회/ 본지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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