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변화’라는 단어처럼 회자되는 말도 없다. 모두가 어지러운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교회 안에서의 변화는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 그것은 오늘 교회다운 교회,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 없다는 말로 새석된다. 그렇다 교회가 새로운 교회로 변화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인이 새사람으로 변화되지 않고서는 교회의 미래를 장담 할 수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입에서는 변화와 개혁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모두가 변화와 개혁을 말하면서, 자신은 변화되지 않고 옛사람에 머물러 있다. 그래서 도산 안
6월5일은 환경주일이다. 우리 국민, 아니 세계민족은 신종바이러스감염증을 겪으면서, 환경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했다.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도전하면서, 강력한 신종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변이 바이러스가 계속해서 나타나 인류를 괴롭히고 있다. 인간의 탐욕에 의해 만들어진 바이러스도 요술을 부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이러스는 계속해서 확대 재생산되면서, 인간의 지혜로 해결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다행히 백신이 개발돼 확산이 진정기미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생명이 고통을 당하고 있고,
모든 어머니는 여성이다. 이런 의미에서 여성은 가정과 사회, 교회에서 존경을 받아야 한다. 어머니의 사랑은 가장 믿을만한 하나님의 참사랑, 아가페이다. 변치 않는 사랑이다. 인류역사에서 여성은 위대한 역할을 했다. 특히 한 남성을 만나, 짝을 이루어 생명의 실어 나르는 통로였다. 그래서 어머니를 사랑이라고 한다. 어머니의 품은 항상 행복하고 평화롭다. 성경은 분명하게 어머니 상을 제시한다. “예수의 십자가 밑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레오파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서 있었다/예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서 있는
오늘을 살아가는 각 사람에게서 겸손한 마음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예수님은 겸손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회적 약자들이 있는 곳에 오셨다. 평화의 왕으로 오셨다. 헌데 오늘 국내와 세계는 로마 팍스, 자이나 팍스, 소련 팍스, 아메리카 팍스를 추구한다. 누구도 예수님의 평화(샬롬)를 말하지 않는다.여기에다 가진 자들은 사회적 약자들을 괴롭히며, 자신의 사회적, 정치적 영역을 넓혀간다. 이것이 오늘 우리사회의 자화상이다. 야당의 대표가 지하철역에서 장애인 자신들의 이동권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는 장애인을 비참하게 하는 말을 쏟아
성서는 온갖 잡신에 현혹되지 말라고 한다. 영미의 근본주의 신학을 받아드린 한국교회는 타종교에 대해서 배타적이다. 타종교인들은 개신교 목회자들의 눈치 보기에 바쁘다. 그러면서 한국 개신교 무당은 정치무당, 사회무당과 함께 하나가 되어 작두 위에서 칼춤을 춘다. 그리고 개신교 무당은 현 정부는 악하고, 차기정부는 선하다고 말한다. 한국교회가 권력에 붙기 시작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대목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교회는 선교초기부터 권력과 함께 성장해 왔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선교초기 한국교회는 왕실을 등에 업었으며, 일본제국주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보니 빠른 경주자들이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용사들이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들이라고 음식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명철자들이라고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지식인들이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기회는 그들 모두에게 임함이니라/(생략)/그 성읍 가운데에 가난한 지혜자가 있어서 그의 지혜로 그 성읍을 건진 그것이라 그러나 그 가난한 자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도다/그러므로 내가 이르기를 지혜가 힘보다 나으나 가난한 자의 지혜가 멸시를 받고 그의 말들을 사람들이 듣지 아니한다 하였노라/조
하나님의 일을 자신의 사익을 위해서 악용해서는 안된다. 오늘 대한민국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자신의 사익, 돈을 벌어드리는데 악용하고 있다는 지적이 어제오늘의 이야기는 아니다. 한국교회 일부 목회자는 ‘성령’을 방매해 교인들의 주머니를 털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이 아니다. 악령을 받아드려 하나님의 자리를 돈으로 대치시킨 것이다. 이제 교회는 하나님 대신 맘몬이 자리를 잡았다. 이들은 예루살렘 성전 박수올을 닮아가고 있다. 그렇다보니 목회자들은 강단에서 죄악을 질타하는 설교를 하지 않는다. 복을 받으라는
성서는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고 교육하고 있다. 보수는 한 나라를 지탱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원이다. 그러나 이들은 새로움을 받아드리지 못한다. 우상 천황을 섬기는 일본은 패망하진 74년이 되었지만, 제국주의 환상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일본은 6.25 전쟁이 다시 한반도에서 일어나기를 간절히 학수고대하는 나라이다. 그래야만 침체된 경제를 다시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의 보수 역시 이념에 갖혀 눈앞에서 시대가 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이들은 오늘날 정치
이스라엘은 솔로몬 왕 이후 남북으로 갈라졌다. 외세의 침략은 끊이지를 않았다. 이웃나라의 노예, 고향을 버리고 떠돌이로 살아야만 했다. 디아포라스로 살았다. 한마디로 이스라엘 민족의 삶은 처참했다. 곤궁한 삶이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이스라엘민족은 하나님이 함께하는 나라에 대한 소망을 저버리지 않았다. 이 소망의 중심에는 늘 예언자들이 있었다. 이사야는 말한다.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그 날에 주께서 다시 그의 손을 펴사 그의 남은 백성
오늘날 일부교회는 생명의 떡보다도 썩는 재물을 사랑한다. 이들은 예수님을 교리와 제도로 만들어 그 뒤에 숨어버린다. 재물을 사랑하는 교회는 이제 이단을 논할 자격조차 상실해 버렸다. 하나 남은 속옷까지 빼앗으려고 하는 것이 일부 교회의 목회자이며, 교인이다. 이는 곧 하나님의 질서, 교회의 질서를 무너트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제 한국교회는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 돈이 있어야 장로도, 안수집사도, 권사도 될 수 있다. 큰 교회에 부임도하고, 세습도 한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떡을 잃어버린 오늘날 일부 교회의 모습이다. 그래서
내년 3월 9일 대통령선거 70일을 앞두고 있다, 여야 각 당의 대통령후보들의 선거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각 당의 후보 면면을 살펴보면, 누가 국민을 섬기며,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할 것인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세종대왕과 같은 백성의 행복을 위해서 꿈꾸는 후보가 없다. 군력을 잡겠다고만 한다. 오늘 사회를 불평등이 지배한다. 과거나, 지금이나 권력을 잡으면, 모두가 눈이 어두워진다는 것에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이들에게는 눈이 어두워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서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이지를 않는다. 그렇
전염병이 진정되지 않고 있다. 교회와 관련된 사람들이 전명병에 감염되면서, 일반국민들의 교회를 향한 비난이 멈추지 않고 있다. 교회와 사회의 단절은 갈수록 심각하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교인 50%이상 줄어들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대림절, 성탄의 계절 아기 예수를 기다리는 모든 사람은 절망하지 않을 수 없다. 기원전 1500년경 앗수르는 바벨론을 무너트렸다. 하지만 유호와김은 폭압정치를 펼쳤다. 왕의 주변 고관대작들은 자기 배를 채우기 바뻣다. 선지자 하박국은 하나님께 물었다. 하나님은 하박국에게 “비록 더디더라도
국민을 살해하고도 사과한마디 없이 죽은 사람을 보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의 모습을 본다. 세상은 야곱의 자손들처럼 날뛰고 있다. 대림절, 예수님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들은 정의를 짓밟는 일에 대해서 회개해야 한다. 요한계시록 3장 14-22절은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사람을 비판한다. 인간은 자신이 가련한지, 눈이 멀었는지, 곤고한 지, 벌거벗었는지를 모른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
사귐, 친교는 그리스도인들의 약속된 기쁨이다. 주님과 친교의 기쁨, 하나님과 사귀는 기쁨, 그리스도인의 너와 나의 만남은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막혔던 장벽을 무너트린 사건이다. 이는 과거형인 동시에 현재 진행형이다. 분열과 갈등으로 얼룩진 한국교회, 분단된 대한민국은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귐과 친교를 통해 분열강, 분단의 아픔을 극복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되어야 한다.예수님은 분열의 현장에서, 분단의 현장에서, 성령 안에서 하나되라고 했다. 오늘 한국교회는 성령을 몰각한 나머지 분열
“지고 가는 배낭이 너무 무거워 벗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참고 정상까지 올라가 배낭을 열어 보면, 먹을 것이 가득해 기쁨이 차고 넘친다” 어느 등산객의 말이다. 만약 배낭이 무겁다고, 배낭에 있는 것을 버렸다고 생각해 보라. 힘들게 올라온 정상에서 먹는 기쁨, 감사함이 없을 것이다. 힘들어도 가지고 올 것이라며, 후회 할 것이다. 인생은 평생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야 하는 수고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무거운 짐을 지고 가야하는 수고 때문에 보람차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다. 이 세상에 짐 없이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종교개혁 504주년을 맞았다. 종교개혁의 정신은 교회가 잃어버린, 기독교가 잃어버린 하나님의 참사랑을 회복하는 교회 갱신운동이며, 교회개혁운동이다. 흔히 오늘 교회를 향해 개인이기주의이며, 집단이기주의가 만연한 단체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몰각한 결과이다. 사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사랑을 설명하려고만 했지,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하나님의 참사랑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애기다. 하나님의 참 사랑은 내안에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밖으로 향해 있을 때 그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중략)/기록된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
신종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은 명절날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조차 가로 막아버렸다. 발전된 변종바이러스가 계속해서 출현하는 것을 보면, 바이러스는 사람의 머리보다 영리한 것은 분명하다. 이제 국내 감염자도 3천명을 넘어섰다. 이런 상황에서도 국민들은 코로나19로부터 해방돼, 새로운 시대가 곧 올 것이라고 희망을 가졌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잠잠해져야 자영업자들도 곤궁한 삶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텐데 국민 모두는 걱정하며, 하루의 삶을 살아간다. 이럴 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인간은 자기중심성을 타파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억압과 수탈의 사회구조, 정치구조, 경제구조를 타파 할 수 없다. 예수님의 공동체운동도 굴절될 수밖에 없었고, 억압과 수탈의 사회구조는 계속되어 왔다. 성서 베드후서 2장13절 이하와 유다서12절은 흥청거리며, 먹고 마시는 탐욕스러운 자들이 교회공동체에 참여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런 공동체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진정한 화해와 해방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한신대학교 전 교수 박재순 박사는 자신의 저서 에서 “예수님의 공동체에서는 공동식사와 해방의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 하리로다”세계적인 발레교사인 빌헬름 브르만은 “은 인생을 감미롭게 해주는 것이지, 결코 힘겨운 짐이 아니다. 걱정거리를 가지고 있는 자만이 을 싫어한다”고 말했다. 노동은 신성한 것이다. 우리 옛말에 “일하지 않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성서도 마찬가지이다. 노동의 가치와 인식은 기술적(경제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인식론적인 측면을 갖고 있다. 노동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그 가치와 인식이 달라진다. 아쉽게도 노동에 대해 우리가 갖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