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 헌 철 목사

진담 같은 농담, 농담 같은 진담으로 종종 들리는 말이다. 어차피 작은 나라로서는 매사에 한게가 있다. 경제, 안보, 문화...무엇이든지 초강대국 미국의 그늘에 있을 바에는, 아예 ‘화끈하개’ 미국의 일부가 되자! 그래서 자랑스러운 성조기 앞에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 하는 편이 이익이 아니겠는가?

농담이라도 기분 나쁠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사실 그런 식의 이야기가 이 땅에서 처음은 아니었다. 그리고 14세기 초, 그것은 결코 농담이 아니었다. 강화도에서 40년간 항쟁하던 정권이 개경으로 환도하고 왕이 원 황실의 부마가 됨으로써 ‘부마국가’로 존속하던 고려, 이렇게 종속 상태로 지낼 바에는 아예 원나라의 일개 성(省)이 되고 말자는 주장이 진지하게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을 입성책동(立省策動)이라 한다.

첫 번째 입성책동은 충선왕 1년(1309)에 있었다. 당시 충선왕은 원나라에 머물던 중이었는데, 일찍이 몽고 편에서서 고려 침략의 앞잡이가 되어 악명을 떨쳤던 부원배(附元輩) 홍복원의 손자인 홍중희가 충선왕을 계속 모함하던 끝에 제기하였다. 하지만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고, 홍중희가 실각하는 것으로 끝났다. 그러나 두 번째 입성책동은 심상치 않았다. 충선왕의 뒤를 이은 충숙왕이 삼양왕과 권력투쟁으로 원나라에 잡혀가면서 정정이 불안해졌다. 그러자 유천신, 오잠이 원나라에 청원하여 “고려에도 성을 설치하여 원나라 본구과 같이 만들어주소서”했다. 이번에는 원나라에서도 진지하게 검토하여, ‘삼한행성’이라는 이름까지 나돌았다. 이렇게 상황이 다급해지자, 팔을 걷어부치고 나선 사람이 ‘이제현’이었다.

‘이제현’은 15세 때 장원급제를 한 수재로, 혼란스럽던 몽고 간섭기에 - 부원배 아닌 지원파(知元派)로서 원나라 조정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고려인이었다.

“중용에 이르기를 ‘무릇 천하국가의 다스림에는 아홉 가지 경도(九經)가 있다. 그러나 행함은 한 가지려니, 끊긴 대를 잇고, 망한 나라를 복원하고, 어지러우면 바로잡고, 위태로우면 도우며, 의연히 떠나는 자는 후히 대접하고, 달라붙는 자는 엄히 대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바라옵건ㅐ 세조께서 우리의 공로르 잊지 않으신 듯을 살펴주소서”

그가 원나라 조정에 올린 상소는 우선 유교 경전의 가르침을 들어 “지금 고려를 기어이 병합하는 것은 대국의 풍도가 아니다”고 완곡히 지적하고, 원세조 쿠발라이가 아리크부거와 경쟁할 때 마침 고려의 태자(이후의 원종)가 찾아온 것을 기뻐하며 고려가 국체를 보전하고 고유의 풍속을 유지하기를 허용했던 일을 상기시키는 내용이었다. 원나라의 비위를 최대한 맞추면서, 고려의 자주성을 지키려는 뜻이 절ㅈ벌이 배어 있었다. ‘이제현’은 이 외에도 원나라의 승상 배주를 비롯한 유력자들에게 두루 연락하고 부탁하여 이들이 고려를 도와 입성에 반대하도록 운동했다. ‘이제현’의 분투 덕분에 입성책동은 무산되었고, 이후에도 두 차례나 더 책동이 있었지만 끝내 실현되지 않았다.(출처 : 108가지 결정)

우리는 애국을 앞세운 매국노(賣國奴)들로 인하여 일제에 36년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비극적 고통을 안고 살아가고 있기에, 사드배치 같은 논란에 대하여 ‘이제현’ 같이 충성심과 지혜는 왜 발휘하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과 함께, 우리의 국토에서 성조기, 이스라엘기 등을 앞세워야만 하는 이유와 목적에 궁금증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강대국들에 둘러싸여 있는 우리 현실이지만 힘들다고 해서 21C 입성책동(立省策動)을 외치는 것만은 아니길 바란다.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에 4:14)

한국장로교신학 학장•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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