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서점에 가득한 구원론을 또 쓰고 있는 이유는 지금 우리가 가고 있다고 하는 구원의 길이 이상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고 의인이 많아져서 점점 더 넘쳐야 되는데 반대로 이기주의자들만 넘쳐나고 예수님을 위하여 살겠다고 찬양하고 고백한 것처럼 예수님을 위하여 죽는자가 넘쳐나야 하는데 오히려 예수님의 십자가를 무색하게 만드는 자들이 넘쳐난다. 오래전 생명신학 포럼을 주체하신 주체자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우리나라 대한민국에 한해 졸업하는 신학생이 2000명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하신 말씀은 ‘내 계명을 지키라.’이다. 하나님의 계명과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한 삶이 곧 100배 60배 30배로 결실을 맺는 옥토에 뿌려진 씨앗의 결과이다. 이 결실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영광이 됨이요. 또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라고 우리가 매일 기도하는 주기도문이 이루어져 사실 되는 일이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성도는 의로우신 하나님의 모든 계명과 말씀을 지켜 결실을 맺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그렇지 못한 이
이제 씨뿌리는 비유를 해석해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살펴보자. 이는 (마태복음 13:18-23)의 말씀이다. (마태복음 13:18-23)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 밝히 말씀 하신 구원의 ‘핵심’은 ‘죄인이 구세주 예수님께 믿음과 회개로 나아가 고침받고 이후로의 모든 삶은 예수님의 의의 길, 생명의 길을 따르는 것’이다. 구원은 한 문장이나 한 단어로 말할 수 없다. 깊은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한 단어로 말할 수 있겠지만 모든 과정을 깨달아 알게되는 깨달음이 없이 듣는 사람은 그 자체로 오해가 되어 편협한 구원론을 갖기 쉽다. 육신의 세계에 있는 우리가, 본적이 없는 영의 세계를 아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 거기에 틈만 있으면 속이고 미혹하고 죽이려 하는 사단의 훼방까지 있
(마 13:18)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로 시작하시는 말씀 중 (마태복음 13:19)에 매우 중요한 말씀을 하신다. “(마 13:19)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려진 자요.” 씨앗이 길가에 떨어진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면 악한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생명의 말씀’을 빼앗아 간다고 하신 것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늘 듣지만 마치 이 일이 남의 일인 것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우리를 구원하러 세상에 오신 유일하신
마태복음 13장 예수님의 구원론에서 다음으로 등장하는 말씀은 제자들의 질문을 답하시는 내용으로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제자들이 알아듣도록 풀이해 주시는 말씀이다. (마 13:18-23)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
“구원의 중심은 우리구주 예수님이시다. 오직 구세주 예수님께 나아가야 한다.” 짧은 말이지만 구원 받아야 하는 성도에게 이보다 더 중요한 내용은 없다. 예수님께서 친히 성경에 대하여 말씀 하시기를 예수님 자신을 증거한다고 명확하게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5:39-47)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
마태복음 13장에서 두 번 째 등장하는 중요한 말씀은 ’너희‘와 ’저희‘에 대한 말씀이다. 이 말씀은 씨를 뿌리는 자에 대한 비유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그 비유의 내용이 어려워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 없게 되자 거기에 모인 많은 무리를 빗대어 왜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 하시는지를 예수님께 여쭈었다. 그 때에 이 질문을 따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속에서 하나님께는 세상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둘로 구별되어 있음을 분명히 말씀 하셨다. ’너희‘와 ’저희‘가 있고 그것이 곧 구원 얻을 자와 구원 받지 못할 자로 나뉜다는 것과 그것이 얼마나
교회에서 ‘공동체’라는 단어를 지금처럼 계속 사용할 것인지에 대하여 깊이 고민해 보기를 원한다. 공동체라는 말은 ‘같은 무리끼리 모여 이루는 집단.’을 말한다. 이 단어가 언제부터 교회에 사용되기 시작한지, 그 유래가 어떠한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이 단어가 주는 느낌이 교회의 정체성을 상당히 어그러뜨리고 있다. 공동체라는 단어의 본래 뜻대로 교회를 ‘생활이나 행동 또는 목적 따위를 같이하는 집단.’으로 은연중 여기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교회마다 함께하기 위한 프로그램들을 중심으로 운영이 된다. 그러나 교회는 예수님께서 성도들
씨 뿌리는 비유의 네 가지 마음 밭은 구원에 있어 가장 중요한 핵심 내용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모든 진리의 말씀이 네가지 밭의 과정을 지난다. 모두가 처음에는 진리 앞에 길가와 같지만 돌작밭과 가시와 엉겅퀴의 밭을 지나며 어느부분들은 옥토로 하나님의 말씀들이 각자의 삶에 사실들이 되어간다. 이 과정들이 각자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이고, 죄와 악을 떠나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 가는 과정이며, 구원을 이루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거듭남이 예수님안에서 이루어진다.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세상
마태복음 13장은 예수님의 구원말씀이다. 예수님 말씀은 생명이요 진리인데 예수님의 말씀에 론(論)을 붙일 수 있나? 안된다. 그런데 지금은 다른 표현법을 모르겠고 우리가 말하는 구원론을 설명은 해야겠고 해서 많이 난감하다. 곧 주님께서 지혜로운 답을 주시리라. 우리의 구원은 아버지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전적 순종을 드린 아들 예수님께서 이루셨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3장에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모든 구원의 여정과 중요한 상황들을 과정과정마다 비유로 말씀해 놓으셨다. 마태복음 13장은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총체적인 구원론인 셈이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예수님을 증거한다.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아멘.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나 선택이나 순종을 강조하나 예수님은 예수님을 증거하시고 나타 내신다. 이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의 믿음이나 선택이나 순종이나 의가 주된 중심이 되면 옳은말 같아 보여도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는 우리에게서 멀어진다. 그리고 그 빈자리는 예수님의 복음이 중심 되지 않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말씀들로 대신하게 된다. 예수님을 힘써 바라보지 않
셋째로, 흔히 우리는 구원을 하늘로부터 내려온 밧줄인 것처럼 자연적으로 생각하게 되는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구원의 밧줄이 내려오면 필연적으로 그 밧줄을 붙잡는 사람의 손이 중요하게 된다. 홍수로 인한 급류에 휩쓸려 생사가 경각에 달린 사람에게 던져진 밧줄은 생명줄이므로 결사적으로 붙잡아야 살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붙잡아야 하는 우리의 손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돌이켜 생각해 보라! 이는 ‘후안무치’에 해당하는 일이다. 이미 죽은자요, 죽을 자를 살리신 예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이지 어떻게 밧줄을 붙
구원에 있어 우리의 노력과 열정과 순종과 믿음 등등은 어디에 위치하는가? 우리의 구원은 전적인 예수님의 수고와 헌신으로 이루셨다. 아버지 하나님의 정하신 섭리를 예수님께서 온전한 순종으로 이루신 결과가 우리의 구원이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나 의지에 의한 선택이나 열정이나 순종이 구원을 이루는 한 부분인 것처럼 말하지만 예수께서 이루신 구원에 있어 어디에 위치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다. 실제로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에 한 부분이 될 만한 것이 아예 없다. 왜 그런한지 조금만 물러나 더 큰 각도에서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아르미니안 주의의 중심 사상인 구원에 있어 ‘신인합력설’은 진리가 아니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방점을 둔 ‘신인합력설’은 우리가 속히 버려야 할 가라지 중의 가라지이다. 아담과 하와를 미혹하여 선악과를 따먹게한 뱀에게 넘어가 타락한 인간은 악에도 눈이 열려 선과 악을 소유하고 제 좋은대로 선택하게 되었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자유의지의 근원이다. 우리가 다 제 각각 생각과 의지를 행사하기에 지금의 현실에서는 아무리 말씀을 들어도 거부하는 사람들은 어찌 해볼 도리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복음 앞에 완고한 사람은 정말 완고하다.자유의지
예수님의 참 구원론을 말하려면 필수적인 준비 작업이 믿음과 회개와 인간의 선택이나 반응에 대한 위치 정립을 해야 한다. 우리가 가진 사관들은 때론 온전한 구원을 아는 일을 훼방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지금까지 자유의지나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나 인간의 선택이나 회개가 어디에 위치 하는지를 계속해서 정리해 왔다. 불필요하다고 함이 절대 아니다. 그 목적은 말할 것도 없이 참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지 않게 하고자 함이요, 더욱 전심으로 바라보게 하려 함이다. 이는 사도 바울의 말씀과 같다. 바울 사도도 오직 믿음을 말하지만
사단의 종이요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신 유일하신 메시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는 말씀이셨다. 우리는 믿음을 말하나 예수님은 회개를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중요한 복음의 핵심 메시지 중 하나가 누가복음 5:31-32절 말씀이다. 이 말씀에는 세 가지 중요한 구원과 심판에 대한 메시지가 들어있다. 누가복음 5:31-3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아멘-물론
우리의 회개를 들으시고 죄를 사하여 주시는 권세가 우리 구주 예수님께 있다. 죄를 사하시는 권세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생사화복의 전권이 우리 구주 예수님께 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영원한 우리의 왕이시다. 우리가 더 많이, 더 깊이, 더 열심히 알아가야 하는 분이 우리 구주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과 예수님의 구원을 전하는 것이 곧 구원의 기쁜 소식이고 복음 아닌가! 우리를 피 값으로 사신 분도 예수님이요 우리를 소유하신 소유주도 예수님이시다. 이에 대한 사실은 예수님의 기도 속에 잘 나타나 있다.요한복음 17:1
지난 주 올린 글에서 회개하는 자의 회개가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말했다. 들으시고, 용서 하시고, 용서 하실 뿐만 아니라 고쳐 주셔야 하는 하나님이 더 중요하시다. 회개는 나 혼자 회개했다고 해서 다 끝난 일이 아니다. 이 말은 너무 당연한 사실인데 우리는 잘 잊어버린다. 이 시간에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회개에는 반드시 믿음과 인내가 동반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한다. 구세주 예수님께서도 명령하신 “회개 하라”를 기가막힌 설법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승리를 가장 잘 믿는 것처럼 하면서 오히려 예수님께서
회개의 범위는 잘못을 뉘우치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결국은 거듭나서 목자장이신 예수님만 따라가는데 까지라고 회개의 범위를 말한 것은 좀 더 회개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성도들이 이 의도를 이해하여 회개를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진실로 회개에 임한다면 이 글을 통하여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잘 전해 진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회개에 있어 정작 중요한 핵심은 회개하는 회개자가 아니다. 그 회개를 들으셔야 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위치가 더 중요하다. 하나님을 표현하는 모든 일에 사용되는 단어 하나 하나도 죄송스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