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중 곤 목사

한반도를 둘러싼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일본은 국내에 거주하는 자국민 20만명 대피령을 내려, 긴장을 더욱 고조시키고 있다. 미국 트럼프와 김정은은 갈수록 날을 세우며, 선제공격을 공헌하고 있다. 중국은 싸드 배치의 보복으로 한국에 대한 경제보복에 들어갔다.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긴장상태이다.

여기에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과 구속, 장미대선으로 인한 후보들 간의 안보논쟁 등, 국민은 한마디로 불안하다. 국민들은 전술핵을 배치하는 것이 평화인지, 대화를 통해 평화를 만들어가는 것이 평화인지에 대해 헷갈린다.

과거에는 전쟁만 없으면, 총을 쏘지 않으면, 그래서 사람이 피를 흘리지 않으면, 이것을 평화라고 했다. 그것은 아니다.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언제나 목격해 왔다. 양성화된 것만이 전쟁이 아니다. 오히려 음성적인 전쟁이 더 치열하다. 이것을 냉전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미국과 소련은 전쟁준비를 위한 무기개발에 경쟁을 벌였다. 지금 세계의 핵무기 중 대부분은 냉전시대에 만들어진 것 들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만들어진 핵무기는 인류를 20번 전멸하고도 남는다.

과거의 평화는 안일주의와 같은 것이다. 네 것, 내 것의 한계를 알고 서로 협상하며 살면 될 것 아니냐. 기존질서를 유지하고 기득권을 유지하면서 싸움하지 말고 사는 것이 평화로 알았다. 이런 사고는 종교적인 측면에서 불가능하다. 성서의 평화는 기존질서의 안일을 위한 것이 아니다. 평화운동은 매우 능동적인 것이다.

사랑은 미워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상대방이 나를 개방해서 나에게로 들어올 수 있도록 나를 활짝 여는 것이다. 이것은 내 기득권을 지키는 것이 아니며, 다른 사람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살인하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형제를 보고 미워하는 것이 살인한 것과 똑같다”고 했다. 예수님은 피를 흘리거나 목숨을 끊는 것만이 아니라, 미워하는 것 자체가 이미 살인한 것과 똑같다고 했다. 이것은 총칼을 들고 싸우는 양성화된 것이나, 음성적인 전쟁 모두가 평화를 파괴하는 행위라는 것을 교훈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진일보한 평화의 의미를 내놓았다. 예수님은 “원수도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라”고 했다. 참평화운동이란 이런 것이 아닌가. 평화를 방해하는 근원적인 것을 공격해야 한다. 그것을 방해하는 것은 지금까지 살펴 본대로 종교의 집단성과 관념이 아닌가. 그런데 예수님의 참사랑과 평화는 기독교를 교리화 시킴으로서, 예수님을 교리화 시킴으로서 본질이 흐려졌다. 사실 기독교는 ‘거룩한 전쟁’이란 미명하에 많은 사람을 죽이고,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균열을 일으켰다.

예수님은 교리를 주기 위해서 오시지 않았다.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평화를 주기 위해서 오셨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지금은 평화를 방해하는 구조성이 그때와는 아주 다르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평화를 방해하는 구조 악에 맞서 선한싸움을 벌여야 한다.

그렇다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벌이신 평화운동을 벌여야 한다. 남과 북이 대치하고 있는 한반도의 상황에서 평화운동은 그 어느 때 보다도 절실하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일부 목회자와 교인들은, 보수를 내세워 남북관계의 긴장을 고조시키는데 앞장서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보수이건, 진보이건 전쟁 없는 평화를 위해 그리스도인 모두가 한마음으로 기도하자.

예장 합동총신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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