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그륵

어머니는 그륵이라 쓰고 읽으신다
그륵이 아니라 그릇이 바른 말이지만
어머니에게 그릇은 그륵이다
물을 담아 오신 어머니의 그륵을 앞에 두고
그륵, 그륵 중얼거려 보면
그륵에 담긴 물이 편안한 수평을 찾고
어머니의 그륵에 담겨졌던 모든 것들이
사람의 체온처럼 따뜻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학교에서 그릇이라 배웠지만,
어머니는 인생을 통해 그륵이라 배웠다
그래서 내가 담는 한 그릇의 물과
어머니가 담는 한 그륵의 물은 다르다
말 하나가 살아남아 빛나기 위해서는
말과 하나가 되는 사랑이 있어야 하는데
어머니는 어머니의 삶을 통해 말을 만드셨고
나는 사전을 통해 쉽게 말을 찾았다
무릇 시인이라면 하찮은 것들의 이름이라도
뜨겁게 살아 있도록 불러 주어야 하는데
두툼한 개정판 국어사전을 자랑처럼 옆에 두고
서정시를 쓰는 내가 부끄러워진다

▲ 문 현 미 시인
부르면 부를수록 아늑하고 편안해지는 말이 있다. 바로 엄마, 어머니이다. 특히 아플 때나 힘든 일이 있을 때 그냥 툭- 튀어나오는 말이 어머니라는 단어이다. 2004년 영국 문화원에서 영어를 쓰지 않는 102개국 남녀 4만명을 대상으로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영어 단어가 무엇인지에 대해 설문 조사를 했다. 1위가 어머니(mother)였다고 한다. 모국어가 아니더라도 외국인이 느끼기에 어머니라는 영어 단어가 가슴에 와 닿은 것이다.

시인은 시의 제목을 독특하게 “어머니의 그륵”이라고 했다. ‘그륵’은 표준어가 아니다. 경상도에서 쓰는 사투리인데 그것을 시의 제목으로 선택함으로써 관심을 환기한다. 시를 모르는 독자가 제목만 보면 자칫 문법적으로 틀린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시를 계속 읽다 보면 시인의 의도를 짐작하게 된다. 원래 그릇이 표준어이지만 “어머니에게 그릇은 그륵이다”라고 시인은 표현한다. 시를 빚어내는 솜씨가 예사롭지가 않다. 어머니께서 인생을 통해 배운 그륵이라는 낱말! 그 속에는 지식이나 이론으로 터득할 수 없는 힘이 들어 있다는 것을 시인은 알고 있다. 즉 ‘그륵’이라는 말에는 편안함과 따뜻함이 녹아들어 있다는 것이다. 서정시는 대상에 대한 시인의 주관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문학이다. 정일근 시인의 이 시를 읽으면 시인의 감정이 고스란히 독자에게 전해지고 있음을 느낀다. 자기 고백의 특징을 지닌 서정시가 자기만의 고백에 머무르지 않고 보편성을 획득할 때 큰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시인은 자신의 삶에서 체득한 경험을 진솔하게 표현하고 있다. 시에서 다양한 수사적 장치를 선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시처럼 ‘그륵’과 ‘그릇’의 시어 비교를 통하여 시를 읽는 재미와 감동을 주기도 한다. 특히 시인은 시적 화자인 ‘나’를 통하여 학교나 사전을 통해서 습득한 지식보다 삶을 통해서 얻는 지식이 훨씬 깊이가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어머니께서 자신의 삶을 통해 만드신 말, 거기에는 사랑이 녹아 들어 있어서 더욱 빛이 난다. 오랜 시간 온몸으로 살아오신 어머니의 인내와 섬김과 배려가 ‘그륵’이라는 시어에 응축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시인이 얼마나 예리한 통찰력을 지녔는지 알 수 있다. 그저 스쳐 지나기 쉬운 일상이지만 시인의 눈길이 닿으면 예술 작품이 되는 좋은 예가 “어머니의 그륵”이다.

생활 속에서 편하게 사용하는 말 중에는 사투리가 많이 섞여 있다. 사투리는 들을수록 구수하고 친근하게 느껴진다. 결코 촌스럽거나 격이 떨어지는 말이 아니다. 간혹 그 지방 사투리를 몰라서 소통이 안 되는 경우도 있지만 나중에 알고 나면 재미가 있다. “무릇 시인이라면 하찮은 것들의 이름이라도/뜨겁게 살아 있도록 불러주어야 하는데”라는 시행처럼 시인은 어머니께서 쓰시는 사투리를 살아 숨쉬는 언어로 만든 진정한 예술가이다. 민족 정신의 뿌리인 모국어는 흔히 사용하는 사투리로 인해 한층 풍성해진다는 것을 한 편의 좋은 시로 인해 깨닫는다.

백석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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