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근 열 목사

5.18 37주년을 보내면서 우리 모두에게 시사한 바가 크다. 권력의 탐욕에 어두워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하고 정권을 잡은 탐욕이 국가는 물론 가정도 개인도 얼마나 불행하게 만들었던가? 5.18 기념식에서 김소형씨의 애타는 슬픔을 함께 공유하며 눈시울이 붉어진 문재인 대통령의 모습과 가슴으로 안아준 대통령의 그 모습은 온 국민 모두의 가슴이 미어지도록 감동을 주었다. 전두환 신군부의 탐욕이 부른 비극이 얼마나 컷던가? 이 땅에는 수많은 김소형씨들이 5.18의 아픔을 이겨나가고 있지 않은가?

최근 문재인 대통령의 주목할만한 행보에 있어 많은 국민들이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그 이유는 탐욕을 버리는데서부터 출발한다. 대통령이 손수 모범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았던 사람들도 최근 보도에 의하면 상상을 초월한 지지를 하고 있다. 이것은 대통령 자신을 국민을 위해 봉사하려는 자세가 보이기 때문이다. 이번 기회에 있어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은 물론 각계각층의 지도자들이 솔선수범하여 성도를 섬기는 일에 그리고 사회 구성원들을 진심으로 섬기는 자세를 가져보자. 이렇게 될 때 한국 교회의 본질은 회복되고 바닥을 치고 있는 교회의 신뢰도 회복되지 않겠는가?

최초의 사람 아담은 탐욕 때문에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에서 쫓겨났다. 롯의 아내는 소돔성에 두고 나온 돈, 재물 등의 탐욕 때문에 소금 기둥이 되어버렸다. 아간은 전쟁에서 얻은 노획물을 도둑질 해서 자신과 가정을 파멸시켰다. 가롯유다도 탐욕 때문에 스승 예수를 팔고 목매달아 죽었다. 인간은 탐심 때문에 계명을 어기게 된다. 사도바울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디모데전서 6장 10절)

실존주의 계열의 대표적인 프랑스 작가 알베르 까뮈는 1957년 이방인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그의 작품 ‘오해’에서 이런 내용을 소개한다. 한 어머니가 남매를 기르고 있었다. 아들은 어릴적에 가난과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집을 나갔다. 그 후 20년동안 어머니와 딸은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강변에서 여인숙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돈을 모으는 것만이 그들에게 행복과 사랑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무서운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다. 그들은 행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집을 나간 아들은 크게 성공해서 어머니와 누이 동생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아내와 의논하고 혼자서 자기의 신분도 밝히지 않은채 그 여인숙에 투숙했다. 그 손님이 어린시절 집을 나간 아들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는 두 모녀다. 그날 밤에도 결국 범죄를 저지르는 모녀, 그들은 청년에게 수면제를 먹인다음 강물에 던져버린다. 그러나 나중에 그 청년의 짐 속에서 나온 신분증을 본 어머니와 딸은 자신들이 살해한 남자가 그토록 기다리던 아들 장이며 오빠라는 사실을 알게된다. 오직 돈을 모으는 것만이 행복을 얻는 길 이라고 했던 그들은 결국 아들을 죽이고 말았다. 절망한 어머니는 아들의 시체를 던진 강물에 자살하고 만다. 딸도 자살했다. 인간의 탐심은 인간의 무덤이요 비극의 종말을 부른다.

고려 공민왕 때의 이야기다. 어느 사이좋은 형제가 길을 갔다. 아우가 앞에 가다가 금덩이 둘을 발견하고 주워서 큰 것은 자기가 갖고 작은 것은 형에게 주었다. 이 형제는 처음에는 기뻤지만 시간이 점점 갈수록 동생의 마음속에 형이 미워지기 시작했다. ‘형님만 없었으면 두 개다 내 것인데 형 때문에 나누어 가졌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형도 마찬가지었다. ‘동생 아니었으면 틀림없이 두 개다 내것인데 더구나 저놈이 앞에 가서 큰 것 갖고 내가 형인데 작은 것 갖게 되다니’ 동생이 미워지기 시작했다. 그때 이들이 양화전 나루에서 배를 타고 강 한가운데쯤 왔을 때 아우가 그 큰 금덩이를 강물에 던져버렸다. 형도 던져버렸다. 그리고 나서 형제는 서로 마주보며 싱긋 웃었다. 우애가 회복된 것이다. 사람들이 가난해서 싸우는 일은 아주 많지는 않다. 더 가지려는 욕심 때문에 싸운다. 광야에서 굶어 죽은 사람 없다. 탐심으로 죽었을 뿐이다.

톨스토이의 욕심쟁이 땅차지 예화가 있다. 누구든지 아침해가 뜰때부터 해질때까지 자기가 갖고 싶은 만큼의 땅을 말을 타고 한 바퀴 돌면 그 테두리 안의 땅을 모조리 그 사람에게 준다고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말을 타고 많은 땅을 차지하려고 달렸다. 한사람은 이른 아침부터 먹지도 않고 쉬지도 않고 엄청나게 넓은 땅을 얻고자 달렸다. 얼마나 많이 달렸는지 그 사람은 자신의 말과 함께 쓰러져서 죽었다. 사람들이 불쌍해서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무덤을 만들어 주고 나서 사람들은 손에 묻는 흙을 털며 한결같이 말했다. ‘한평만 가지면 넉넉하고도 남을 것을 가지고 그토록 애를 썼구나.’ 사람들은 혀를 끌끌찼다.

한국교회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십자가에 탐욕을 못박아야 한다. 십자가에 예수와 함께 죽는 자만이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탐욕의 무덤에서 해방될 수 있다.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아가자!

군남반석교회 담임•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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