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 종 문 목사

서양기독교 선교의 문제는 19세기 조선민족의 존망의 위기에 관련해서만 취급할 수 없다. 신학 자체의 문제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족의 위기가 한국에서의 기독교 선교의 시작과 전진에 따라서 한국교회의 역사에 결정적으로 관계되어 있다. 조선민족의 존망의 위기와 몰락은 일본제국주의와 식민주의 침략에 의해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일본의 한국침략은 근대에 있어서의 구미자본주의와 식민주의 세력과 결탁해서 성취되었다. 한국에서의 기독교 선교가 서양의 식민주의와 무관하다고 생각해 온 선교사들, 선교사가들, 한국 교회사가들의 생각은 잘못되어도 한 참 잘못되었다. 역사의 흐름을 읽지 못하는 것이다.

15세기 콜럼버스의 세계화 이래 행해진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에로의 서구제국주의•식민주의 팽창과 무력에 의한 정복에 기독교 선교가 수반되었다. 총칼에 의해 정복 당하고, 흑인 노예가 된 피정복자들이 십자가의 구원이라는 복음에 의해서 축복을 받으며 죽어갔다. 그리고 예속되었다. 오늘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이같은 사실을 잊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19세기 아시아에서의 구미의 상거래 협정들이 역시 기독교 선교의 길을 열어주었으며, 군사력에 의해서 상업과 선교의 인물들이나, 재산이나, 치외법권이 철저하게 보호되었다. 그와 같이 기독교 선교는 서양의 군사력과 정치적 침략세력과 결탁되어서 전개되었다. 그것은 한국에서의 기독교선교도 마찬가지이다. 처음 한국에 온 선교사들도 서양의 군사력과 정치적 침략세력과 결탁되어서 시작되었다.

당시 한국에 온 선교사들 중 알렌은 수명을 다한 이씨 조선으로부터 운산금광 경영권을 비롯하여 서울 전기시설 설치권, 전철 공사권, 상하수도 공사권 등을 따 냈으며, 언더우드는 가난한 조선의 백성들을 대상으로 농기계 장사를 했다. 이밖의 선교사들도 두만강 벌목권을 비롯하여 여관운영, 과수원 운영 등을 통해 많은 이익을 남겼다. 이것만 보아도, 한국의 기독교 선교가 서양의 자본주의 시장 개척과 함께 동반해서 전파되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민경배 교수는 “19세기 이전의 서구 기독교 선교는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확장이라는 양상을 가졌다. 그러나 19세기 이후의 선교는 서구식민지 이외에로의 확장이 특징이었고, 그 동력도 세속과의 단절을 전제로 한 경건주의 내지는 부흥운동이었기 때문에 동기의 불순은 최대한으로 제한되고 물질 확대의 의도도 제거되면서 순수한 복음전파의 목표만이 추구되었다”고 했다.

결국 로마를 거쳐 유럽, 아메리카로 간 기독교의 세계화는 결국 하나님이 승리하신 것이 아니다. 맘몬이 승리한 것이다. 신의 자리를 맘몬으로 대체했다. 한마디로 기독교선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침략되어지고, 전파되었다.

민 교수의 지적대로 한국에서의 기독교 선교는 자연스럽게 일본식민지세력과 결탁 할 수밖에 없었으며, 영미선교사들은 먼저 정교분리를 주창했다. 그리고 조선의 백성들로 하여금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리고 조선의 문화와 역사를 철저하게 봉쇄하고, 피압박 민족의 의식화와 민족운동을 막았다. 대신 피압박 민족에게 무슨 죄가 그리 많아 개인 회개와 구원, 그리고 복음화운동을 벌였다. 이것은 당시 피압박 민족에게 최선의 길이었다고 선교사들은 변호하기에 바빴다.
 
예장 통합피어선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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