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가 길었다

새들이 전깃줄에 앉아 있는데
나는 그것이 악보인 줄 알았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아버지는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어린것들의 앞날을 염려하셨다

바람이 몇 번이나 풀들 사이를
지나가는지 세어 보았다

오동꽃이 할 말이 있는 것처럼 피었는데
나는 그것이 보루(堡壘)인 줄 알았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어머니는
지는 꽃의 마음으로
어린것들의 앞날을 염려하셨다

꽃 핀 쪽으로 가서 살거라

세상에 무거운 새들이란 없단다
우는 꽃이란 없단다

아무 말도 없던 것처럼 오후가 길었다

행복보다 극복을 생각하면서
서쪽을 걸었다

* 김현승의 시 「아버지의 마음」에서

▲ 문 현 미 시인
바야흐로 4차산업혁명시대이다. 이 시대는 사물인터넷, 빅데이터, 인공지능 등의 키워드로 대변된다. 2.5일이 지나면 새로운 정보와 지식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그만큼 변화의 물결이 엄청난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데 시인은 시대와 무관한 듯 새들이 전깃줄에 앉아 있는 걸 악보로 생각한다. 생각한다기보다는 악보라고 상상함으로써 시상을 전개한다. 시인이기 때문에 가능한 시적 발상이다. 이런 독특한 상상을 하는 존재가 바로 시인이다.

여기서부터 보편을 뛰어 넘는 특수성이 시작된다. 시인만의 독창성이나 개성이 드러나는 시각이다. 4차산업혁명시대에는 이와 같은 상상력이나 창의력이 무엇보다도 소중하다. 그렇다면 이 둘의 연관성이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예를 들면 작년에 인공지능 알파고는 이세돌 구단과의 바둑 대결에서 세간의 예상과는 달리 승리했다. 그리고 미국 IBM의 로봇 왓슨은 퀴즈쇼 인간 챔피언과의 대결에서 압승을 했다. 하지만 알파고가 퀴즈쇼에서 압승을 할 수 없고, 왓슨이 바둑 대결에서 이길 수는 없다. 그런데 이런 것을 연결시키는 능력이 바로 창의력이고 상상력인 것이다.

시인은 대상을 다르게 보거나 뒤집어 보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어진다. “바람이 몇 번이나 풀들 사이를/지나가는지 세어 보”는 눈이란 또 어떤 것일까. 시에서는 일상에서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다. “오동꽃이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느끼는 시인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대상 너머의 세계를 꿰뚫어 보는 마음의 눈을 지닌 존재가 시인이다. 그러기에 시인은 세상이 어지러울 때면 아버지는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어머니는 “지는 꽃의 마음으로” 자식들의 앞날을 염려한다고 한다. 독자는 이런 멋진 비유적 표현으로 인하여 상상의 나래를 편다. 시인의 참신한 상상이 독자를 즐거운 상상의 길로 이끈다. 계속 그 길을 가다 보면 “꽃 핀 쪽”에서 살 수 있지 않을까. “세상에 무거운 새들”도 없고 “우는 꽃”도 없다는 깨달음에 동참하는 축복도 있으리라. “아무 말도 없던 것처럼” 긴 오후, 그 시간의 궤도에 진입하고 싶은 마음이 꽃피어난다.

백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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