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승자 목사

모래와 돌로 깔린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면서 사탄의 시험을 물리치신 예수님은 세레자 요한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세례자 요한이 처형을 당한 갈릴리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시어 그의 선교 제1성을 외치셨다.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목전에 도달했다”

‘회개하라’는 말은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라는 것이다. 돌아서기만 하면 하나님나라 백성이 된다는 것이다. 가던 길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탐욕을 추구하던 길, 탐욕을 채우기 위해 오용하는 길, 힘의 철학을 신봉하는 길, 맘몬을 좋아하는 길, 이런 길을 물리치는 길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기로 결단하는 길이다.

‘돌아서기만 하면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말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하늘과 땅을 뒤집는 것과도 같았다. 유대인들은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려면, 할레를 받고 율법을 엄격히 지키고 정성껏 속죄 제물을 하나님의 재단에 바쳐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탐욕의 길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오용하는 길에서, 돌아서기만 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코페르니쿠스 식의 일대 변환을 한 것이다. 율법주의자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분노하시는 엄하신 분으로 이해 되었다. 율법을 어기는 자들은 엄격히 심판하시는 분으로 생각 했다. 그래서 경전을 읽다가 야훼의 이름이 나오면 야훼라고 읽지를 못하고, 대신 ‘나의 주’라고 읽을 정도였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해한 하나님은 사랑의 아버지로 죽음의 길로 가던 이들이 돌아서기만 하면, 기꺼이 받아 주신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탕자의 비유가 바로 이런 의미이다.

둘째 아들이 자기의 욕망에 따라서 그릇된 길로 가다가 고난을 통하여 깨닫고 돌아오자 기다리고 있던 아버지는 그를 기꺼이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양과 염소를 잡아 이웃을 청하여 잔치를 베푼다. 그것이 예수님이 전하는 하나님이다. 깨닫고 돌아오는 것이 예수님이 바라는 전부였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심판을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깨닫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사랑의 아버지시다. 멸망하는 자들은 가던 길에서 돌아오지 않는다. 죽음에 이르는 바벨탑의 길에서 돌아서지 않는다. 하나님나라 잔칫집 초대를 거부한다. 예수님의 선교원칙은 무리들로 하여금 깨닫고 돌아서기를 돕는 일이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중심의 종교인들을 찾아가시지 않고 갈릴리로 가신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율법을 지킨다는 거룩한 무리들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여 돌아서지 않는다. 영생을 위해 예수님께 왔던 부자청년의 이야기가 이를 말해준다. 예수님은 그에게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라고 하자, 그는 머리를 떨어트리고 돌아갔다. 율법을 지킨다는 그가 가던 길에서 돌아선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힘든 것이다.

누가 돌아설 수가 있는 것인가. 돌아설 수 있는 자들은 바벨탑 문화에서 수탈당하고, 추방당하는 한 맺힌 자들이다. 그들이 선하게 사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들은 마음의 탐욕을 버리고,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설 수 있다.

햇빛중앙교회•본지 후원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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