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승 자 목사

요즘 한국교회를 생각하면, 잠이 안 온다. 나만이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예수님의 선교와 동떨어진 선교를 하기 때문이다. 나라와 민족, 그리고 한국교회를 위해서 기도해온 필자는 그냥 골방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할 뿐이다. 한국교회여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라고 기도한다. 그리고 갈라진 남북한 민족의 화해와 평화통일을 위해서 기도한다. 빼놓지 않고 한국교회의 변화와 제3의 성장을 위해서도 기도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세레를 주어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태복음 28장19-20절)라고 선교명령에 뿌리를 두고, 한국교회와 세계교회는 하나님의 복음을 세계 곳곳에 선포한다.

이처럼 세계화를 지향하는 기독교의 선교 명령은 5세기 지중해 연안 국가들로 확산되었다. 10세기에 이르러서는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기독교 세계화가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은 15세기 자본주의 발흥과 항해술의 발달하면서부터였다. 유럽인들의 세게화와 기독교 선교는 콜럼버스가 품었던 신대륙을 향한 꿈에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새로 등장한 유럽의 자본주의의 욕구에서 출발했다. 기독교적 세계 선교명력도 그 바탕에 근거하고 있다. 콜럼버스는 “지구상에 있는 모든 백성들의 우상을 비로 쓸어버리고, 그들이 처한 곳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게 할 것이다”고 대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도를 굳게 믿고, 신대륙으로 떠났다.

유럽인들의 기독교 세계선교의 꿈과 자본주의적 세계화는 콜럼버스의 항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중세의 특징인 정치와 종교의 결합은 중세 말에 와서 자본주의와 기독교선교의 결합으로 대치됐다. 500년이 지난 오늘, 자본주의의 독보적인 승리로 나타났다.

독일의 시사주간지 콜럼버스의 미 대륙 발견 500주년 특집에서, 기독교 선교를 뛰어넘는 자본주의의 세계적 승리의 결과를 이렇게 평가했다.

“전능하신 하나님 대신 시장이 등장했다. 이 신의 현현은 다우존스 주가지수이고 그의 성체는 미국의 달러이며, 그의 미사는 환율조정이고, 그의 나라는 지금 크램린 지도자들까지도 찬양하는 자본주의 보편 문명이다”

이 얼마나 무서운 평가인가. 오늘 한국교회와 기독교선교를 질타하는 말로 들린다. 유럽의 기독교 세계선교는 희망을 가지고 출발했지만, 결과적으로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보편적 물질문명이다. 오늘 한국교회 역시 자본주의에 길들여진 나머지 하나님나라의 척도를 헌금의 액수로 계산한다. 믿음의 척도도 헌금의 액수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교회는 부자가 되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설자리는 없다.

목회자는 강단에 올라 서자 마자 헌금봉투에 축복기도를 해 준다. 그리고 새벽마다 눈물을 흘리는 부자들의 눈물을 닦아준다. 분명한 것은 한국교회가 가장 많이 성장했을 때는 가난하고, 소외되고, 떠돌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며, 이들과 함께 역사의 현장에서 예수님이 벌인 하나님나랄운동을 벌였던 당시이다. 이 때 국민들은 일용할 양식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했다. 일제의 억압과 압제에 항거하며, 나라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서 기도했다. 또 민족통일을 위해서도 기도했다. 오늘 한국교회가 현상을 유지하는것도, 이들의 간절한 기도가 었었기 때문이다.

햇빛중앙교회•본지 후원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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