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 성 택 목사

제로섬이란 게임이나 경제 이론에서 여러 사람이 서로 영향을 받는 상황에서 모든 이득의 총합이 항상 제로 또는 그 상태를 말한다. 치열한 싸움이 끝나면 패자는 모든 것을 잃고, 승자는 모든 것을 얻는다. 그러므로 제로섬 게임은 사회적으로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그런데 바둑에서 묘수와 막상막하한 수 싸움 끝에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반집승부를 볼 수 있다. 불계승이든 반집이든 이긴 것에는 차이가 없지만, 반집승부는 당사자에게는 끝까지 피를 말리지만 관전자에게는 가장 흥미진진한 바둑의 진수를 보여누는 게임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제로섬이라는 사회적 용어와 반집승이라는 바둑 용어를 가지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이 제로섬 게임처럼 너무 각박하고 치열해짐이 걱정스럽기 때문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처절한 실패를 딛고 국민적 열망을 안고 출범한 대선의 승리자 문재인 정부는 이상 열기에 가까운 지지를 받으며, 선악의 논쟁에서 조차 빗겨선 탄핵정국의 특수를 누리고 있고, 참패한 야당들은 전전긍긍하고 있다. 새로운 정권에 대한 전폭적인 여론의 지지와 탄핵정국의 절대적 책임자인 야권의 무능한 정치적 처신으로 인해 모든 면에서 여당의 일방적인 승리와 야당의 완패를 점칠 수 있는 제로섬의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하기야 이것이 민심이라고 하면 누굴 탓하겠는가? 하지만 제로섬은 미래 지향적 사회를 위하여 결코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며, 승리자에게도, 패배자에게도, 궁극적으로 미래의 선진사회로 나가야 하는 우리에게도 불행한 것이다.

우리들은 정치적 제로섬 양상을 경계한다. 지난 날 한나라당의 절대 과반수의 의석분포가 가져온 난국을 기억하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의원을 꿔주면서까지 자민련과의 동맹을 유지하려고 했던 이유에 주목한다. 지금처럼 여야의 황금분할은 의정활동의 치열함과 민주 발전에 동력이지만 어떤 형태로든 절대적 권력에 의한 정치 질서는 역사적 출현은 불행을 초래할 수 있다. 초반부터 대세가 결정나거나, 일찌감치 대마가 잡혀 불계승으로 끝나버리는 그런 바둑같은 정치적 결과는 진정한 민주주의 발전을 가져올 수 없다.

전성기의 바둑의 달인 이창호 씨는 이런 반집승의 경우로 유명한 사람이다. 그는 반집이라도 이기고 있으면 절대로 무리하지 않는다. 아무리 불리한 상황에서도 표정의 변화가 없는 그의 얼굴에는 승패를 떠나 바둑을 즐기는 절대 고수의 품위를 읽을 수가 있다. 그런 그의 바둑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에서는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들을 읽을 수 있다. 이것이 이창호 바둑의 매력이요 힘이었다. 필자는 새정부 출범 이후 각종 정치적 사안마다 이창호 같은 후보자의 정치 고수다운 모습과 그들이 보여주는 정치적 대결의 멋진 일합일합(一合一合)을 보며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민초들을 보고 싶다. 과연 정치적 게임으로서의 반집승의 묘미를 맛볼 수는 없는 것일까? 상대가 약하다고 마냥 힘으로 밀어붙이는 이 제로섬의 상황을 어떻게 비켜갈 수 없을까?

그런데 정치와 바둑의 기묘한 차이가 있다. 바둑은 선수에 의해 승부가 결정나지만 정치는 관중에 의해 결정된다.

정치적 결과가 도출되도록 선수를 유도하는 것이 민주시민의 몫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반집승의 책무가 민초에게 있다면, 당연히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관전의 자세를 가다듬고 정치적 대국자들이 몰입하고 있는 정치판을 냉정하게 들여다보며 양심을 따라 정직하게 평가한다면, 제로섬의 불행보다는 정반집승의 기막힌 승부의 묘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고수가 아니면 결코 출전할 수 없는, 바람이나 흥행으로는 이길 수 없는 정치판이 되었음을 알려주자. 문재인 정부는 경기는 자신들이 하지만 승부는 민초의 몫임을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대학 전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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