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당하는 사람과 하나님나라 운동을

1990년대 소련의 해체와 함께 사회주의는 붕괴되고, 동서 냉전체제는 막을 내렸다. 대신 미국을 정점으로 한 새로운 자본주의적 세계질서가 등장했다. 최근에 와서는 한반도를 둘러싸고 미국과 중국의 힘겨루기가 만만치 않다. 또한 동서 냉전은 남북의 열전으로 대치됐다.

부유한 국가는 더 부유해지고, 가난한 나라는 더 가난해져서 이들 사이의 괴리는 더 깊어져 가고 있다. 이를 가리켜 학자들은 80대 20, 또는 90대 10의 세계라고 부른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화돼 전체 세계인구 0.1%가 세계 전체 부의 40%를 소유하고 있다.

미국과 같은 부자 나라도 인구의 11%가 먹을 것을 걱정한다. 전 세계에서 7초에 어린이 한 명이 기아로 죽임을 당하고 있다. 유엔 통계에 의하면, 세계인구 중 2억명이 하루에 1달러도 안 되는 생활비로 살아간다. 세계 경제대국이라는 대한민국 역시 초등학생 10%가 끼니를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있다. 1년에 수천가구가 빈곤으로 해체되고 있다. 또한 매년 5000명이 부채와 빈곤, 실직, 아동학대, 왕따 등으로 자살하고 있다.

경건한 가톨릭 신자 콜럼버스가 미국 신대륙을 발견하면서 시작된 ‘새로운 세계질서’는 500년이 지난 1990년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에 의해서 완결됐다. “하나님께서 세계를 통치하실 것이다”란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도를 믿고, 스페인을 출발한 콜럼버스의 세계화에 대한 꿈은, 이 세계를 하나님이 아니라 맘몬, 그리스도가 아니라 달러가 지배하는 세계를 만들었다. 맘몬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세계질서가 선(善)이 되었으며, 여기에서 이탈된 모든 것이 악(惡)이다. 이 질서에 편입되지 않은 나라들은 악의 축이나, 테러 국가로 지목되어 미국의 국가적 테러에 직면해 있다.

바알의 물신숭배가 전 인류를 노예화하고, 몰록신들이 도처에서 인간의 생명, 특히 어린생명들을 재물로 요구하는 오늘날 세계질서에서, 한국교회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해진다. 한마디로 신을 맘몬으로 대치시킨 한국교회는 어떻게 신학하고, 교회가 하나님나라선교를 어떻게 감당 할 것인가(?)

분명한 것은 가던 길을 멈추고, 성서로 돌아가야 한다. 성서의 회상규율에 따르면, 고난당하는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거기에 동참하는 것이 바로 한국교회의 하나님나라운동이다. 하나님은 바로왕 밑에서 착취당하는 하비루들의 아우성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을 파라오의 압제 밑에서 구해주셨다.

“나는 에집트에 있는 나의 백성이 고통 받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억압 때문에 괴로워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고난을 분명히 안다. 이제 내가 내려가서 이집트 사람의 손아귀에서 그들을 구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데려가려고 한다”(출애굽기 3장7-8절)

구약성서의 핵심은 율법이다. 그 가운데 사회법은 하나같이 고난당하는 사람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는 것을 주된 관심으로 삼고 있다. 또한 사회적 예언자들 역시 율법의 사회법 정신을 계승, 고난당하는 사람들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을 돌보는 것을 최대 관심사로 삼았다. 아모스는 말했다.

“나는 너희가 말하는 절기행사들이 싫다. 역겹다. 너희가 교회로 모여도 도무지 기쁘지 않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이나, 곡식을 받친다 해도, 내가 그 제물을 받지 않겠다. …(중략)…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아모스서 5장 21-24절)

예수님 역시 “때가 찼다.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설교하며, 공생애를 시작했다. 그는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태어나 들에서 고생하는 목자들에게 하나님나라에 대한 기쁜 소식을 전했다. 얼마나 인정과 희망. 그리고 사랑과 평화가 넘치는 하나님나라운동인가.

신학, 예수님의 역사의 현장서 시작돼야

천사들은 예수님의 탄생의 의미가 하늘에는 영광, 땅에서는 고난당하며, 갈등가운데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평화라고 노래했다. 바울도 그리스도 찬가에서 “그리스도는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으로 사람과 같이 되었고, 자기를 낮추어 죽기까지 복종했다”(빌립보서 2장 7-8절)고 선언했다.

예수님의 시간과 장소는 고난당하는 사람들의 시간과 장소였다는 것을 말해 준다. 교회의 시간과 장소는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신 고난당하는 사람들의 시간과 장소이어야 한다. 신학도 고난당하는 사람들의 시간과 장소에서 출발하고, 그 곳에서 귀결되어야 한다. 헌데 오늘의 교회는 교회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를 않다. 또한 신학도 고난당하는 사람들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학이 할 수 없다.

신학함과 교회에 대한 의미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오늘 한국교회는 영미의 경건주의와 근본주의, 정통주의에 매몰돼 세계를 하나님이 아닌 맘몬이 지배하는 결과를 만들었다. 예수님께서 고난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역사의 현장에서 벌인 하나님나라운동은, 교회들이 부자가 되면서 수명을 다해가고 있다. 한국교회가 텅 빈 유럽교회와 미국교회를 비판하기 이전에, 오늘 한국교회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이고 있는가를 되짚어 보아야 한다. 그것은 신학도 마찬가지이다.

오늘 기독교회의 모습은 한마디로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는데 급급하다. 강단에서 목회자들은 교인들의 주머니를 터는데 익숙해졌다. 신의 자리를 맘몬(돈)이 빼앗아 버렸다. 목회자는 강단에 오르자마자 헌금 이야기부터 한다. 헌금의 액수에 따라 하나님나라가 결정된다. 신앙의 척도도 결정된다. 성서의 정신과 다르게 부자들의 눈물을 닦아주며, 가난과 전쟁, 그리고 떠돌이, 불구자들을 외면하는 교회가 바로 이단이며, 적그리스도이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자본주의 시장경제 원리에 길들여져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에 길들여진 오늘의 교회는 정의와 불의의 싸움이 아니다. 헤게모니를 쥐기 위한 권력의 싸움이다. 이는 제102회 장로교 총회에서 그대로 나타날 것으로 보여 귀추가 주목된다. 그러면서 종교개혁 당시 공의회를 인정하지 않은 중세교회의 교황을 비난한다.

그렇다. 오늘의 한국교회에는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는 없다. 호화로운 십자가만 호화로운 건물 꼭대기서 밤하늘을 수놓고 있다. 언제 십자가가 땅에 떨어져 사고를 일으킬지 모른다. 십자가는 불의한 정권을 옹호하는데도 여지없이 등장했다. 그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행동으로 보여 준 것처럼, 등에 지어야 한다. 그래서 일부 신학자들은 오늘날의 신학, 헬레니즘을 시도했던 초대교회의 신학, 중세 봉건사회체제의 정치적, 종교적 지배계급을 위한 로마 가톨릭신학, 종교개혁 후 등장한 서구의 부르주아적 자본주의 경제적, 사회적 토대를 위한 자유주의적 신학과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 신학은 결국 실패했다. 이러한 신학을 토대로 형성된 교회공동체는 수명을 다해가고 있다. 이미 많은 유럽교회는 문을 닫았으며, 남은 교회들은 노인시설 등으로 전환되고 있다. 오래된 교회들은 관광객들이 기념사진이나 찍는 장소로 변질됐다. 종교세를 내는 국가의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에 대해서 염증을 느끼고 탈퇴한다. 많은 교회들이 정부의 지원이 끊겨 재정적자에서 헤어나지를 못한다.

교회와 신학은 진정한 의미에서 가난하고 억눌린 고난의 현장에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현현과 예수님께서 성육신 하신 때와 장소가 그 출발점이며, 종착점이다. 그런데 한국교회를 비롯한 세계교회는 맘몬과 바벨에 길들여진 나머지, 맘몬이 교회의 전부이며, 맘몬은 높은 바벨탑을 쌓는데 사용되고 있다.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쓰여 지는 돈은 아주 미미하다. 그러면서 기독교가 좋은 일을 가장 많이 하는데 언론으로부터 몰매를 가장 많이 받는다고 푸념한다.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는 교회로

한국교회의 출발점은 어디에 있는가. 신학의 출발점은 어디에 있는가. 지난날 고난당하던 이스라엘 민족이 있던 이집트의 광야는 어디이며, 그리스도 탄생의 소식을 듣고 증언자가 되었던 목자들이 있는 곳은 어디인가. 그곳은 서울의 한복판과 잘난 사람들이 사는 분당, 강남, 일산은 아닐 것이다. 그 곳은 노숙자들이 괴로운 삶을 이어가는 서울 지하철역이고, 인간대접을 받지 못하고 중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리는 외국인노동자들이 있는 곳, 사창가에서 몸을 팔며 살아가는 여성들의 신음소리가 들려오는 곳, 일본군에 끌려가 시궁창보다도 못한 삶을 산 위안부 할머니들이 있는 곳, 분단의 아픔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분단의 현장, 죽도록 농사를 짓고도 빚더미에서 헤어나지를 못하는 곳이 아닌가.

그렇다 교회는 호화로운 건축물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며, 하나님나라운동을 위한 신앙공동체이다.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현장에 교회가 있어야 한다. 그곳에서 고난당하는 이웃들의 아우성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여야 한다. 여기에서 이탈한 교회는 성서와 다른 것을 말하기 때문에 이단이며, 기독교를 가장한 사이비이다. 일반국민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목사와 교회를 향해 ‘사이비’라고 말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과 맺은 계약대로 맘몬이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결코 정의를 실현할 수 없다. 전쟁과 기아, 갈등으로 고난당하고, 인간의 탐욕에 의한 난개발로 파괴되어 가는 자연을 살리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과제이다. 이것은 또 그리스도인 모두의 ‘삶의 목표’이다. 인간은 자본주의적 맘몬 숭배하며,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도전한 결과 재앙이 끈이지를 않는 세계에서 정의를 실현하고, 하나님이 통치하는 평화의 세계로 돌려놓고 신음하는 자연을 되살리는 것이 오늘 한국교회와 세계교회에 주어진 일차적 과제이다.

신의 자리를 빼앗은 교회는 종교개혁을 말 할 자격이 없다. 500백년전 루터에 의해서 발현된 종교개혁은 이벤트성 사업으로 치닫고 있는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참담하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신을 신의 자리를 돌려놓고, 교회가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백날 교회성장프로그램을 진행하면 무엇하고, 국민들이 공감하지 않는 전도를 하면 무엇하겠는가. 이미 교인들의 눈에는 목사와 교회가 사이비로 비쳐지고 있는데 말이다. 한번 이단으로 규정되면, 여기에서 헤어 나오는데 수 십 년이 걸린다고 한다. 한국교회가 사이비로부터 자유롭고, 초대교회의 신뢰를 쌓기 위해서는 수 십 년이 걸리지 않겠는가.

오늘의 상황에서 한국교회는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분단의 현장으로 들어가 하나님나라운동, 즉 평화적인 민족통일운동을 벌여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 한반도는 일촉즉발의 전쟁위기에 처해 있다. 북한은 핵을 개발해 남한을 위협하고 있으며, 미국은 북한정권의 붕괴를 위한 선제공격을 말하고 있다. 6.25전쟁을 경험한 한민족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목회자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말들은 그것이 아니다. 100-300만명이 죽어도 괜찮다며, 남북한 무기경쟁을 부추긴다.

남북한 무기경쟁은 한민족 공멸을 말하는 것이다. 평화를 말하는 사람은 용공이며, 빨갱이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불의한 정권을 위해서 기도하며, 국민간의 갈등을 부추긴다. 분명한 것은 미국의 자본주의 핵우산 아래 있는 대한민국은 불안한 안보에 처해 있다. 참된 평화가 아니다. 이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남북한 민족의 화해를 통한 참된 평화를 위해서 봉사해야 한다. 군사적 안보는 세상이 주는 로마의 평화이다.(요한복음 14장27절) 핵이 남북한 민족을 위협하는 현실에서 평화는 삶의 계명이다. 핵은 인간을 분열시키고, 핵분열은 인간의 몸을 산산히 해체시킨다는 사실을 깨닫고, 교회는 정의와 평화운동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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